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은 왜 기후숙제 안 하나요?” 강남 한복판 모인 3만명 “정부·기업 기후부정의에 분노”

7일 서울 강남에서 열린 907기후정의행진에 참가한 노송이씨와 자녀들이 ‘언놈이 내 새끼 앞날을 덥혔쌌냐’라고 적힌 피켓을 들고 앉아있다. 김기범기자

“윤석열 대통령은 왜 기후위기에 대한 숙제를 안 하고 있나요? 헌법재판소가 어린이들이 위기를 겪을 것이라 판단했는데도 움직이지 않는 정부·국회가 정말 답답합니다.”

9월 들어서도 늦더위가 이어진 지난 7일, 각양각색 손팻말을 든 시민들이 전국 각지에서 서울 강남대로에 모였다. 주최 측 추산 3만여 명, 경찰 추산 7000∼1만명이 모여 ‘세상을 바꾸자’고 외친 이 행사는 한국에서 네번째로 열린 기후정의행진이다.

907기후정의행진 현장에서 만난 참가자들은 기후위기가 이미 시민들의 삶을 위협하고 있음에도 소극적으로 대응하고, 오히려 기후위기 대응에 역행하는 정부, 국회, 기업에 분노했다. 전남 곡성에서 올라왔다는 노송이씨는 “우울하다 못해 위협적인 미래를 바라보고 있는 어린이들에게 앞으로 투표하라는 얘기를 못할 것 같다”며 정치권에 대한 답답함을 표시했다. 두 자녀와 함께 참여한 노씨는 “아이들과 함께 행진 때 사용할 피켓을 만들었는데 ‘여러분 멸종위기종이 지나갑니다. 우리는 멸종위기종입니다’와 ‘대통령은 왜 기후위기 숙제를 안 하나요’라는 문구를 적었다”고 소개했다.

7일 서울 강남에서 열린 907기후정의행진에 참가한 전북 무주 푸른꿈고등학교 학생들이 ‘기후가 아니라 세상을 바꾸자’라는 행진 표어가 적힌 현수막을 든 채 앉아있다. 김기범 기자

기후위기비상행동 등 615개 시민단체와 정당, 노동조합, 종교단체 등으로 구성된 907기후정의행진 조직위원회는 이날 오후 서울 강남구 신논현역∼강남역 일대에서 ‘기후가 아니라 세상을 바꾸자’를 슬로건으로 ‘기후정의행진’을 개최했다. 전 세계에서는 매해 9월 유엔총회를 앞두고 다양한 이들이 참여하는 기후행진이 열리고 있다. 한국에서는 2019년부터 시작되었으며, 코로나19 팬데믹 시기인 2020·2021년을 제외하고 올해 네번째 행진이 열렸다.

올해는 예년보다 더 많은 어린이, 청소년과 가족 단위의 참가자가 눈에 띄었다. 이전에는 대체로 학교 단위나 지역아동센터, 동아리 등에서 단체로 참가한 경우가 많았는데, 올해는 단체에 소속되지 않은 어린·청소년들이 스스로 모여 둘셋씩 참가한 경우도 많았다.

7일 서울 강남에서 열린 907기후정의행진에 참가한 차하윤양과 이재인양이 ‘뜨거워지는 지구, 차가워지는 미래’ ‘북극곰은 걷고 싶다’라고 쓰여있는 피켓을 들고 앉아있다. 김기범 기자

서울 목동 신목중학교에 다니는 차하윤양(13)은 “지난해에 이어 두번째로 친구랑 행진에 참가했다”면서 “지난해 923기후정의행진 직전 학교 수업에서 기후위기가 심각하다는 얘기를 들었고, 인터넷 검색을 통해 기후위기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면서 친구에게 같이 가자고 했었다”고 말했다. 함께 참가한 이재인양(14)은 “북극곰들이 죽어가는 모습 등 기후위기 때문에 충격을 받았다”면서 “작년 기후정의행진에 참가한 뒤 느낀 바가 많아서 환경동아리에도 가입해 활동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날 행진은 서울 뿐 아니라 대전·부산·제주·포항·지리산(산청), 통영 등 6개 지역에서도 동시에 진행됐다. 서울에는 전국 참가자가 모였으며, 자체적으로 참가단을 조직한 21개 지역에서 버스·열차를 빌려 상경하기도 했다.

7일 서울 강남에서 열린 907기후정의행진 참가자들이 행진에 앞서 본집회에 참여해 앉아있다. 김기범 기자

이날 행진에 앞서 열린 본집회에서 정록 907 기후정의행진 공동집행위원장은 “노동, 인권, 여성, 환경, 반빈곤 운동 등 다양한 영역에서 다른 세상을 일구기 위해 분투해온 우리는 ‘기후정의운동’으로 서로를 넘나들며 연결되었고 이렇게 모였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착한 자본이, 그리고 녹색 기술이 온실가스도 감축하고 모두를 행복하게 할 거라는 지난 30년 동안 국제기후체제의 거짓과 위선의 역사가 우리를 이 곳에 모이게 했다”며 “기후정의운동의 다양한 현장들을 조직하자. 일터에서, 지역에서, 거리에서 동료들과 시민들을 만나며, 다른 세계를 열어가는 대중투쟁을 조직하자”고 외쳤다.

윤현정 청소년기후행동 활동가는 지난달 29일 헌법재판소가 ‘탄소중립 기본법’에 대해 헌법불합치 판결을 내린 것에 대해 “지금부터가 본격적인 시작”이라며 “위기 속에서 살아갈 사람들의 삶이 삭제된 기후 대응은 위기를 막을 수 없다. 우리는 스스로 변화의 주체가 되기를 선택했다”고 말했다.

지난달 헌재는 청소년·시민단체·영유아 등이 제기한 헌법소원에서 탄소중립기본법 8조 1항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정부의 기후위기 대응이 부족하면 환경권 등 국민의 기본권 침해로 이어질 수 있다고 인정하는 내용이 포함된 결정이었다.

박규석 공공운수노조 발전HPS지부장은 “석탄발전소폐쇄로 인해 생존권을 위협받는 발전노동자들이 있다”면서 “노동자들은 기후위기로 인한 석탄발전소폐쇄에 대부분 동의하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공공재생에너지를 통한 총 고용보장을 요구하는 국내 첫 파업이 성사되었다”면서 각계각층의 연대를 요청했다.

집회를 마친 참가자들은 테헤란로를 거쳐 삼성역까지 행진하면서 도로 위에 죽은 듯 드러눕는 ‘다이인’(die-in) 시위를 벌였다. 행진 코스에는 역삼역 인근 구글코리아, 선릉역 인근 쿠팡 로켓연구소, 포스코사거리 인근 포스코센터 등이 포함됐다.

기후정의행진 조직위원회는 온실가스를 대량으로 배출하는 빅테크기업, 기후재난 속에서 노동자들이 잇따라 죽어가고 있는 쿠팡, 국내에서 가장 많은 온실가스를 배출하고 있는 포스코 등에 대한 항의의 의미라고 설명했다.

7일 서울 강남에서 열린 907기후정의행진 참가자들이 프로야구 구단 유니폼을 입은 채 도로에 앉아있다. 김기범기자

7일 서울 강남에서 열린 907기후정의행진 참가자들이 행진에 앞선 본집회에서 구호를 외치고 있다. 907기후정의행진 조직위원회 제공

7일 서울 강남에서 열린 907기후정의행진 참가자들이 포스코센터에 ‘기후악당 노동악당 포스코 OUT’ 등의 문구가 새겨진 스티커를 붙이고 있다. 기후정의행진 조직위원회 제공

7일 서울 강남에서 열린 907기후정의행진 참가자들이 쿠팡 로켓연구소에 ‘기후악당 노동악당 쿠팡 OUT’ 등의 문구가 새겨진 스티커를 붙이고 있다. 기후정의행진 조직위원회 제공

7일 서울 강남에서 열린 907기후정의행진 참가자들이 도로 위에 죽은 듯 눕는 ‘다이인(die-in)’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기후정의행진 조직위원회 제공

김기범 기자 holjjak@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