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강과 경호강 80리 [서울 말고]
권영란 | ‘지역쓰담’ 대표
경남에는 낙동강 섬진강 말고 남강이 있다. 낙동강 제1지류로 국가하천이다. 경남 서북부 남덕유산에서 발원해 경남동부 낙동강과 합류하는데 흔히들 남강 500리 물길이라고 말한다. 시작과 끝이 온전히 경남의 강이지만 그 가치를 주목받지 못했다.
남강은 경남 18개 시·군 중 10여 지역 주민들의 식수원이자 생활용수로 쓰이는 주요 자원이다. 경남 내륙을 타고 흐르는 하나의 물길이지만 지역마다 주민들이 부르는 강 이름은 다르다. 행정기관이나 진주에서는 남강이라 하지만 함양 서상면에서는 남계천, 의령에서는 정강이라 했다. 산청에서는 경호강 혹은 경호강 80리라 말한다.
오래전 지역신문에서 일할 때 ‘남강 오백리’를 기획하고 연재한 적이 있다. 경남의 강과 문화를 조사하다가 낙동강이나 섬진강에 비해 남강에 대한 자료나 기록이 거의 없다는 걸 알게 되면서 시작한 일이었다. 1년 넘게 남강 물길을 톺아 나름 경남지역의 묻히거나 잊힌 역사를 발굴하고자 했다. 남강의 역사가 곧 경남의 역사이기도 해, 강 유역의 오랜 문화와 사람들의 삶을 조명하려고 애썼던 것 같다. 연재를 끝낸 뒤 다행히 ‘남강을 통해 지역 민중생활사를 발굴했다’는 평가를 받았고 2016년 단행본으로도 출간됐다. 그 뒤 경남지역 인문학이나 지역 아카이브를 주제로 마련되는 자리에 종종 초대받곤 했다.
얼마 전에는 책이 나온 지 8년 만에 처음으로 산청 강연을 했다. 산청지리산도서관의 초대를 받아 ‘남강 오백리와 산청 사람들’이라는 주제로 산청 구간의 경호강 80리를 통해 산청살이를 되짚었다. 좀 더 생생한 증언을 위해 이 자리에 토박이 어르신 세 분을 초대했고 짧게나마 경호강과 마을살이에 관한 구술 시간을 가졌다. 나룻배가 다니던 시절, 강물을 이용해 곡식을 빻던 밀친방아, 물난리에 다리가 무너지던 일 등 오랜 기억 속의 일화들이 줄줄이 이어졌다. 어른들의 증언으로 산청지역의 근현대 100년이 그려지는 듯했다.
그런데 이날 강연 참여자들 대부분이 ‘들어온 사람’이었다. 산청군 통계에 따르면 최근 몇년 새 귀농·귀촌 인구가 꾸준히 늘고 있다. 도시 생활에서 벗어나 농촌에서의 건강한 삶을 꾸리고자 하는 50~60대가 전입인구의 약 40%를 차지하고 있다더니 평생교육 강좌나 지역 행사장에서 마주치는 사람들 대부분 귀농·귀촌인이다. 길게는 들어온 지 20년이 넘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나처럼 갓 들어온 사람도 있다.
이들 누군가를 붙잡고 왜 산청으로 왔냐고 물으면 대부분 ‘산 좋고 물 좋은 지역이어서’라고 답한다. 일반적으로 ‘산청’이라면 국립공원 1호 지리산을 떠올린다. 지리산이 5개 시·군에 걸쳐있음에도 가장 높은 봉우리 천왕봉이 산청군에 있기 때문일 게다. 산청군 전체 면적 중 77%가 산이다. 산 좋은 지역임은 분명한 듯하다. 그렇다면 ‘물 좋은’은 어디서 나온 걸까. 앞에서 밝혔듯이 남강과 경호강 80리가 ‘물 좋은’ 산청이라 일컫는 큰 요인이다.
근데 이상하다. 지리산과 경호강 80리는 물론 산청지역의 산과 강을 기록한 자료가 별로 없다. 지방정부가 ‘청정 산청군’을 내세우고 있어 다양한 기록화 작업이나 콘텐츠 생산에 집중할 법도 한데 말이다. 경호강 80리 유역의 마을과 사람들의 삶을 따라가다 보면 산청지역만의 정체성이 드러날 텐데…. 경남 사람들이 남강에 무관심하듯 산청 사람들도 그동안 경호강 80리에 무관심했던 것 같다.
태어난 곳이든 들어온 곳이든 제대로 뿌리를 내리고 살기 위해서는 지역 곳곳을 톺아보는 애씀이 필요하다. 마을의 산과 강을 익히고 오래 살아온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지역 정서를 닮아가는 데는 좀 더 긴 시간이 필요하다. 이곳 산청으로 들어와 마을 주민이 되려면 먼저 남강과 경호강 80리에서 시작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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