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석의 그라운드] ‘고래의 꿈’...50년 소프트테니스 외길 인생 김백수 총감독 피날레
한국 소프트테니스(정구) 대표팀이 9일 경기 안성시(시장 김보라)에서 끝나는 제17회 세계선수권대회에서 8일 현재 금메달 3개, 은메달 3개, 동메달 4개를 따냈습니다. 남자 단체전과 여자단체전 2개 종목만을 남겨둔 가운데 한국은 이미 지난 2019년 중국 타이저우 세계선수권에서 기록한 금메달 2개(남자 단식, 혼합 복식)를 넘어서는 쾌거를 거뒀습니다. 특히 혼합 복식에서는 6회 연속 우승이라는 대기록을 이어갔습니다. 마치 올림픽에서 양궁 단체전 우승을 휩쓸고 있는 한국 여자대표팀을 떠올리게 하더군요. 비록 따로 시상하지 않지만, 한국은 종합 성적 우승을 확정 짓는 쾌거를 거뒀습니다.
●최강 종주국 일본 침몰시킨 예상 밖 낭보 주역
애초 한국의 이번 대회 전망은 밝지 않았습니다. 라이벌 일본의 전력이 역대 최강이었기 때문입니다. 1년 미뤄져 지난해 9월 23일부터 10월 8일 열린 중국 항저우 아시안게임에서 한국은 문혜경(NH농협은행)이 여자 단식 금메달 1개를 땄을 뿐 나머지 4개 종목 금메달은 모두 일본에게 돌아갔습니다. 한국은 지난 6월 인천에서 개최된 코리아컵에서도 전체 7개 종목 가운데 여자 복식(문혜경-임진아)과 여자단체전에서 우승했지만, 일본은 나머지 5개 금메달을 독식했습니다.
임교성 수원시청 감독은 “일본의 기세가 너무 세다. 과거 유영동, 김희수, 김경한 등이 대표팀이었을 때 최강으로 불리던 한국팀을 떠올리게 한다”라고 말하더군요. 한국 여자대표팀 역시 과거 김경련, 김애경 등 월드 클래스 선수들이 있을 때와는 전력이 떨어진 데다 에이스 문혜경도 올 연말 은퇴를 앞두고 전성기를 지났다는 분석이 나왔습니다. 일본이 이번 대회 7개 모든 종목 우승을 노린다는 얘기도 들리더군요.
그랬기에 이번에 한국이 거둔 성적표는 놀라운 반전이었다는 평가를 듣고 있습니다. 이런 선전에 누구보다 가슴을 쓸어내린 주인공은 한국 대표팀 김백수 총감독(60·순천시청)입니다. 후배 곽필근 감독(안성시청), 한재원 코치(NH농협은행) 등 코치진과 남녀 선수들을 이끄는 김 총감독은 “안방에서 자칫 망신당하는 게 아닌지 가슴 졸였다. 고생 끝에 코트에서 투혼을 발휘해 준 한국 선수단 모두가 승리의 일등 공신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또 “정인선 대한소프트테니스협회 회장님(연세아이미스템의원 대표원장)이 관심을 많이 보여주셨다. 곽필근 여자팀 감독(안성시청)이 워낙 꼼꼼하게 선수들을 가르치고 상대 팀 분석을 잘해줬다. 뒤늦게 합류한 한재원 코치(NH농협은행)도 최선을 다해줬다”라고 공을 돌렸습니다.
한국은 이민선(NH농협은행)이 여자 단식 금메달을 따내며 첫 단추를 제대로 끼웠습니다. 혼합 복식에서는 문혜경과 김범준(문경시청)이 금메달을 합작한 데 이어 여자 복식에서는 한국 대표팀 내에서 세 번째 카드로 불린 이민선과 이정운(NH농협은행)이 예상 밖의 금메달 돌풍을 일으켜 사흘 연속 금메달 낭보를 전했습니다.
●선수촌 떠나 3개월 넘게 모텔 생활...그래도 한 마음
기대 이상의 금빛 물결에는 김백수 총감독의 헌신과 용병술도 빛을 발했습니다. 한국 소프트테니스 대표팀은 올해 3월 대표팀을 구성한 뒤 4월 진천 선수촌에 입촌해 합숙 훈련을 하다가 6월 선수촌을 떠나야 했습니다. 올림픽 종목이 아니라는 이유로 7월 파리올림픽 출전 선수단에 떠밀린 탓입니다. 파리올림픽 한국 선수단은 구기종목 본선 진출 실패 등으로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이후 역대 가장 적은 선수단 규모였습니다. 선수촌에서 훈련할 여건도 있었지만, 현실은 냉혹했습니다.
소프트테니스 대표팀은 진천 선수촌을 떠나 3개월 가까이 순천, 인천, 안성 등의 여관을 전전해야 했습니다. 김 총감독은 선수들의 사기가 떨어질지 우려해 무엇보다 선수단 분위기에 신경을 쓰며 훈련 틈틈이 사비를 털어가며 회식 자리를 마련하고 어린 선수들과 소통에 주력했습니다. 이번 대회 2관왕에 오르며 새로운 주역으로 떠오른 이민선은 “김백수 총감독님은 항상 우리 (남녀 대표팀 1, 2진을 통틀어) 24명은 끝까지 다 같이 간다는 좋은 말씀을 해주시며 더 끈끈해질 수 있게 노력해 주셨다. 늘 컨디션이나 몸 상태 체크를 되게 잘해주셔서 좋은 결과를 낼 수 있었다”라고 고마움을 표시했습니다.
<사진> 안성 세계소프트테니스선수권대회 여자 복식에서 예상을 깨고 일본을 누르고 정상에 오른 NH농협은행 이민선과 이정운. 사진 김종석
●가족 같은 분위기...절묘한 용병술
김 총감독은 대표팀에 체력 트레이너 대신 국가대표 출신인 한재원 NH농협은행 코치를 새롭게 코칭스태프로 영입해 전력 강화를 실현했습니다. NH농협은행에서 유영동 감독과 호흡을 맞춰 지도력을 발휘하고 있는 한 코치는 실전 경험을 살려 선수들의 세세한 플레이 스타일과 정신력을 끌어올렸습니다.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한 코치는 같은 NH농협은행 선수들을 더 챙길 법도 했지만, 지도에만 전념할 뿐 선수들의 소속은 아무 의미가 없었습니다.
김 총감독은 노유라 의무 트레이너를 마치 딸처럼 정겹게 대하며 선수들의 컨디션의 최상으로 유지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단식 전문 문혜경의 복식 카드 활용도 절묘했습니다. 애초 단식 출전이 유력했던 문혜경을 혼합 복식으로 돌려 탄탄한 스트로크 능력을 앞세워 전위 김범준과 찰떡 호흡을 유도했습니다. 그 결과 단식에서 이민선이 우승한 뒤 체력을 아낀 문혜경은 혼합 복식에서 전력을 다할 수 있었죠. 2014년 인천아시안게임 3관왕 김범준은 5년 만에 다시 태극마크를 단 뒤 유종의 미를 향해 모든 힘을 다했습니다.
<사진> 안성 세계소프트테니스선수권대회 여자복식 금메달을 딴 이민선, 이정운과 동메달리스트 문혜경, 임진아가 NH농협은행 장한섭 스포츠 단장, 유영동 감독, 한재원 코치와 화이팅을 외치고 있다. 사진 김종석
●여자 금메달리스트 전원 NH농협은행 소속...새로운 스타 탄생
여자복식에서 우승한 이민선과 이정운은 대표팀 내에서 3진 정도에 해당했습니다. 이정운은 2진으로 분류돼 여자단체전에는 출전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도 한국팀 1진과 2진도 못 해낸 금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 이민선의 말대로 김 총감독이 누구에게나 기회가 있다며 선의의 경쟁을 유도하면서 경기력을 끌어올렸기 때문입니다. 이정운은 처음 출전한 세계선수권에서 덜컥 여자 복식 금메달을 목에 걸며 단번에 경기력 향상 연금까지 받게 됐습니다.
이민선은 할머니 밑에서 자랐고 이정운은 아버지가 홀로 키웠습니다. 이정운 아버지는 그간의 고생이 눈 녹듯 사라진 것처럼 눈물을 쏟으며 NH농협은행 유영동 감독에게 "잘 가르쳐줘 감사하다"며 큰절까지 하더군요. 두 선수의 사연을 잘 아는 소프트테니스 관계자들의 가슴도 촉촉이 적시더군요.
<사진> 안성 세계소프트테니스선수권대회 여자 단식과 여자복식 우승으로 2관왕에 오른 이민선. 이제 그는 차세대 선두 주자로 확실하게 자리매김했다. 대한소프트테니스협회 제공
특히 이민선과 이정운은 앞으로 한국 소프트테니스를 이끌 유망주로 주목받게 됐습니다. 세계선수권 우승을 통해 레벨업 될 것이라는 기대를 받고 있는 거죠. 특히 뛰어난 실력에 출중한 외모까지 지녀 스타성을 겸비했다는 평가입니다. 한국 소프트테니스 대표팀 공식 후원사인 요넥스코리아 관계자는 “두 선수를 통해 소프트테니스의 매력이 널리 알려지기를 바란다. 회사 측에서도 적극적인 홍보 활동을 펼칠 계획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순천대와 순천시정 선수 시절 김백수 총감독 밑에서 10년 가까이 인연을 맺은 유영동 NH농협은행 감독은 “이민선 선수가 정말 냉정하게 경기 운영을 잘한 것 같다. 이정운 선수는 선발전 과정부터 마음고생 많이 했는데 잘 참고 열심히 해준 보상을 받았다”라고 흐뭇해하더군요. 유 감독은 또 “이민선 이정운 선수가 농협 팀에서 호흡이 잘 맞았던 파트너인데 이렇게 큰 대회에서 우승하니 너무 자랑스럽다”라고 말했습니다.
유영동 감독에게도 김백수 총감독은 고마움의 대상이었습니다. “김 감독님 밑에서 뛰면서 정말 인간적으로 존경한 분이에요. 본인보단 선수들을 위해 희생하시는 정말 인자하신 지도자입니다.”
이번에 금메달을 목에 건 한국 여자 대표 선수들은 모두 NH농협은행 소속입니다. 소프트테니스 국가대표 선수와 감독 출신인 장한섭 NH농협은행 스포츠단장은 “오랜 시간 고생한 선수들이 자랑스럽다. 이석용 은행장님을 비롯한 은행 가족들이 아낌없는 지원을 해주셨다. 올 연말 정년퇴임을 앞두고 큰 선물을 받은 것 같다”라고 감격스러워했습니다. 장 단장은 또 김백수 총감독에 대해 “마지막 감독 생활인데 국가대표 선수들이 너무 잘해줘 고맙다고 전해주고 싶다. 긍정적인 성격으로 큰 욕심을 내지 않다 보니 이렇게 큰 복이 찾아온 것 같다”라고 말했습니다.
<사진> 안성 세계소프트테니스선수권대회 남녀 복식에서 메달을 딴 한국 선수들이 정인선 대한 소프트테니스협회 회장, 김철웅 요넥스코리아 대표, 김백수 총감독, 곽필근 여자팀 코치, 한재원 여자팀 코치 등과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대한소프트테니스협회 제공
●의리의 사나이...22년 코치 생활
덕장의 풍모를 지닌 김백수 총감독은 전남 곡성중 소프트테니스부 창단 멤버 출신으로 광주 동신고와 전주대를 졸업한 뒤 17년 가까이 순천시청에서 김태성 감독을 보좌하며 묵묵히 코치로 일했습니다. 1996년 순천시청 코치를 시작으로 50대에도 여전히 코치 생활을 하면서도 자신의 자리에 만족하며 선수들과 동고동락했습니다. 50대 중반의 나이인 2018년에 뒤늦게 순천시청 감독이 된 뒤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에 처음 대표팀 사령탑을 맡았습니다. 아쉬움이 남았을 텐데도 그는 “김태성 감독님이 있었기에 내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라고 겸손하게 말하더군요.
그는 소프트테니스계에서 ‘의리의 사나이’로 불릴 만큼 주변을 잘 챙기는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특유의 유머 감각과 탁월한 입담으로 그 주위에는 사람이 끊이지 않습니다. 이번 세계선수권대회에는 곡성중 시절 운동 동기인 김장수 감독이 이민을 간 아프리카 보츠와나 여자 선수 4명을 초청하기도 했습니다.
낙천적인 성격을 지닌 김백수 총감독에게도 국가대표 사령탑의 무게는 위중하기만 했나 봅니다. 세계선수권대회를 앞두고 혈압이 150을 넘기기도 하고 불면의 밤을 보냈다고 하네요. 안성에서 만난 김백수 총감독은 불쑥 꿈 얘기를 꺼냈습니다. “혼합 복식 결승을 앞두고 초조한 마음에 잠이 너무 안 왔습니다. 새벽 3, 4시까지 눈을 멀뚱멀뚱 뜨고 있다가 잠시 눈을 붙였는데 제가 낚시를 하고 있더라고요. 근데 옆 사람이 잡았다고 외쳐서 보니 제 낚싯대에 암컷 고래가 걸려 있는 거예요. 그래서 다시 풀어 줬어요. 그 꿈 덕분인가. 허허.“
김백수 총감독은 올 연말 정년퇴임을 앞두고 있습니다. 이번 대회에서 선수들을 격려하느라 목이 다 쉰 김 총감독은 경기를 마친 선수들과 승패를 떠나 따뜻하게 포옹하며 때론 눈물을 쏟기도 했습니다. 고래는 인내와 지혜를 상징한다고 하네요. 화려하진 않아도 반세기 가까이 소프트테니스 외길 인생을 걸어온 김백수 총감독. 이제 보니 고래를 닮은 듯 합니다. <안성에서>
김종석 채널에이 부국장(전 동아일보 스포츠부장)
글= 김종석 기자(tennis@tenni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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