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손' 오정민 감독 "미워했던 윗세대 이해하려는 마음 담았죠"
(서울=연합뉴스) 이영재 기자 = 가족은 사람이 태어나 자라는 보금자리지만, 정신적으로 성장하다 보면 가족이 굴레로 느껴질 때도 있다.
그래서 날카롭게 충돌하기도 하지만, 완전히 등을 돌릴 수도 없는 게 가족이다. 그럴 때 가족과 어떻게 화해에 도달하느냐가 중요한 문제로 대두한다.
오정민(35) 감독이 연출한 '장손'은 우리에게 가족이란 무엇이냐는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다. 가족이 한자리에 모이는 추석을 앞둔 11일 개봉한다.
"20대 시절의 저는 가족의 속물적인 모습 같은 것에 대해 비판적이었어요. 나이를 먹으면서 그런 시선이 조금씩 변화한 것 같습니다. 저 또한 마음속에 그런 면을 가진 인간이라는 걸 알게 되면서 가족을 배척하기보다는 좀 더 이해해보고 싶어진 것이죠."
지난 5일 서울역 근처 카페에서 만난 오 감독은 '장손'을 구상한 계기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 그는 "한때 미워했던 윗세대를 이해하고 싶은 마음이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장손'은 경상북도 시골 마을에서 두부 공장을 가업으로 운영하는 3대에 걸친 대가족의 이야기다. 제삿날을 맞아 장손 성진(강승호 분)을 포함한 열 명의 가족이 한자리에 모이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화목해 보이는 가족이지만, 사소한 일로 조금씩 균열이 생기면서 오래된 비밀이 모습을 드러낸다.
시나리오를 직접 쓴 오 감독의 자전적 요소가 담긴 작품이다. 오 감독은 "스무살 무렵 할머니가 돌아가신 기억에서 출발한 이야기"라고 했다.
극 중 할아버지 승필(우상전)은 서울에서 내려온 성진을 데리고 조상 산소에 올라간다. 장손이기도 한 오 감독은 이 장면을 보다가 할아버지가 떠올라 눈물이 났다고 한다.
'장손'은 오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다. 그는 독립영화 제작의 어려운 환경에서도 고집스럽게 영화의 완성도를 높였다.
여름에서 가을을 거쳐 겨울로 이어지는 계절적 변화를 담기 위해 제작 기간을 6개월로 늘렸고, 경상도라는 공간적 배경에 맞게 자연스러운 사투리를 쓸 수 있는 배우들로 출연진을 꾸렸다.
밀양이 고향인 손숙을 비롯해 영주 출신의 오만석, 구미 출신의 김시은 등이 구사하는 사투리는 조금도 어색하지 않고 감칠맛이 난다.
오 감독은 "말은 정보 전달만 하는 게 아니다. 말의 뉘앙스에는 사람의 태도가 담겨 있다"며 "그 속에 또 다른 텍스트를 품고 있는 말의 맛을 살리고 싶었다"고 말했다.
구수한 사투리가 오가면서 곳곳에서 웃음을 불러일으킨다. 오 감독은 "유머가 담긴 영화를 좋아한다"며 "팍팍한 삶을 견딜 수 있게 해주는 것도 유머"라고 했다.
롱숏으로 촬영한 '장손'의 마지막 장면은 강렬한 여운을 남긴다. 카메라는 하얀 눈으로 덮인 마을을 멀리서 찍어 산수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자아내고, 그 속에서 자그마한 점으로 보이는 누군가의 걸음을 천천히 좇는다.
8분 가까이 이어지면서 관객의 마음에 파문을 일으키는 이 장면에 대해 오 감독은 "한 가족의 미시적인 역사를 대한민국의 거시적인 역사로 확장하는 연출이었다"며 "이야기를 음미하면서 각자의 삶을 반추하는 시간이 되면 좋겠다"고 말했다.
'장손'은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KBS독립영화상을 비롯한 3관왕에 올랐고, 올해 밴쿠버국제영화제와 시드니영화제에도 초청됐다.
고교 시절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을 읽고 작가를 꿈꿨던 오 감독을 영화의 길로 이끈 것은 홍콩 배우 량차오웨이(양조위)의 눈빛이었다. '화양연화'를 보다가 그 눈빛에 매료돼 시각적인 예술을 하기로 결심했다는 것이다.
성균관대 국어국문학과를 나와 한국영화아카데미에 들어간 그는 단편 '연지'(2016)를 시작으로 '림', 'CUT', '백일', '성인식' 등을 잇달아 내놓으며 국내외에서 주목받았다.
오 감독은 "코미디든 뭐든 장르의 외피를 가져오면서 그 안에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잘 녹여낼 수 있는 방법을 항상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ljglory@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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