“김구 선생 ‘영경방’ 흔적만 남았네요”

박수빈 기자 2024. 9. 8. 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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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 직접 가 보니 많은 독립운동사적지는 열악한 환경 속에 놓여 있었습니다. 직접 가서 보니 마음이 너무 무거웠어요. 많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부산광복원정대'에 참여해 중국 상하이 등 독립운동 사적지를 탐방한 김예진(31) 씨는 국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같이 말했다.

김 씨를 비롯한 독립유공자 후손 28명은 지난달 24일부터 27일 3박 4일간 중국 상하이·항저우 등 독립운동사적지를 탐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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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사적지 찾은 부산광복원정대

- 열악한 현장에 탄식, 관심 호소

“현장에 직접 가 보니 많은 독립운동사적지는 열악한 환경 속에 놓여 있었습니다. 직접 가서 보니 마음이 너무 무거웠어요. 많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부산지역 독립운동가 후손들로 구성된 ‘부산광복원정대’가 중국 상하이의 김구 선생 거주지였던 영경방을 탐방하고 있는 모습. 김예진 씨 제공


‘부산광복원정대’에 참여해 중국 상하이 등 독립운동 사적지를 탐방한 김예진(31) 씨는 국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같이 말했다. 김 씨를 비롯한 독립유공자 후손 28명은 지난달 24일부터 27일 3박 4일간 중국 상하이·항저우 등 독립운동사적지를 탐방했다. 임시정부청사와 유적지의 일부 전시 구간을 제외하면, 이들이 본 독립운동사적지는 대부분 낡고 부서진 건물이었다. 지리적 접근성도 열악한 데다 안내판조차 없는 곳이 많았다.

김 씨는 “김구 선생 가족의 거주지였던 영경방은 이름표만 남아 있고 모두 상가로 바뀌었다. 최초 일본군 위안소였던 대일살롱은 입구를 제외한 건물 뒤편이 모두 허물어져 있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시작된 곳인 서금이로에는 이를 안내하는 표지석도 없었다. 이곳이 일반 도로인지, 역사적 의미가 담긴 서금이로인지 일반 사람으로서는 알 수가 없는 구조”라고 설명했다.

이어 김 씨는 사적지를 보존·관리하기 위해 꾸준한 관심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독립유공자 분들은 목숨을 걸고 나라를 위해 나섰지만, 이들의 희생은 다 쓰러져가는 건물과 함께 잊혀지고 있는 듯했다”며 “독립유공자인 후손인 우리들도 현장을 탐방하기 전까지 열악한 사적지의 실태를 알지 못했다. 더 많은 이가 현장을 찾고, 이곳의 열악한 현실을 알려야 한다”고 말했다.

김 씨는 독립유공자인 김욱진(1885~1943) 선생의 증손녀다. 김 선생은 경북 안동시에서 1919년 3월 24일 안동군 풍산면 만세 시위에 참가했다 일제에 붙잡혀 6개월간 옥살이를 했다. 풍산면 만세 시위는 3·1운동 계열로, 이 시위대를 해산시키기 위해 일제 수비대가 실탄을 발사하며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기도 했다. 수감 중 이어진 고문으로 몸이 망가진 채 풀려난 그는 부산에서 여생을 보냈다. 김 선생은 이 같은 공로를 인정받아 201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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