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인이 핫바지로 보이나"... 난데없는 '계엄' 공세에 軍 부글부글[문지방]
2017년 기무사 작성 '계엄 준비 문건' 논란으로 트라우마
현역 장교 "국회, 열악한 처우 외면한 채 계엄령 운운… 회의감 든다"
편집자주
광화'문'과 삼각'지'의 중구난'방' 뒷이야기. 딱딱한 외교안보 이슈의 문턱을 낮춰 풀어드립니다.
"군은 오로지 국민을 위해 존재하며, 정권 비호를 위해 계엄령을 선포하는 것은 대한민국 국격이 허용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논란을 야기하는 것 자체가 군인의 수준을 무시하는 처사입니다."
경기 소재 모부대 A대령, 유용원 의원실 제공
최근 정치권을 뜨겁게 달궜던 '계엄 준비' 논란에 대해 "군인을 핫바지로 봐도 유분수"라고 울분을 토하는 한 수도권 부대 소령의 얼굴은 붉으락푸르락했습니다. 이 논란의 전제에는 '잘못된 명령을, 사리분별 없이 그대로 수행하는 생각 없는 군인'이라는 인식이 깔려 있다는 분노 때문일 겁니다.
군인들의 화를 돋운 난데없는 '계엄 준비' 논란은, 6일 취임한 김용현 국방부 장관이 후보자로 지명된 지난달 12일 이후 본격화됐습니다. 야권은 윤석열 대통령의 충암고 1년 선배인 김 장관이, 윤 정부 출범 이후부터 군 인사권의 막후 실세로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계엄 준비'를 위한 인사를 해왔다는 의혹을 제기했죠. 군령권과 정보 계통을 장악하고, 실제 병력을 움직일 수 있는 자리에도 '김용현의 사람'을 앉혔다는 겁니다.
가장 먼저 거론되는 인물은 '충암파'로 꼽히는 여인형 국군방첩사령관(중장)입니다. 방첩사는 박근혜 정부 탄핵 정국에서 계엄령 검토 문건을 작성했다는 이유로 국군기무사령부(기무사)가 해체된 뒤 생긴 조직입니다. 방첩사는 계엄이 선포되면 주요 사건 수사를 지휘하는 합동수사본부가 꾸려지는 곳입니다. '계엄 준비' 의혹의 핵심인 셈이죠.
충암파가 정보조직을 장악했다는 점도 야권이 계엄과 연결시키는 부분입니다. 군 정보조직의 양대 축은 방첩사와 국군정보사령부입니다. 여 중장이 방첩사를 맡았다면, 대북 정보를 관장하는 정보사의 핵심 조직인 777사령부 역시 '충암파'인 박종선 사령관(소장)이 올해 4월 지휘봉을 잡았습니다. 정보는 결정을 내리기 위한 근거입니다. 이런 정보들이 일제히 한 방향을 가리킨다면, 그리고 만약 그것이 누군가의 입맛에 맞게 조작된 것이라면 '의도된 결정'이 뒤따를 수밖에 없겠죠.
여기에 김 장관이 현역시절 수도방위사령부에서 근무했던 '근무연'은 자연스럽게 병력 동원 능력까지 갖췄다는 의혹으로 이어집니다. 야권은 이진우 수방사령관(중장)을 '용현파'로 분류합니다.
여기까지가 야권이 제기하는 '계엄 준비' 의혹의 수상한 정황 근거들입니다. 하지만 구체적인 물증은 제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안규백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지난 5일 YTN 라디오에 출연해 "직접 증거를 들은 바는 없다"며 "여러 가지 정황 증거를 놓고 봤을 때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있다는 주장이 나온 것 아니겠느냐"고 말했습니다.
김민석 민주당 의원은 지난 2일 청문회에서 철 지난 2017년 계엄 준비 문건을 제시하며, 계엄법상 체포가 가능한 현행범으로 국회의원을 구금해 과반수 이하로 줄이면 자신들의 주장이 설득력이 있다는 취지의 발언을 하기도 했습니다.
여기서 잠깐 '2017년 계엄 준비 문건'에 어떤 내용이 담겼는지 확인해 보겠습니다. 군사 2급 비밀로 '대비계획 세부자료'라는 제목이 달린 이 문건에는 △단계별 조치 사항 △국회에 의한 계엄 해제 시도 시 조치사항 △계엄 시행 이후 정부부처 조정·통제 방안 △계엄법 위반자 사법처리 △보도매체 및 사회관계망서비스(SNS) 통제 방안 등이 두루 담겼습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판결이 기각됐을 때 ①청와대 등에서 치안 위협 상황이 발생하면 '위수령'을 발령, 군을 동원해 치안활동을 강화하고 ②서울·경기 지역의 폭력 시위로 치안이 마비될 경우 '경비계엄'을 통해 군에 의한 치안 체제를 갖추며 ③전국적인 폭력 시위로 확산해 정부 기능이 마비될 경우 '비상계엄'을 발령해 국민의 기본권까지 제한하겠다는 대응 계획입니다.
이 문건은 결국 기무사 해체로 이어지는 군의 흑역사로 남게 됐고, 1979년 박정희 전 대통령 서거로 발동된 '비상계엄' 이후 45년 동안 이뤄지지 않았던 계엄령에 대한 불안감을 다시 싹틔운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참고로 우리나라에선 1948년 여순사건(여수·순천 지역 국방경비대 소속 군인들의 반란과 여기에 호응한 좌익 계열 시민들의 봉기가 유혈 진압된 사건) 때 선포된 첫 계엄령 이후 1979년까지 총 16번(경비계엄 4회, 비상계엄 12회)의 계엄령이 발동된 바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내용에도 불구하고, 군 내부와 전문가들의 분석은 '해당 문건이 계엄 실행을 위한 것으로 보기 힘들다'는 쪽으로 모아집니다. 실행 계획이라기엔 내용이 조악하고 구체성이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엄효식 국방안보포럼 사무총장은 "당시에 정말 계엄의 실행을 전제로 문건을 만들었다고 보기엔 신뢰도가 낮다"며 "더구나 정치권에서 이 문서를 현 상황의 계엄 준비와 연결시키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잘라 말했습니다. 계엄은 그 당시 정치·안보 상황을 고려하기 때문에 2017년과 지금은 여건이 너무 다르다는 것입니다.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4090516170001778)
또 계엄 실행과 같은 비밀 문서는 반드시 유효기간을 명시하도록 돼 있고, 만약 유효기간 도래 시 좀 더 유지가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방첩사가 기한을 연장하는 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이 문건은 애초 효력이 발생하지 않았기 때문에 유효기간 자체가 설정되지 않았고, 만약 설정됐다 하더라도 현실적으로 그 기한을 연장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즉 2017년 계엄 준비 문건은 현재의 '계엄 준비' 의혹에 실질적인 영향을 미칠 순 없다는 겁니다.
기사 서두에 언급했던 것처럼, 정치권의 뜨거운 논란에 비해 이 논란을 바라보는 군의 시각은 싸늘합니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는 식으로, 자신들은 솥뚜껑처럼 가만히 있는데 정치권에서 호들갑을 떨면서 군의 사기만 떨어뜨린다는 겁니다. 강원 소재 부대에서 근무하는 한 대위는 "사석에서 '전역하고 싶다'는 동료들이 많아졌다"며 "국회는 우리가 겪고 있는 고충은 외면한 채 계엄령이니 충암파니 하는 얘기들만 늘어놓고 있다"고 군생활에 대한 회의감을 털어놨습니다.
김 장관은 지난 2일 청문회에서 "지금의 대한민국 상황에서 과연 계엄을 한다면 어떤 국민이 용납하겠나"라며 "시대적으로 맞지 않으니 우려 안 해도 된다"고 일축했고, 신원식 안보실장도 5일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이와 관련해 "군을 모독하는 행위"라고 발끈했습니다. 신 실장은 "우리 장병들의 마음을 전하면 굉장히 황당하고, 트라우마·마음의 상처들이 많다"고도 전했습니다. 2017년 계엄 문건 논란이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지만 단 한 명도 '내란음모죄'로 기소하지 못했다는 점도 상기시켰습니다.
유용원 국민의힘 의원이 5일 열린 국회 국방위 전체회의에서 공개한 현역 장교들의 심경을 기사 중간중간 소개했는데요, 여기엔 자신이 몸담고 있는 조직이 매도당했을 때의 억울함이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강원 소재 부대에 근무 중인 한 소령은 "군인은 상관의 명령에 절대 복종하지만, 그렇다고 옳고 그름마저 판단하지 못하는 무지한 사람들이 아니다"라며 "오직 안보와 국가만 생각하고 임무에 전념하도록 해달라"고 토로했습니다.
물론 정당한 비판과 우려는 자정작용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필요하겠지만, 정치적 필요에 의해 확실한 증거도 없이 특정 조직을 싸잡아 뒤흔드는 건 오히려 악영향을 미칠 뿐입니다. 더욱이 지금처럼 북한과 대치하는 날 선 안보 환경 속에서 국민의 안전을 위해 애쓰고 있는 일선 부대의 장병들에겐 말이죠. 정치권이 한번쯤은 그들의 입장에 서서 사려 깊게 생각하는 모습을 기대하는 게 무리일까요.
김경준 기자 ultrakj75@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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