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S스틸 인수 지연, 일본제철은 웃고 있다? [★★글로벌]

이재철 기자(humming@mk.co.kr) 2024. 9. 7.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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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조원 베팅에 숨은 환율의 마법
高인수가, 미국 ‘관세장벽’ 사례금

일본제철이 미국 제조업의 상징인 US스틸 인수를 결정한 뒤 9개월이 지나고 있습니다.

두 달 앞으로 다가온 대선 국면에서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그리고 바이든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미국의 자존심을 내세우며 인수 불가를 외치고 있습니다.

다급해진 일본제철은 미국 조야에 영향력 있는 인물들을 고문으로 영입해 로비를 강화하고 노조를 달래기 위해 3조5000억원에 이르는 투자 당근책까지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는 20조원에 육박하는 거액의 인수 금액과 별개로, 이처럼 일본제철이 도박적인 베팅에 나선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세계 M&A 시장에서 대단히 이색적인 사례로 기록될 이 건의 흥미로운 내면을 조명합니다.

환율의 축복···역대급 엔저 끝나면서 인수부담 4조원 급감
먼저 3조5000억원의 과감한 신규투자 약속에 대한 설명입니다.

세계 철강시장에서 27위(조강 생산량 기준)까지 추락한 US스틸을 인수하는 데 일본제철은 149억달러(약 20조원)라는 거액을 베팅했습니다.

일본제철이 지난달부터 소셜미디어에 송출하고 있는 US스틸 인수 홍보 광고. 해고와 공장폐쇄가 없는 최선의 선택임을 강조하고 있다. <이미지=일본제철 동영상 캡처>
그런데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노조와 정치권을 상대로 27억달러(3조5000억원)에 이르는 신규투자 유인책까지 내놓고 있습니다.

올해 3월 14억달러 투자 계획에 이어 합병에 반대하는 노조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13억달러를 더 내놓겠다는 설명입니다.

천문학적 인수금액과 별개로 인수금액의 18%가 넘는 과감한 신규투자 베팅이 가능한 데는 ‘환율’이라는 마법이 숨어 있습니다.

지난해 인수합병 합의 당시는 최악의 엔저 환경으로 환율이 달러 당 160엔까지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인수 지연이 장기화하는 과정에서 일본 정부의 시장 개입과 통화정책 전환으로 엔화값은 달러 당 145엔까지 올랐습니다.

이달 미국 연준의 기준금리 인하 결정이 나오면 달러값 약세 기조는 더 강화되고 연내 일본은행(BOJ)의 추가 금리인상 조치가 더해지면 내년 1분기 엔화값은 130엔대로 안정화할 가능성이 큽니다.

만약 미국 대선이 끝나고 일본제철이 내년 상반기 합병 허가를 얻는다면 작년 US스틸과 합의 당시의 환율 기준 대비 18%가 넘는 28억달러의 환차익이 발생하게 됩니다.

일본제철이 노조와 정치권을 상대로 인수금액과 별개로 약속한 27억달러의 신설투자 금액은 공교롭게도 28억달러라는 기대 환차익과 맞아떨어집니다.

일본제철은 “올해 미국 대선만 아니었으면 인수 거래는 오래전에 끝났을 것”이라고 푸념하면서도 인수 지연 후 발생한 환율 변화에서 부지런히 환차익 계산기를 두드리며 도박적 베팅을 강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20조원 거품 인수가격···절반은 美정부 ‘관세장벽’에 바치는 상납금
이번엔 20조원에 이르는 인수금액이 적정한 것인가에 대한 논쟁입니다.

지난해 US스틸 인수전에서 미국 철강기업 클리블랜드 클리프스는 72억5000만달러에 인수하겠다고 제안한 바 있습니다.

지난 4일 펜실베이니아주 피츠버그에서 열린 일본제철 인수 찬성 집회 모습. <사진=일본제철 홈페이지>
또 다른 미국 업체인 에스마크도 US스틸을 상대로 78억달러에 인수하겠단 제안을 내놨다가 스스로 너무 높았다고 생각했는지 자진 철회했습니다.

일본제철이 써낸 149억달러는 이들 미국 업체가 평가하는 적정가의 두 배에 이릅니다.

미국 본토에서 사업을 영위하는 철강업체와 일본제철의 적정가 계산기에서 70억달러 안팎의 간극을 설명하는 키워드는 바로 ‘차이나 프리’입니다.

미국은 해외 철강업체 관점에서 중국산 저가 철강 제품들이 침범할 수 없는 ‘청정지대’라는 뜻입니다.

지난해 미국의 전체 철강 수입량(2560만t) 중 중국산 비중은 2.3%에 불과합니다.

미국은 트럼프 정부 집권 1기인 2018년부터 수입 철강재에 25%의 관세를 부과하고 있습니다. 중국산은 무자비한 25%의 관세가 적용되는 반면 한국과 일본은 쿼터제(직전 3년 평균 수출물량의 70%)가 적용됩니다. 해당 비율만큼 무관세가 적용된 후 이를 넘어서는 물량부터 25% 관세가 적용되는 것이죠.

일본은 이 쿼터에 따라 한해 125만t을 미국 시장에 수출하고 있는데 US스틸을 인수하면 현지 생산 물량으로 관세장벽 걱정 없이 미국 시장을 추가로 즐길 수 있습니다.

중국산 저가 제품과 치킨게임을 해야 하는 고통 없이 마진이 높은 미국시장 공략을 가속화하는 것이죠.

미국 철강업체들보다 70억달러 인수금액을 더 비싸게 책정한 것은 만리장성만큼이나 거대한 미국의 철강 관세장벽에 가져다 바치는 상납금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바이든 정부는 올해부터 철강 등 12개 수입 제품에 온실가스 배출 1t당 55달러의 세금을 매길 태세입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이번 대선에서 승리해 재집권 시 철강 관세를 더욱 강력한 60% 수준으로 강화하겠다고 벼르고 있습니다.

도널드 트럼프가 새 대통령이 되든 카멀라 해리스가 당선되든 일본제철이 기대하는 ‘중국산 청정지대’라는 밸류는 바뀌지 않고 오히려 더 강화되는 것이죠.

라이벌인 포스코, 현대제철 등 한국기업과 미국 시장 경쟁에서도 확실한 승기를 잡게 됩니다.

‘차이나 프리’에 대한 환각으로 일본제철의 흥분이 선을 넘은 것일까요.

모리 다카히로 일본제철 부회장은 최근 미국 블룸버그통신과 인터뷰에서 일본 정부에도 미국처럼 중국산 철강에 반덤핑 관세를 부과해야 한다고 촉구했습니다.

미국처럼 인정사정 볼 것 없이 무역 보호조치를 취해달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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