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바꿔야”…강남 한복판에 3만명 모였다, 왜?
강남역 시작해 역삼·선릉·삼성역으로
“우리 집은 텃밭을 하는데 상추랑 옥수수를 키웁니다. 상추는 너무 더워서 다 녹아버렸고, 옥수수는 말라 비틀어져서 딱 한 개밖에 못 먹었어요. 엄마한테 여쭤보니 지구가 아프기 때문이라고 했어요.”
엄마 손을 꼭 붙잡고 7일 서울 강남구 교보타워 사거리 일대에서 열린 ‘907 기후정의행진’(기후정의행진)에 참여한 고은아(8)양이 말했다. 은아양은 행진에 참여한 이유로 “사람들에게 지구가 아파한다는 걸 알리고 같이 도와줄 수 있을 것 같아서”라고 했다. 부모 손을 잡고 온 어린이부터 청소년, 작업복을 입은 노동자, 백발의 노인까지. 행진에 참여한 시민들은 한 목소리로 “지금 말하고, 지금 바꿔야 한다”며 한목소리로 기후변화 대응을 촉구했다.
이날 기후정의행진이 열린 서울 강남대로 일대는 오후 1시께부터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시민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행사를 주최한 ‘907 기후정의행진 조직위원회’(조직위)는 “애초 예상한 참석 인원 2만명을 넘겨 3만여명이 행진에 동참했다”고 추산했다. 이날 참가자들은 강남역에서 시작해 역삼역·선릉역·포스코사거리를 거쳐 삼성역을 향해 행진했다. 온실가스를 대량으로 방출하는 대기업 본사가 즐비한 곳이다. 이들이 종이상자를 재활용해 만든 손팻말에는 “지구는 한 개, 기후위기는 한계”, “지구야 그만 변해, 이제 내가 변할게”, “나는야 녹색전기를 선택하는 소비자” 등의 메시지가 적혔다.
정록 907 기후정의행진 공동집행위원장은 “노동, 인권, 여성, 환경, 반빈곤 운동 등 다양한 영역에서 다른 세상을 일구기 위해 분투해온 우리는 ‘기후정의운동’으로 서로를 넘나들며 연결됐고 이렇게 모였다”며 “기후위기 극복을 위한 온실가스 감축을 넘어, 기후 불평등·부정의에 맞서자”고 목소리를 높였다.
본 집회에서 발언에 나선 이들은 곳곳에서 현실화한 기후 재난 앞에 ‘정부의 안일한 인식’을 한목소리로 비판했다. 김현욱 가덕도신공항반대시민행동 공동집행위원장은 “이 좁은 국토에 전국 15개의 공항도 모자라 10개의 공항을 더 지으려 한다”며 “삶의 지속성을 방해하는 생태계 파괴를 멈춰야 한다”고 꼬집었다. 임희자 보철거를위한금강낙동강영산강네트워크 집행위원은 “윤석열 정부가 추진하는 세종보 재가동 정책을 비판한다”며 “세종보 수문의 재가동은 금강의 죽음”이라고 규탄했다.
‘부정의한 에너지 시스템’을 비판하는 목소리도 나왔다. 강석헌 홍천송전탑반대대책위 집행위원장은 “동해안 강릉과 삼척에 신규 석탄화력발전소를 짓고, 거기서 생산한 전기를 수도권으로 보내기 위해 장거리 초고압 송전망을 추가로 건설하고 있다”며 “자본의 이윤을 위해서, 농촌에 살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고통과 희생을 강요당하고 있다”고 말했다.
기후위기의 직접적 피해자로 꼽히는 ‘미래 세대’ 어린이·청소년의 목소리는 한층 거셌다. 윤현정 청소년기후행동 활동가는 지난달 29일 헌법재판소가 ‘탄소중립 기본법’에 대해 헌법불합치 판결을 내린 사실을 언급하며 “지금부터가 본격적인 시작이다. 우리 삶을 지킬 최전선을 함께 만들어가자”고 제안했다. 서울 목동에서 온 이재인(14)양은 “기후위기가 더 심해지면 어릴 적부터 봐왔던 코카콜라 마스코트 북극곰을 더 이상 볼 수 없을 것이란 얘기를 들었다”며 “우리가 지구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 친구와 함께 행진에 참여하게 됐다”고 밝혔다. 친구 차하윤(13)양도 “학교 수업 시간에 아마존의 나무가 계속 사라지는 영상을 본 적 있는데, 올해 여름이 너무 더워 기후위기가 먼 나라 얘기가 아니란 걸 체감했다”고 말했다.
참석자들이 강조한 것은 결국 정부와 기업의 결단이었다. 11살·9살 자녀와 참여한 이윤경(36·대구공동육아사회적협동조합 해바라기방과후 소속)씨는 “기후정의행진에 3년째 참여하고 있는데 매해 참여 인원이 늘어나는 것 같다”며 “이렇게 많은 시민들이 목소리를 내는 건 정부가 시민들의 피부에 와닿는 적극적인 정책을 내놓지 않고 있기 때문이 아니겠느냐”고 꼬집었다. 오렌지빛 작업복(방진복)과 방독마스크를 착용한 채 집회에 참여한 임용섭 전국금속노동조합 포스코사내하청 광양지회 지회장은 “분진과 대기 오염 탓에 이 옷과 마스크를 써야만 현장에서 일을 할 수 있다”며 “이러한 오염물은 바깥으로도 다 새어 나가 기후환경에도 영향을 미치는 일인데 정부와 포스코는 전혀 대응책을 마련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박고은 기자 eun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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