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근 꿈 서린 세운상가 공중보행로, 오세훈은 왜 2년 만에 지우려 할까
‘박원순의 재생 극장’은 결국 ‘오세훈의 철거 극장’으로 마무리되는가.
한국 현대 건축을 대표하는 거장 김수근(1931~1986)의 대표작인 서울 세운상가의 불안한 미래가 입길에 올랐다. 상가 건축의 핵심 특징인 건물 양옆 공중보행로 시설을 겨냥해,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도시재생 사업 흔적을 지우려는 오세훈 서울시장의 행보가 최근 본격화하고 있어서다.
오 시장은 지난 2일 놀라운 발표를 했다. 박 전 시장이 2016~2022년 ‘다시 세운 프로젝트’란 이름 아래 1100억원 넘는 거액을 들여 2단계로 추진했던 세운상가 7개 건물군 도시재생 사업 중 마지막 성과물로 꼽히는 삼풍상가·피제이호텔 건물 곁 철골 공중보행로 280m 구간을 뜯겠다는 구상을 내놓았다.
공청회를 열어 의견을 듣겠다고 했지만, 완공된 지 2년밖에 되지 않은 새 시설을 바로 철거한다는 구상은 전례를 찾기 어렵다. 오 시장은 보행로 이용자가 예측에 크게 못 미쳤다는 지난달 감사원 보고서를 근거로 댔다. 개통 후 1년간 공중보행로 총보행량은 예측량 10만5440명의 11%(1만1731명)에 그쳤다는 내용이다. 서울시 쪽은 공중보행로 누수 등으로 지상 보행 환경이 열악해진 점 등도 짚으면서 “시설 개선 차원”이라고 했다.
철거가 그리도 절박할까. 아무리 봐도 거액 예산을 들인 도시재생 사업을 역사적 맥락에 대한 고려 없이 2년 만에 다시 돈 들여 뒤엎겠다는 의도에 불과해 보인다. 학계는 물론 시민들도 어이 없다는 반응이 나온다.
공중보행로는 상가 지상 차도와 분리해 그 위 2·3층 건물 옆에 떠있는 듯한 모양새로 붙여 사람들만 지나다니도록 만든 길이다. 1970년대까지 종로3가 세운상가부터 퇴계로 진양상가까지 이어져 있었으나, 90년대 이후 삼풍상가·피제이호텔 건립과 청계천 복원으로 끊겼다. 박 전 시장은 보행로 재연결을 도시재생 재개발 방식의 상징으로 만들었다. 상가를 설계한 김수근의 도시건축 개념과 상상력에 대한 기억에서 명분을 찾은 것이다.
1960년대 중후반 박정희 정권의 아낌을 받은 30대 건축가 김수근은 서울 종로~남산 도심에 걸친 판자촌을 걷어내고 기존 한양도성의 동서 도심축과 교차하는 남북축의 새 도시계획을 만들면서 세운상가 건립안을 내세웠다. 앞서 일제의 패전 직전이던 1945년, 조선총독부는 종묘 앞에서 남산 기슭까지 폭 50m에 길이 1㎞ 공터를 만들어 미군 폭격 때 화재가 번지지 않도록 대비했다. 김수근은 그렇게 생겨난 터에 직육면체형 대형 상가 7동을 열차 모양으로 배치했다. ‘빛나는 도시’로 명명된 스위스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1887~1965)의 20세기 초 모더니즘 도시건축론에서 영감을 얻어, 한 장소에서 삶의 모든 것을 해결하며 자연 녹지까지 포괄한 주상복합 고층건물단지를 구상했다. 르 코르뷔지에가 ‘입체도시’ 개념으로 논했던, 질주하는 차량을 신경쓰지 않고 활보하는 공중보행로 구상까지 실현시켰다.
2000년대 당시 이명박 서울시장은 청계천을 복원하면서 공중보행로의 연결다리를 끊어버렸다. 이를 계기로 상가군 전체를 헐고 양옆으로 30층 이상의 업무단지군을 짓는 고밀도 재개발 구상을 처음 내놓았다. 오 시장은 이 구상을 유전자처럼 이어받았다. 2006~2010년 재임 1기 당시 상가를 헐어 남북축 터를 녹지화하고 양옆을 20~30층 초고층단지로 탈바꿈시키는 계획을 마무리하려 했다. 그러나 종묘 앞 경관 조망에 걸림돌이 된다는 문화재위원회의 반대로 좌절됐다.
2012년 취임한 박 전 시장은 정반대 방향으로 갔다. 상가 철거 중단과 공중보행로 재건을 결정했다. 2015년 국제설계공모를 벌여 2016년 착공, 2022년 2단계까지 사업을 마무리했다. 최고급 아파트이자 첨단 상가로 시작했지만, 80년대 이후 주변 공구상·인쇄업체·공방 등과 어울려 원숙한 도시생태계를 형성한 역사를 주목한 결과였다.
이렇듯 세운상가 공중보행로에는 도시를 둘러싼 권력자들 간 길항의 역사 또한 담겨져 있다. 오 시장의 공중보행로 철거 결정은 역사적 맥락을 비튼 정치적 노림수와 다름없다. 전체 상가 건물군을 정비 명목으로 녹지화한 뒤 양옆에 초고층 빌딩단지를 조성하려 했던 이명박 전 시장 이래 숙원을 실현하려는 신호탄 성격이기 때문이다. 도시 역사의 핵심 기억을 살려 지은 시설물을 재건 2년 만에 철거한다는 발상부터 반문화적이다. 도시비평가 루이스 멈포드가 ‘문화를 담은 거대한 컨테이너’라고 비유했듯, 도시는 건축물들에서 빚어진 생활과 문화의 기억들로 존속해왔기 때문이다.
공중보행로에 대한 시민들 호응은 저조했다. 복원에 걸맞는 교류와 관심 유발 콘텐츠가 빈약했으며, 사업을 추진한 공무원의 전문성이 떨어진다는 점은 새겨봐야 할 부분이다. 그러나 도시재생 전략은 오랜 시간이 걸린다. 도시계획을 이끄는 위정자라면 시민들의 마음을 움직일 보행로 공간의 공감 콘텐츠를 어떻게 창출해낼지 도시사·도시공학의 맥락에서 검토하고 보완책을 찾는 게 상식이다. 건축사가 안창모 경기대 교수는 “오 시장은 취임 뒤에도 이어진 도시재생 후속 사업들을 무시했다. 콘텐츠 확충 등 지원책은 내놓지 않으면서 통행량 근거만 들이대는 건 설득력이 없다”고 지적했다.
2015년 ‘세운상가 활성화를 위한 공공공간 설계’ 국제현상공모에 당선돼 공중보행로를 설계한 이_스케이프(김택빈·장용순·이상구) 건축사사무소는 ‘현대적 토속’이란 이름 아래 상가 건물동 사이에 보행로를 잇고, 주변 재래식 공방거리와도 종횡무진 연결되는 리좀(덩이뿌리) 같은 양상의 인공 골목길을 지향했다. 보행로 사이에 청년 창업자와 미술가 등이 작업하는 공방과 스튜디오, 상인들이 다품종을 판매하는 플랫폼 공간 ‘셸’들을 여기저기 놓으면서, 공방이 다리에 들어찬 이탈리아 피렌체의 베키오 다리 같은 명소가 21세기 서울에 재림하기를 꿈꿨다.
하지만 세운상가 공간재생 사업에 “피 토하는 심정”이라고 했던 오 시장의 재취임 이후 이런 꿈은 실현이 난망해졌다. “서울의 현대도시화란 정치적 모더니즘을 추구한 박정희 대통령과 모더니즘 건축의 이상을 실현하려 한 김수근 건축가의 합작품”(안창모 교수)이었던 세운상가는 착잡한 흑역사를 남기며 종말을 맞을 공산이 커졌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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