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란민·노동자 몰려들었던 ‘부산 근현대사 응축지’

정지윤 기자 2024. 9. 8. 1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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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은 6·25 전쟁으로 인한 물리적 피해는 적었으나 단기간에 인구수가 폭증하며 무질서한 모습으로 성장했다.

전국 각지에서 피란민이 몰려들었던 부산은 전쟁 직전인 1949년 47만 명에서 1951년 84만 명으로 인구가 폭증했다.

피란민이 생존을 위해 지은 '불량주택'은 개·보수를 거쳐 1970년대 근대적인 건축자재가 들어오기 전까지 명맥을 유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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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 초장동

부산은 6·25 전쟁으로 인한 물리적 피해는 적었으나 단기간에 인구수가 폭증하며 무질서한 모습으로 성장했다. 피란수도 시절, 생존을 위한 임시방편과 자구책은 오늘날 빈집 문제 해결을 어렵게 만드는 걸림돌이다. 0.44㎢의 초장동에는 767.4㎢ 면적의 부산의 과거와 미래가 응축돼 있다.

초장동은 천마산 경사면을 따라 단독주택이 빼곡히 들어선 전형적인 원도심 빈집 밀집 지역이다. 이러한 초장동의 원형은 6·25 전쟁을 기점으로 만들어졌다. 전국 각지에서 피란민이 몰려들었던 부산은 전쟁 직전인 1949년 47만 명에서 1951년 84만 명으로 인구가 폭증했다. 정부는 약 7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피란민 수용소를 남부민동 청학동 대연고개 등 40여 곳에 지었으나 턱 없이 부족했고, 이곳은 그나마 운이 좋아야 들어갈 수 있는 시설이었다.

가난하고 연고가 없는 피란민은 산과 바다의 끝에 위태롭게 자리 잡았다. 주로 움집 천막집 판잣집 등을 짓고 생존을 위해 발버둥 쳤다. 초장동도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된 피란민촌 중 하나였다. 피란민은 산비탈에 나무판자로 벽을 세우고 지붕은 종이에 기름(콜타르)을 바른 루핑지나 양철 깡통을 펴서 집을 지었다. 소설가 김동리는 당시 부산의 모습을 단편소설 ‘밀다원 시대’에서 “끝의 끝, 막다른 끝, 거기서는 한 걸음도 떠나갈 수 없는, 한 걸음만 더 내디디면 바다에 빠지거나 허무의 공간으로 떨어지고 마는 그러한 최후의 점 같은 곳”이라고 표현했다.

피란민이 생존을 위해 지은 ‘불량주택’은 개·보수를 거쳐 1970년대 근대적인 건축자재가 들어오기 전까지 명맥을 유지했다. 대부분 국·공유지에 무허가로 지은 집이지만, 지대를 받고 거래가 활발히 이뤄졌다. 1976년 초장동으로 시집 온 김도희(70) 10통장은 “시집 올 때만 해도 산복도로 자리에 원래 ‘루핑집’이 빼곡했다. 일제강점기 때 지은 초가집, 기와집도 그때그때 고쳐 살면서 여전히 남아 있었다”며 “슬레이트 지붕은 지금 석면 때문에 문제지만, 당시에는 ‘밥 좀 먹고 사는 집’의 상징이었다”고 회상했다. 루핑집은 ‘루핑’이라고 하는 검은 색의 두꺼운 기름종이로 지붕을 덮은 가옥을 말한다.

피란민이 떠난 자리는 1970~1980년대 가난한 노동자가 채웠다. 공동어시장 국제시장 등 일자리가 풍부한 도심부로 출퇴근이 쉬웠기 때문이다. 게다가 초장동 일부는 성매매 집결지인 완월동(행정구역상 충무동)에 포함돼 업소 청소 빨래 일부터 ‘나까이(호객)’ 일을 하는 주민도 다수였다.

이곳에서 40여 년째 이발소를 운영하는 주민은 “초장동은 출퇴근 시간대 골목을 내려가고 올라가는 사람으로 연신 북적였다. 주택가 한가운데에 이발소를 차린 것도 그 이유”라며 “그때는 손님 끊길 걱정이 없던 시절인데 이제는 사람 머리통 구경하기가 힘들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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