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고, 우리 ‘장손’ 왔나! 이토록 웃기고 아리는 가족 영화
영화가 시작해도 아무것도 안 보이는 하얀 화면이 한동안 계속된다. 알고보니 화면을 가득 채운 수증기 때문이다. 증기가 천천히 걷히면 두부 공장에서 바쁘게 일하는 사람들이 나타난다. 경북 시골에서 두부 공장을 운영하는 김씨 집안은 제사를 준비 중이다. 무더운 여름 날씨에 여자들이 땀을 흘리며 전을 부친다. 서울에 사는 무명 배우 성진(강승호)은 김씨 집안의 장손이다. 오랜만에 고향집을 찾는다.
오정민 감독의 장편영화 데뷔작 <장손>이 오는 11일 개봉한다. 여름, 가을, 겨울의 세 계절과 가족사를 엮으면서 가족의 의미를 되짚어보는 작품이다. 대구 출신인 오 감독은 할머니의 장례식에서 영화의 아이디어를 얻었다. 오 감독은 지난달 시사회에서 “스무살 때 할머니가 돌아가시면서 가족들의 갈등이 시작됐다”며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알고 보니 집집마다 그런 비밀이 있더라”고 말했다.
오 감독의 개인사처럼 <장손>의 본격적인 이야기는 할머니 말녀(손숙)가 돌연 숨을 거두며 시작된다. 말녀는 김씨 집안의 살림을 고집스럽게 운영해온 인물이다. 말녀의 사망은 집안 재산과 얽혀 가족들의 욕망과 원망이 불거지는 계기가 된다. 성진과 말녀를 포함해 등장인물이 10명에 달하는데도 각자의 서사와 개성을 빠짐없이 살리는 솜씨가 대단하다.
성진의 할아버지 승필(우상전), 아버지 태근(오만석)과 어머니 수희(안민영), 큰고모 혜숙(차미경), 작은고모 옥자(정재은)와 작은 고모부 동우(서현철), 누나 미화(김시은)와 매형 재호(강태우)가 등장한다. 승필은 ‘쪽바리’와 ‘빨갱이’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다. 태근은 법대에 진학했지만 민주화 운동을 하다 다리를 다쳐 낙향했다. 혜숙은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남편이 병원 신세를 지고 있다. 옥자는 동우의 사업 때문에 베트남에 이민을 갈 예정이다. 미화와 재호는 두부 공장을 물려받을 수도 있다고 은근히 기대한다.
<장손>은 가족의 지긋지긋한 애증 관계 사이에서 생기는 균열을 정확하게 포착한다. 가족은 핏줄로 이어진 타인의 집단이다. 가족이라는 따뜻한 낭만이 타인의 집단이라는 차가운 현실과 맞닿는다. 가족이 비통하게 울음을 터뜨리는 입관 장면은 곧바로 옥신각신하며 돈봉투를 나눠 갖는 조의금 정산 장면으로 이어진다. 성진의 발목 흉터에서부터 시작해 가족의 가슴 아린 비밀이 한 꺼풀씩 드러나는 시나리오가 ‘스릴러’와 ‘드라마’를 모두 만족시킨다. 세밀하게 계산한 ‘동선’과 ‘복선’이 감탄을 자아낸다.
적재적소에 배치한 귀여운 코미디 장면은 줄을 풀었다 감았다 반복하는 연날리기처럼 관객의 집중력을 붙잡는다. 말녀가 에어컨으로 보여주는 손자 사랑, 수희가 성진을 찾아다니다 몰래 뀌는 방귀, 재호의 바지에 뜨거운 국이 쏟아지자 말녀가 던지는 농담 등은 자연스러운 웃음을 이끌어낸다. 영화의 배경은 경북이지만 실제 촬영은 경남 합천군에서 이뤄졌다. 계절과 일상의 찰나를 담은 아름다운 장면들이 돋보인다. 승필이 함박눈을 맞으며 걸어가는 모습을 7분에 걸쳐 ‘롱테이크’(긴 시간 끊음 없이 촬영하는 기법)에 ‘익스트림 롱숏’(아주 멀리서 촬영하는 기법)으로 촬영한 마지막 장면에선 신인 감독의 배짱과 솜씨가 깊은 인상을 남긴다.
<장손>은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KBS독립영화상, 오로라미디어상, CGK촬영상 등 ‘3관왕’을 차지했다. 올해는 밴쿠버영화제와 시드니영화제에 초청받았다. 오 감독은 시사회에서 “가족에 한국 역사를 담아내 보편적인 이야기로 전달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며 “누가 보더라도 감정을 이입할 캐릭터가 있기 때문에 각자가 영화를 나름대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허진무 기자 imagin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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