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 마라" 분노가 일상 된 지금 배워야 할 어느 작가의 삶 [전쟁과 문학]

이정현 평론가 2024. 9. 8. 13:09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더스쿠프 전쟁과 문학 34편
로맹 가리 또는 에밀 아자르
전쟁터에서 글쓰기 멈추지 않고
「하늘의 뿌리」로 공쿠르상 수상
전후 드골주의자 낙인 찍혔지만
에밀 아자르 필명으로 글 발표
‘자기 앞의 생’ 온몸으로 견뎌

유대인으로 태어난 로맹 가리는 러시아에서 남부 프랑스로 옮겨와 난민으로 살았다. 그는 2차 세계 대전에서 프랑스 공군으로 싸웠고 전쟁 후에는 외교관으로 일했다. 전쟁 중에도 소설을 썼지만 전쟁이 끝난 후에는 드골주의자라는 손가락질을 받기도 했다. 그는 숱한 차별 속에서도 쉽게 분노하거나 절망하지 않았고, 뜻을 이뤘다. 분노가 일상이 된 지금 우리가 배워야 할 삶일지 모른다.

로맹 가리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프랑스 공군으로 참전해 소설을 썼고 전쟁 후에는 에밀 아자르라는 이름으로 소설을 썼다.[사진=위키피디아 제공]

프랑스 작가 로맹 가리(본명 로맹 카체브)의 삶은 전쟁과 함께 시작됐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해에 러시아에서 태어난 로맹 가리는 홀어머니(니나)와 동유럽을 떠돌다가 1927년 프랑스 남부 해안 도시 니스에 정착한다. 난민 신분으로 프랑스에 정착한 어머니에게 로맹 가리는 그야말로 '유일한 꿈'이었다.

비록 현실은 가난과 모멸의 연속이었지만 니나는 그것을 홀로 감수하면서 아들을 키웠다. 1920년대를 강타한 경제 공황의 고통 속에서도 니나는 아들을 위해 끈질기게 살아남았다. 어머니의 맹목적 헌신에도 어린 아들은 이미 자신의 처지를 잘 알고 있었다.

프랑스 사회는 러시아계 난민에게 관대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그들은 유대인이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아들에게 다양한 꿈을 불어넣었다. 위대한 연극배우, 인간의 영혼을 울리는 작가, 전쟁에서 살아남은 영웅, 세계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는 외교관, 음악가, 화가….

어머니는 로맹 가리에게 끊임없이 꿈을 불어넣으면서 "정의는 승리한다" "모든 것은 이뤄진다" "네가 바라는 것은 무엇이든 다 얻을 수 있다"고 속삭였다. 어머니의 헌신으로 세상을 향한 증오와 자기 자신에게 느끼는 혐오감을 떨친 로맹 가리는 학업에 열중했고 어학 과목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로맹 가리는 파리의 법과대학에 진학했지만 광폭한 시대는 그가 법관이 되는 길을 가로막았다. 1938년 독일은 오스트리아를 병합하고 뮌헨협정으로 체코의 수데테란트를 차지한 이후 세력을 계속 넓혀갔다.

영국과 프랑스는 뮌헨협정이 실수였음을 깨닫고 전쟁 준비에 돌입했다. 로맹 가리는 사관후보생으로 공군에 입대해 고등군사교육을 290명 중 4등으로 수료했으나 장교로 임관하지 못했다. 드레퓌스 사건(1894년)으로 표출된 것처럼 프랑스 군대의 유대인 혐오는 뿌리 깊었다.

1940년 전쟁이 시작되자 그는 공군 조종사 훈련소에 다시 소집됐다. 불운하게도 훈련을 마치기 직전 프랑스는 독일에 점령됐다. 공군 조종사 훈련생들은 협력과 저항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다. 로맹 가리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특무상사 들라보와 함께 전투기를 몰고 북아프리카의 프랑스 식민지로 탈출했다.

하지만 북아프리카 주둔 프랑스군 사령관 노게즈 장군은 독일과의 휴전에 합의하고 말았다. 조종사들이 탈출하는 사태를 막으려고 모든 항공기를 고장 내라는 어이없는 명령이 떨어졌다. 분개한 로맹 가리는 육상으로 탈출해 영국 군함에 탑승했다.

1940년 8월 8일 로맹 가리는 영국에서 자유프랑스공군(FAFL)에 편입됐다. 곧 독일군의 폭격이 시작되자 영국 공군은 국운을 건 항공전에 휘말렸다. 자유프랑스공군은 아프리카 차드로 이동해 훈련받았다. 그곳에서 장티푸스로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도 로맹 가리는 악착같이 살아남았고 마침내 그가 소속된 '로렌 비행대'는 1943년 10월부터 실전에 투입됐다.

로맹 가리는 프랑스, 네덜란드, 벨기에의 목표물을 폭격하는 작전에 60회 이상 참가했다. 로렌 비행대는 주로 발전소, 조차장, V1 로켓 발사대를 조준 폭격하는 위험한 임무를 떠맡았다. 1943년 11월 25일 탑승한 폭격기가 대공포에 피격돼 로맹 가리는 복부관통상을 입었고 조종사는 파편에 눈을 다쳤다. 그런 상황에서 로맹 가리는 조종사를 도와 무사히 귀환했다. 그는 이 공로를 인정받아 중위로 진급했고 1944년 1월에는 드골 장군이 서명한 '해방무공훈장'을 받았다.

전쟁터에서도 그는 글쓰기를 멈추지 않았다. 전쟁 말기에 로맹 가리는 군병원에서 집필한 소설 「유럽의 교육(1945년)」을 출간했다. 「유럽의 교육」은 폴란드를 배경으로 빨치산들의 항독 투쟁에 합류한 열네살 소년 야네크가 그들과 함께하면서 용기와 사랑에 눈뜨는 과정을 그린 소설이었다. 「유럽의 교육」은 영국에서 큰 성공을 거뒀고, 이듬해 프랑스에서 비평가상을 수상했다. 종전 후 귀국한 로맹 가리는 '해방무공훈장' 수상자 특혜로 프랑스 외무부에 들어갈 수 있었다.

외교관이 된 그는 불가리아, 볼리비아, 미국 등에서 근무했다. 외교 활동을 하면서 계속 소설을 발표한 그는 1956년 장편소설 「하늘의 뿌리」로 공쿠르상을 수상했다. 그가 어머니와 약속한 꿈들은 거짓말처럼 모두 실현됐다. 그는 전쟁에서 살아남은 영웅이자 외교관이 됐고 인간의 영혼을 울리는 작가가 됐다.

그러나 어머니와 약속한 꿈들이 실현된 이후 로맹 가리는 혹독한 시련을 겪었다. 비평가들은 로맹 가리의 후속작들을 깎아내렸다. 전후 세대가 주요 독자층이 되면서 로맹 가리의 소설들은 평단에서 외면받았다. 드골을 싫어하는 젊은 세대들은 로맹 가리를 '철 지난 드골주의자'로 낙인찍었다.

로스앤젤레스 영사 시절에 만나 결혼한 영화배우 진 세버그(1938~1979년)와의 결혼생활도 흔들렸다. 장뤼크 고다르 감독의 영화 '네 멋대로 해라'의 주연으로 세계적인 배우가 된 진 세버그는 영화배우 클린트 이스트우드(1930년~)와 염문을 뿌렸고 이 사건을 계기로 로맹 가리는 그녀와 결별했다. 실연과 평단의 외면으로 위기에 몰렸지만 로맹 가리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사진=더스쿠프 포토]

그는 은둔한 채 '에밀 아자르'라는 필명으로 장편소설 「그로칼랭」 「가면의 생」 「자기 앞의 생」 「솔로몬왕의 고뇌」를 차례로 발표했다. 1975년 「자기 앞의 생」이 공쿠르상 수상작으로 결정됐다. 그러나 '에밀 아자르'라는 작가는 나타나지 않았다.

1979년에는 진 세버그가 의문사했다. 흑인 인권운동을 비롯한 사회 변혁 운동에 앞장섰던 그녀는 FBI의 대국민 감시 프로그램인 '코인텔프로'의 표적이 돼 갖은 고초를 겪었다. 로맹 가리는 그녀의 죽음과 FBI의 연루설을 공개적으로 제기했으나 명확한 증거는 드러나지 않았다. 1980년 로맹 가리는 파리에서 스스로 생을 접었다. 사람들은 진 세버그의 죽음과 로맹 가리의 죽음을 연결하면서 음모론을 제기했다. 그러나 로맹 가리는 유서에서 그녀와 자신의 죽음은 상관없다고 밝혔다.

사후에 발견된 회고록에서 그는 자신이 바로 '에밀 아자르'라는 사실을 고백했다. 같은 작가에게 상을 주지 않는 공쿠르상의 원칙은 그렇게 깨졌다. 그는 자신을 차별한 세상을 향해 쉽게 분노하거나 절망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 앞의 생'을 온몸으로 견뎌냈다. 유서의 마지막에 적은 문장은 그의 치열했던 삶을 대변한다. "나는 마침내 나를 완전히 표현했다."

이정현 평론가 | 더스쿠프
21cbach@naver.com

Copyright © 더스쿠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