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엔 뜨겁고 밤엔 차갑다…제국들이 탐낸 이 지역, 최고의 명품 흘러넘친 비결 [전형민의 와인프릭]

전형민 기자(bromin@mk.co.kr) 2024. 9. 7. 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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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서부 항구 보르도
어떻게 와인 대명사 됐나 (上)
보르도에서 포도를 재배·양조하는 지역 중 잘 알려진 생떼밀리옹(St.Emillion) 지역의 모습. 생떼밀리옹 지역은 로마 시대부터 포도를 재배했다. 영국의 점령기에도 자치권을 인정받을 정도로 뛰어난 품질의 와인을 생산한다.
보르도(Bordeaux). 지구상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단어를 듣는 순간 와인을 떠올립니다. 어떤 사람들은 와인에 더해 사진으로 본 평지에 끝도 없이 펼쳐진 포도밭 풍경을 떠올리기도 하죠. 그만큼 도시의 이름이 고급 와인의 대명사로 쓰이기 때문입니다.

보르도는 가론강과 지롱드강의 하구, 25만 에이커가 넘는 땅에서 포도를 재배하고 있습니다. 아주 오래 전부터 포도를 재배하기도 했거니와, 오늘 날에도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세계 최고 수준의 와인을 생산합니다.

매년 9000여개의 샤또(Chateau·프랑스어로 ‘성’이라는 뜻이지만 와인 업계에서는 와이너리를 뜻하는 말로 쓰임)에서 500만 헥토리터 이상의 와인이 생산됩니다.

전세계 와인 생산의 최고 중심지로써 보르도의 명성은 충분히 ‘그럴만하다’는 인식을 얻고 있는 셈인데요. 와인의 대명사처럼 쓰이는 보르도 지역 와인의 역사는 어떻게 될까요? 오늘 와인프릭은 보르도 와인의 과거와 현재를 탐구해봅니다.

 “그는 그의 손님들에게 자신이 소유한 가장 희귀하고 비싼 와인 중 하나인 보르도 와인을 권했다.”(알렉상드르 뒤마의 몬테크리스토 백작 中)

기원 후 4세기께 보르도에서 태어난 로마의 문인, 아우소니우스의 초상화.
로마 제국으로부터 시작한 포도 재배
보르도의 역사는 기원전 4세기 또는 3세기께 시작합니다. 비투리게스 비비스키(Bituriges Vivisci)라는 켈트족이 이곳에 정착해 마을 이름을 부르디갈라(Burdigala)로 지은 이후 정착민이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기원전 1세기초 보르도 지역의 부족은 한창 팽창하던 로마인과 소통은 했지만, 기원전 50년대초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갈리아를 정복하면서 로마의 지배 아래에 본격적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로마의 지배에서도 ‘부르디갈라’라는 도시명은 유지했고요.

로마는 와인을 전유럽으로 퍼뜨리는데에 가장 큰 역할을 했죠. 하지만 그 시기 로마의 관심은 갈리아(지금의 프랑스)의 서쪽보다는 동쪽이었습니다.

서쪽엔 건널 수 없는 끝도 없는 바다(대서양)가 펼쳐져서 영토를 확장할 수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대륙성 기후를 띠는 동부 지역, 이를테면 지금의 부르고뉴나 알자스 등에서 대량으로 포도 재배에 성공했기 때문에 서부에서 포도 재배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것이죠.

서부 갈리아의 와인 생산 지역으로서 보르도에 대한 최초의 명확한 언급은, 4세기에 가론 강 근처 자신의 영지에 대한 여러 시를 쓴 라틴 시인 아우소니우스(Ausonius)의 작품 모젤라(Mosella)에서 나왔습니다.

그는 스스로도 자신의 영지 약 25헥타르에서 포도를 재배했고, 더 넓은 보르도 지역의 와인을 칭찬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작품을 통해 보르도 와인이 이미 이탈리아에서도 팔리고 있었음을 남겼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부르디갈라(보르도), 완만한 경사면을 따라 포도밭이 펼쳐져 있고 그 열매는 로마 엘리트들의 잔을 채우기에 충분했다.”(아우소니우스의 모젤라 中)

보르도에 존재하는 65개의 와인 보호 산지(AOC) 지도. [출처=보르도와인협회]
천혜의 자연 조건, 로마인의 눈에 들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보르도는 포도 재배에 적합한 지역이었을까요? 대서양과 맞닿았지만, 남쪽 지중해의 영향도 받으면서 포도가 생장하기에 이상적인 환경이 조성됐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지중해의 바람과 기후는 따뜻한 편인데, 덕분에 생장기 포도의 생장을 폭발적으로 촉진합니다. 하지만 너무 따뜻하면 오히려 포도가 과숙되는 문제가 발생하죠. 그렇지 않도록 밤부터 새벽까지는 대서양의 서늘한 바람이 보르도를 몰아칩니다.

여름에 너무 달아오르는 포도밭을 시원하게 해주고, 가을과 겨울 서리와 과도한 동결을 방지하는 역할을 하는 겁니다. 우리나라에 여름에 몰아치는 장마가 보르도는 이른 봄에 발생해 초반 생장에 필수적인 물공급 역시 필요한 만큼 충분히 확보되죠.

보르도 지역은 까베르네 소비뇽, 메를로가 가장 유명합니다. 아무래도 대체로 레드 와인이 재배되지만, 소비뇽 블랑과 세미용도 보르도 블랑(Blanc·프랑스어로 하얗다는 뜻, 와인 업계에서는 화이트 와인이라는 뜻으로 쓰임)이라고 불리며 양조를 위해 재배됩니다.

특히 보르도는 가론과 지롱드 두 강 때문에 지역별로 특이한 미기후(Micro-Climate)가 발달했는데요. 이 때문에 다른 포도 품종도 특정 지역에서 풍부하게 재배됩니다. 가론 강 오른쪽 강둑에서 주로 재배하는 까베르네 프랑이 그렇습니다.

 “부디갈라(보르도)가 있는 가룸나강(가론강) 근처의 비옥한 땅에서 이탈리아의 최고급 와인에 필적하는 와인이 생산된다.”(고대 라틴 문학 모음집 레토리우스 中)

영국 점령기 가스코뉴. 보르도는 영국이 점령했던 지방의 핵심 도시였다. [출처=위키피디아]
영국과의 무역으로 다시 부상하는 보르도 와인
유럽의 와인 산업, 특히 보르도의 와인은 로마로 흥하는듯 했지만, 서로마 제국의 붕괴와 함께 위기를 맞이 합니다. 와인보다는 만들기도, 마시기도, 보관도 용이한 맥주가 부상하면서 입니다.

한동안 침체했던 와인 산업은 9세기에 와서야 유럽 전역에 수도원주의의 확장과 함께 다시 조금씩 활기를 되찾기 시작합니다.

1000년에서 1300년 사이의 고중세 시대에는 보르도 지역이 단순히 와인의 산지를 넘어 명성을 조금씩 모아가는 시기였습니다. 이번에도 명성을 얻게된 계기는 지역적인 특성 때문이었죠.

보르도는 대서양으로 열린 항구도시였습니다. 이 때문에 영국과 연결되기 좋은 지역이었고, 언제나 대륙에 전초기지를 만들려는 욕심을 가졌던 영국은 보르도 주변 가스코뉴와 지롱드 지역을 수백 년 동안 침공하고 지배했습니다.

보르도는 영국이 이 지역을 지배하던 시기 주변 지역의 행정 수도 역할을 했습니다. 결국 보르도 일대의 와인은 대량으로 영국과 웨일즈, 아일랜드 등으로 수출됐고, 이는 방대한 무역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영주들은 잔을 높이 들고 풍부한 보르도 와인(Vinum Burdigalense)을 가득 채우며 해협 건너편에서의 승리를 위해 건배했다.”(12세기 영국 출신 시인 조지프의 작품 中)

*다음주 하(下)편에서 이어집니다.

와인은 시간이 빚어내는 술입니다. 인류의 역사와 함께 와인의 역사도 시작됐습니다. 그만큼 여러 가지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품고 있는데요. WSET(Wine & Spirit Education Trust) 국제공인레벨을 보유한 기자가 재미있고 맛있는 와인 이야기를 풀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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