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영운의 히코노미] 王의 남자 죽고나니 돌변한 루이14세 스러진 절대왕정 남은건 나라 부채뿐

강영운 기자(penkang@mk.co.kr) 2024. 9. 8.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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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왕' 루이 14세 흥망성쇠
1830년 7월 혁명을 기념해 외젠 들라크루아가 그린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그는 세상의 주인이 되고자 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큰 궁전, 아름다운 여인들, 진귀한 동식물까지. 모든 것은 그의 소유여야 했습니다. 불이 꺼지지 않는 궁전은 그의 치세를 찬양하는 신하들로 가득합니다. 측근의 부인들도 거리낌 없이 자신의 침실로 불러들입니다. 지상에 만든 천국에서 그는 신과 다름없었습니다. 프랑스 절대왕정의 상징인 '태양왕' 루이 14세의 이야기입니다. 경제학의 기본 원칙은 간단합니다. 공짜 점심은 없다는 것. 루이 14세가 본인의 절대권력을 누릴 수 있던 기반에는 나라 곳간을 가득 채운 훌륭한 신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르 그랑 콜베르(Le Grand Colbert)'. 루이 14세의 재무 총감인 '위대한 콜베르'였습니다. 루이 14세의 프랑스가 향락의 극치를 달리면서도 유럽의 최강자로 떠오른 배경에는 콜베르의 회계적 지식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오늘날 가장 아름다운 궁전으로 통하는 베르사유 역시 콜베르가 없었다면 존재하지 않았을 테지요. 이 사내는 어떻게 프랑스를 강대국으로 만든 것이었을까요.

절대왕정의 초라한 시작

"저는 정치가 너무 무서워요, 어머니."

오늘날 태양왕이자 절대왕정의 상징으로 통하는 루이 14세지만 그 시작은 미약했습니다. 아버지 루이 13세는 네 살에 불과한 루이 14세를 두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에게 남겨진 건 전쟁으로 인한 막대한 부채에 허덕이는 프랑스. 어머니 안 도트리슈와 재상 마자랭의 섭정기(대리통치), 민중의 삶은 비참하기 그지없었습니다.

결국 프롱드의 난이 터지고 말았습니다. 왕권 약화를 기회 삼아 귀족들이 권력을 강화하려는 시도였습니다. 파리를 봉쇄한 반란군을 피해 루이는 어린 나이부터 피난을 다녀야만 하는 처지였지요. 어린 루이는 어려서부터 권력의 피비린내를 맡아야 하는 신세였습니다. 프롱드의 난은 가까스로 진압했지만, 루이 14세의 마음속에는 큰 결기가 섰습니다. "어떻게든 나라를 강대국으로 만들겠어. 내 자리를 보전하기 위해서라도."

1651년 열세 살의 루이 14세가 '친정'을 선언합니다. 나이는 어렸지만 더 이상 어머니 안 도트리슈의 치마폭에 싸여 있을 수만은 없는 일이었습니다. 마자랭 재상과 통치에 관련된 대화를 나누고, 인재를 등용하면서 프랑스가 나아가야 할 길을 구상하기 시작합니다.

콜베르 초상화.

콜베르와의 운명적 만남

"이 남자를 써보시지요."

마자랭 재상이 루이 14세를 알현할 때 한 남자를 대동합니다. 장바티스트 콜베르라는 이름의 남성. 마자랭의 최측근으로 그에게 정치적·경제적 조언을 아끼지 않는 '브레인'이었습니다. 마자랭이 루이 14세의 '두뇌'였다면, 마자랭에겐 콜베르라는 조언자가 있었습니다. 루이 14세의 국정 운영에 콜베르가 간접적으로 관여한 것이었지요.

잠깐 콜베르에 대해 설명하고 넘어가야겠습니다. 콜베르는 프랑스 샹파뉴(영어로 샴페인) 주도 랭스의 금융가에서 태어났습니다. 무역에 필요한 금전을 제공하는 것을 가업으로 삼은 집안이었습니다. 10대 중반부터 회계사 교육을 받았을 정도로 그들에게 경제는 중요한 요소였습니다. 당대 최고의 금융국가인 이탈리아 은행가 집안 마스크라니가의 리옹 사무실을 그가 첫 직장으로 삼은 이유였습니다. 그는 당대의 이름난 재무 전문가가 되어가고 있었지요. 중세 상인들의 상업 매뉴얼인 아르스 메르카토리아(Ars Mercatoria)를 완전히 체화한 인물이 콜베르였습니다. 회계의 중요성이 무시되던 프랑스에서는 이례적인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콜베르의 눈은 궁을 향해 있었습니다. 상인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그의 꿈은 프랑스의 부국. 1639년 그가 육군성에 들어간 계기였습니다. 군대의 병력과 보급품을 모두 정리해 재정 상태를 완벽하게 파악합니다. 이 특출난 젊은이를 눈여겨보던 사람. 프랑스의 수뇌부 마자랭 재상이었습니다. 마자랭은 콜베르를 자신의 핵심 인재로 활용합니다. 그에겐 엄청난 재산이 있었지만 관리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콜베르는 지식은 있었으나 재산이 미미했지요. 두 사람은 서로에게 부족한 걸 채워줄 수 있었습니다.

1658년 마자랭의 재산은 800만리브르(중세 프랑스의 화폐 단위)였지만 콜베르는 3년 만에 이를 3500만리브르로 불려 놓습니다. 명재상 마자랭이 죽은 뒤 루이 14세의 옆에는 콜베르가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귀족이 아닌 회계사가 왕의 측근이 된 건 프랑스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지요.

콜베르의 프랑스 대개혁

"프랑스에는 도둑이 너무 많습니다."

회계사의 눈으로 프랑스의 재정을 바라보기 시작합니다. 기본적인 재정 구조부터 바로잡고자 했습니다. '매의 눈' 콜베르는 진단합니다. 프랑스에 돈이 없는 게 아니라, 이를 몰래 빼내 가는 도둑이 많은 것이라고.

큰 도둑은 가까운 거리에 있었습니다. 재무대신이었던 니콜라 푸케. 전임 재상인 마자랭과 함께 루이 14세를 보필한 인물. 왕실 금고에서 사부작사부작 돈을 빼돌린 덕에 엄청난 부를 쌓아 올릴 수 있었지요. 프롱드의 난으로 프랑스 왕실이 휘청거리고 있을 때조차 그의 가문은 부유해져만 갔습니다.

돈이 많다고 눈치가 빠른 것은 아니었습니다. 1661년 8월 푸케는 루이 14세를 자신의 성으로 초청해 화려한 연회를 열었습니다. 불꽃놀이, 발레쇼, 진귀한 음식들까지. 왕의 궁전보다 더 큰 스케일에 루이 14세는 놀랄 수밖에 없었지요. 왕은 콜베르에게 곁눈질을 보냅니다. "푸케의 뒷조사를 시작하게."

파티가 끝나고 한 달 뒤 콜베르가 왕의 총사들을 데리고 한 성에 나타납니다. 푸케의 성인 '보르비콩트'였습니다. 화려한 축제를 벌였던 그곳이었습니다. 총사들은 왕의 명임을 밝히고, 푸케의 성을 수색합니다.

그가 어떻게 프랑스의 국고를 빼돌렸는지 적혀 있는 회계장부를 발견합니다. 이 압수수색을 이끈 총사가 소설 '삼총사'에 나오는 '다르타냥'이었습니다. 다르타냥과 짝을 이룬 콜베르는 이제 무서운 것이 없었습니다. 루이 14세는 콜베르를 앞세워 회계를 무기로 정적을 제거했던 셈이지요.

국정의 원리에 회계를 도입한 콜베르

"회계는 국정의 기본이어야 합니다."

'회계사' 콜베르는 프랑스 최고지도자이자 루이 14세의 선생님이었습니다. 국가 전반의 운영에 회계가 반영되어야 한다면서 국왕에게도 회계의 기본을 교육했습니다.

세금을 많이 걷는 것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잘 지키고 운용하는 것도 중요함을 강조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콜베르는 일주일에 두 번 이상 회계 장부를 보고합니다. 루이 14세는 그가 보고하는 부기를 이해하고 좋아했지요. 콜베르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프랑스 군주는 '회계의 왕'이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돈이 어떻게 들어오고 흘러가는지를 알아야 국부를 쌓을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콜베르는 명재상이었습니다. 효율적인 세금 제도를 마련해 국가 수입의 기반을 마련한 것도 그였습니다. 관세를 신설하고, 토지세도 현실에 맞게 조정되었습니다. 세금 징수원들에게 정확한 기록을 남길 것도 강조했습니다. 허가받지 않은 임의적 면제는 당연히 폐지됩니다. 니콜라 푸케를 축출한 지 5년 만에 프랑스의 재정은 흑자를 기록합니다. 경제학의 아버지 애덤 스미스도 "콜베르가 국고 세입의 징수와 지출에 질서를 도입했다"고 상찬했을 정도입니다.

긴축에 지쳐가는 루이14세

"언제까지 자린고비로 살아야 하나."

루이 14세와 콜베르의 관계는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했습니다. 부유한 재정 상태임에도 콜베르가 언제나 루이 14세의 결정에 어깃장을 놨기 때문입니다. 베르사유 궁전의 확장에도, 신흥 강호 네덜란드와의 전쟁에도 콜베르는 회계장부를 들이밀었습니다. 자신이 만들어 놓은 부국 프랑스를 망치지 말라는 경고였습니다.

하늘이 루이 14세의 이야기를 들어준 것이었을까요. 아님 저주를 내린 것이었을까요. 1683년 8월 콜베르가 숨을 거뒀습니다. 신장에서 커다란 돌이 요관을 막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루이 14세는 그의 죽음을 표면적으로 애달파하면서도 이제 자신의 정치적 권위를 막을 자가 없다는 생각에 미소 지었습니다.

콜베르라는 개인의 죽음은 프랑스 재정의 죽음과도 같았습니다. 시스템으로 움직이지 않는 국가는 모래 위에 지어진 성이었습니다.

1700년 루이 14세의 초상화.

고삐 풀린 말이 되어버린 루이 14세

"짐은 유럽의 지배자가 되고 싶다."

콜베르라는 고삐가 사라지자 태양왕의 야심은 더욱더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프랑스를 넘어 유럽 전역에서 부르봉 왕가의 영향력을 확대하고 싶었던 것이지요. 점점 성장하는 개신교 국가들을 혼내주고 싶은 마음도 컸습니다. 루이 14세는 독실한 가톨릭이기 때문이었지요. 퐁텐블로 칙령을 통해 국내 개신교 박해를 공식화하기도 했습니다. 네덜란드·영국·합스부르크 제국은 이에 맞서 동맹을 결성합니다. 유럽의 절대적 지배권을 행사하려는 루이 14세를 가만두고 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9년 전쟁의 시작이었습니다.

프랑스의 국력은 무너지고 있었습니다. 국가 차원에서 이뤄진 개신교 박해로 프랑스를 떠난 사람들이 90만명에 달했습니다. 활발한 경제활동으로 프랑스 경제의 윤활유 역할을 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콜베르는 생전에 종교 탄압에 반대 목소리를 내왔습니다.

콜베르의 죽음 이후 프랑스가 경제보다 정치를 우선시하면서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켜켜이 쌓인 재정적 부담은 결국 프랑스를 무너뜨립니다. 1789년 7월 프랑스 대혁명이 터져 부르봉 왕조를 몰락시킵니다. '르 그랑 콜베르'가 죽은 지 100년이 조금 지난 뒤였습니다.

여전히 유효한 콜베르의 경제학 정신

오늘날 경제학의 관점에서 '콜베르주의'는 조악한 구석이 많습니다. 자국 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지나친 국가적 개입이 이뤄졌기 때문입니다. 외국 수입을 제한하면서 자국 소비자 이익을 해친 것도 단점으로 지적됩니다.

콜베르의 정신은 그럼에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튼튼한 국가 재정이 부국의 기본임을 입증해서였습니다. 그래서인지 미국 건국의 아버지 중 한 명이자 초대 재무부 장관을 지낸 알렉산더 해밀턴은 열렬히 콜베르를 존경했습니다. "프랑스가 번영을 찾을 수 있었던 건 '위대한 콜베르'의 능력과 불굴의 노력 덕분이다."

해밀턴 역시 콜베르처럼 중앙집권적인 재무시스템만이 부국의 기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제국' 미국의 기원에 콜베르의 정신이 녹아 있던 셈입니다.

2024년 8월 대한민국과 가계 채무가 합계 3000조원을 넘었다는 뉴스를 보면서, 저는 콜베르를 떠올렸습니다. 재정의 튼튼함이 부국의 기본이라고 태양왕 앞에서 설파하는 그의 모습을. 방만한 재정의 위대한 반대자를.

'경제'라는 어려운 식재료에, '역사'라는 맛있는 양념으로 요리해드립니다. 독자 여러분의 '경제 근육'을 키워드리겠습니다.

[강영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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