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간호사들, 간호법 통과에 시큰둥한 이유

이재호 기자 2024. 9. 8. 0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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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공의 공백 메우느라 ‘진료지원 간호사’ 법제화에 초점… 업무 기준·지역사회 활동·1명당 환자 수 등 죄다 빠져
대한간호협회 소속 전현직 간호사들이 2024년 8월28일 오후 국회 본회의에서 간호법이 통과되자 기뻐하며 본회의장을 나서고 있다. 신소영 한겨레 기자 viator@hani.co.kr

“간호법이 통과됐지만, 바뀐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간호사들은 여전히 의사들의 업무를 떠맡아 하면서도 혹시나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습니다.”

서울 시내 한 대학병원에서 근무하는 10년차 진료지원(PA·Physician Assistant) 간호사 ㄱ씨의 목소리는 분주했다. ㄱ씨는 2024년 9월4일 한겨레21과 한 전화 인터뷰에서 “간호법에서 진료지원 간호사가 일부 의사의 업무를 수행할 수 있다고 명시하긴 했지만, 어떤 업무를 어떻게 나누는지 세부적으로 정해진 게 없어 현장에서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 상황”이라며 “이미 오랫동안 간호사들이 의사 업무를 일부 수행해왔는데 병원이나 진료 과마다 업무 분담이 천차만별이어서 이른 시일 내 정리하기는 힘들 것으로 예상돼 크게 기대하지도 않는다”고 털어놨다.

의사들이 간호법 통과시킨 ‘역설’

간호법이 2024년 8월28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지만 현장 간호사들의 반응은 시큰둥하다. ‘무엇이 어떻게 개선될지 알기 어렵고, 기대가 크게 되지 않는다’는 목소리가 많다. 국회 본회의에서 간호법이 통과되자 눈물을 흘리며 감격스러워 하던 대한간호협회(간협) 구성원들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다. 이유는 현장 간호 노동자들의 업무환경이나 처우 개선에 어떤 영향을 줄지 간호법만 보면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 괴리를 이해하려면 간호법이 제정된 과정과 간호법 법안 내용, 두 가지를 들여다봐야 한다.

“우리 정 부는 국민의 건강 보호에 최우선의 가치를 두고 있습니다 . 의료에서 간호만을 분리할 경우 국민의 권리가 제한될 우려가 있습니다 . ” 윤석열 대통령이 재의요구권 (거부권 )을 행사해 간호법 입법을 막은 것은 불과 1년3개월 전 (2023년 5월 )이었다 .

당시 윤 대통령은 “간호법안이 전문 의료인(의사) 사이 신뢰와 협업을 저해해 국민의 건강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고, 갈등이 확산될 우려가 있다. 이 경우 가장 중요한 국민 건강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라며 제21대 국회가 통과시킨 법안을 거부했다. “의료기관 외의 간호 업무가 확대되면 국민이 간호서비스를 충분히 받기 어려워지고, 의료기관 외의 사고에 대해선 보상 청구와 책임 규명이 어렵게 될 것”이라고도 우려했다.

2024년 들어 윤석열 정부와 여당의 태도가 바뀌었다. 4·10 총선거 이후 구성된 제22대 국회에서 여당은 야당에 적극적으로 간호법 통과에 협조해달라고 당부했고, 재석 의원 290명 중 283명의 압도적인 찬성으로 간호법 제정안이 의결됐다. 계기는 2024년 2월부터 6개월 넘게 진행 중인 전공의 사직과 의료대란이다. 2023년 제21대 국회 간호법 입법 과정에선 대한간호협회와 대한의사협회가 갈등하는 구도였다면, 올해는 ‘의대 증원’이라는 정책 목표를 밀어붙이는 윤석열 정부와 이에 반대하는 대한의사협회 등 의사단체가 갈등하고 있다.

2023년 윤 정부는 의료인 사이에 갈등이 커질 것을 우려하며 간호법을 반대하는 입장이었으나, 2024년의 윤 정부는 스스로 의사단체와 갈등하면서 국민 건강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원인 그 자체가 됐다. 2023년 거부권을 행사한 간호법안이 크게 바뀌지 않았음에도 윤 정부 입장에선 현재의 의료대란을 수습할 대책으로 간호법을 수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 이 때문에 의료계에서는 ‘역설적이게도 의사들이 간호법을 통과시켰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2022년 2월26일 오후 서울 중구 국립의료중앙원 중앙감염병원 음압격리병동 중환자실에서 현장 간호사들이 환자를 돌보고 있다. 백소아 한겨레 기자 thanks@hani.co.kr

업무 기준·내용 등은 복지부령에 위임

현정희 공공운수노조 의료연대본부 정책위원은 한겨레21에 “말이 좋아 간호법이지만, 사실 전공의 공백 상황에서 의사 업무를 일부 대신하고 있는 진료지원 인력 합법화가 목적인 ‘PA간호법’으로 봐야 한다”며 “의사 업무를 위임하거나 일정 부분 진료지원 간호사에게 주는 것이 법안의 핵심인데 업무 범위 설정은 또 보건복지부 시행령으로 정하도록 해 현재로선 아무런 규정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지적했다.

현 위원이 지적하듯 의사 업무를 간호사가 일부 위임하거나, 지도하에 대신할 수 있게 하는 ‘진료지원’ 항목이 이번 간호법의 핵심이다. 내용은 간호법 3장(제12~14조)에 담겼다. 간호법 제12조 2항에서 “환자의 진료 및 치료행위에 관한 의사의 전문적 판단이 있은 후에 의사의 지도와 위임에 근거해 진료지원업무를 수행할 수 있다”고 명시했고, 제14조 2항에선 “진료지원 업무의 구체적인 기준과 내용, 교육과정 운영기관의 지정·평가, 의료기관의 기준 및 절차·요건 등은 보건복지부령으로 정한다”고 밝혔다.

특별히 새로울 것이 없다는 평가도 있다. 정부가 이미 2024년 3월부터 ‘시범사업’ 형태로 진료지원 간호사가 의사 업무를 일부 수행하도록 해서다. 당시 보건당국은 진료지원 간호사가 스스로 할 수 있는 의료행위와 의사의 최종 승인을 받아 할 수 있는 의료행위 88가지를 정리했다. 시범사업에서 허락된 항목 위주로 복지부령이 정해질 것이란 전망이 나오는 이유다.

현장 반응은 엇갈린다. 상대적으로 간호기술에 전문성이 있는 전문간호사들은 진료지원 업무에 자신감을 보이는 반면, 경험이 많지 않은 저숙련 간호사들은 전공의와 의사들의 업무가 지나치게 많이 자신들에게 넘어오지 않을지 우려하기도 했다.

특히 일부 정치인과 언론이 혼용하지만, 전문간호사와 PA간호사는 다르다. ‘전문간호사’는 의료법에 따라 간호실무 3년 이상 경력을 가진 간호사가 대학원에서 전문간호사(석사) 과정을 2년 이상 이수한 뒤 국가자격시험에 합격해야 취득할 수 있다. 현재 의료 현장에서 진료지원 업무를 하는 간호사들은 전문간호사도 있지만, 전문간호사가 아닌 간호사도 있다.

2024년 3월 정부가 진료지원 간호사 시범사업을 하면서 의료 현장에선 진료지원 간호사가 급증했다.

실질적 내용 담을 대통령령 제정이 관건

빅5(서울대·서울아산·세브란스·삼성서울·서울성모) 병원에 근무하는 진료지원 간호사 ㄴ씨(전문간호사)는 “시범사업 실시 이후 우리 병원에선 신규 채용 등으로 진료지원 간호사를 대폭 늘려 2023년에 견주면 두 배 정도로 많아졌는데, 전체 진료지원 간호사 중 전문간호사는 30% 정도 된다”며 “전문간호사가 아닌 간호사들은 진료지원 업무에 투입되기 전에 간단한 교육을 이틀 정도 받고 투입되지만, 현장에서 업무 능력 차이가 커 앞으로 이러한 현장의 복잡함을 제도가 풀어줘야 한다”고 짚었다.

9월에 국무회의를 거쳐 법안이 공포되면 2025년 6월부터 간호법이 시행돼야 하는데, 간호법을 둘러싼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의 의견을 듣고 대통령령 등을 조율하자면 시간이 촉박하다는 전망도 나온다. 최수정 한국전문간호사협회 회장은 “정부가 앞서 진료지원 간호사 시범사업을 시작할 때는 의사의 동의 없이도 진료지원 업무를 설정했지만 법령으로 정하는 것은 다른 문제”라며 “의사단체, 의료소비자 단체, 다른 직역 단체의 의견을 청취하려면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 할 것이고 결과적으로 보수적(간호사의 업무를 좁히는 방향)으로 접근할 가능성이 있다”고 내다봤다.

“간호법 통과는 2005년 국회 입법으로 시도된 후 무려 19년 만에 이루어진 매우 뜻깊고 역사적인 사건이다. 간호법 국회 통과로 간호돌봄 체계 구축과 보편적 건강 보장을 실현해나가는 길이 열리게 됐다.” 간협은 간호법 제정 직후 입장문을 내 환영의 뜻을 밝혔으나, 현장 간호사들은 이 입장에 대해서도 의심하고 있다.

집권 세력의 법 제정 의도가 간호 노동자들의 노동환경과 처우 개선, 국민 건강 증진이 아니라 의사단체들의 권력을 견제하고 전공의가 떠난 의료 현장의 노동 공백을 메우는 데 방점이 찍혀서다. 국회 문턱을 넘은 간호법안에는 2023년 제21대 국회가 담았던 ‘지역사회’와 간호사들이 요구해왔던 ‘배치기준’(간호사 1인당 담당 병상 수) 내용이 빠져 정작 담아야 할 내용이 담기지 못했다는 비판이 나왔다. 현재 의료법은 간호사 1명당 입원환자 12명을 담당하도록 정하고 있지만 2023년 기준 간호사 1명당 환자 수는 16.3명에 이른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국 평균(7.2명)의 두 배가 훌쩍 넘는다. 최선임 동남보건대 간호학과 교수는 “현장의 많은 간호사가 바랐던 건 간호사 인력기준(간호사 1명당 환자 수)을 법으로 정하는 것이었는데 이번 간호법에서는 진료지원 간호사에만 초점이 맞춰져 중요 부분이 빠진 느낌이다”며, “한국 사회의 빠른 고령화와 늘어나는 보건의료서비스요구를 담당하며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지역사회 간호사에 대한 내용이 단편적으로만 언급된 것이 아쉽다”고 했다.

국제간호사의 날인 2022년 5월12일 오후 서울 세종로 동화면세점 앞에서 전국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과 대한간호협회가 함께 연 공동 결의대회에 참가자들이 ‘간호사 1명 적정 환자수 기준 마련\'과 \'간호법 제정\', \'불법 진료 근절과 직종간 업무 범위 명확화\' 등을 촉구하고 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전문 인력 값싸게 대체하려는 속셈?

건강권 실현을 위한 행동하는 간호사회는 간호법 국회 통과 직후 입장문을 내 간호법에 대해 “병원 자본과 윤석열 정부는 환자의 안전보다 병원의 이윤을 위해 노동자의 수를 줄이고, 전문적인 역할 분담이 아닌 값싼 인력이 대신하도록 하고, 의료 시장화의 길을 강요하고 있다”며 “정부의 진료지원 시범사업에 대해 불법의료 시비 등을 피해가고, 앞으로도 값비싸고 부족한 의사 대신 의사보다 더 값싼 인력으로 대체하기 위함이라는 의심을 하지 않을 수 없다”고 비판했다. 이들은 정부가 현장 간호사들의 목소리를 듣고 조속히 배치기준을 제도화할 것을 요구했다.

이재호 기자 p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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