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작가 20년 해도 안 가본 곳이 이렇게나…일단 떠났다 [ESC]
상주 석불여래상, 마음 편안해져
성주, 생소한 ‘성산가야’의 고분군
도선굴과 대혜폭포 품은 구미
부추 돼지국밥, 경상도 여행 실감
이런, 여행작가 생활을 지금까지 20년 넘게 했지만 아직 가보지 않은 곳이 이렇게 많다니! 얼마 전 어떤 일 때문에 대한민국 지도를 살펴보다가 ‘상주’라는 지명을 발견하고는 지금껏 상주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는 걸 알게 됐다. 그래서 가보지 않은 곳이 또 어디가 있을까 하고 천천히 지도를 더듬어 보았는데 생각보다 많았다. 수도권과 강원도, 전라도, 충청도, 경상남도는 다 가봤는데 이상하게도 경북 쪽에 가보지 못한 도시가 몇 곳 있었다.
‘일단 가보자, 가보면 뭐라도 있겠지’
어디 보자. 상주도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것 같고, 그 아래 김천은 직지사와 구상문학관에 가본 적이 있다. 성주에는 뭐가 있더라. 얼른 떠오르는 것이 없다. 성주에는, 그렇지 참외가 유명하지. 그 아래 고령은 가본적이 있다. 구미에는 공단 말고 뭐가 있지? 경산은 경주 가는 길, 대구를 지나면서 표지판을 본 적이 있지만 가본 적이 없다. 예천에는 회룡포가 있다는 걸 알지만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
지난 8월 셋째주 트렁크에 티셔츠 몇 장, 갈아입을 속옷과 양말을 챙겨 넣은 후 차 시동을 걸었다. 자, 이번엔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으로의 여행이다. 상주-성주-구미로 이어지는 경북 서부 코스다. 지도를 보다가 가본 적이 있는 군위도 추가했다. 군위에는 내가 좋아하는 ‘혜원의 집’ 있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 세트장인데 내가 갖고 싶은 집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 1박2일 정도면 될 것 같다.
지금까지 여행작가로 살아오며 속으로 가장 많이 되뇐 말이 ‘일단 가보자, 가다 보면 어떻게 되겠지, 가보면 뭐라도 있겠지’다. 그러고 보니 여행은 글을 쓰는 것과 비슷한 것 같다. 글을 쓰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일단 첫 문장부터 써 보는 것이다. 쓰다 보면 뭐라도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조금씩 써 나가다 보면, 근사한 뭔가가 만들어져 있을 때도 있고, 영 엉터리가 놓여 있을 때도 있지만, 그래도 뭔가 한 편의 글이 만들어져 있는 것이다. 나는 여행작가니까 누군가 ‘뭐 이런 얼토당토않은 여행을 떠나는 겁니까’ 하고 물어본다면 “취재입니다”라고 둘러대면 그만인 것이다.
출발하기 전, 인터넷으로 검색해 대략 포인트를 잡았다. 상주에서는 증촌리 석불여래좌상·입상을 보고 성주로 가서는 성산동 고분군에 간다. 구미에서는 케이블카를 타고 도선굴과 대혜폭포를 본 후, 군위로 가서 영화 ‘리틀 포레스트 촬영지를 본 후 돌아온다. 가는 길, 틈틈이 휴게소나 카페에 들러 다음 목적지나 경로, 식당 같은 걸 검색하기로 했다. 구미 아니면 성주에서 하룻밤 묵게 될 것 같다. 천천히 주위를 잘 살피며 운전하고 무리하지 말 것, 여행할 기회는 많으니까. 가능한 한 장소에서 시간을 여유롭게 즐기고, 되도록 저녁 6시 이전에 숙소에 들어가 씻고 저녁을 먹을 것. 혼자 여행하는 방법이다. 정해진 규칙을 지키고 무리하지만 않으면 웬만한 위험은 피해 갈 수 있다.
증촌리 여래입상과 좌상은 함창읍 용화사에 있다. 마을 골목을 따라 들어가면 나오는 용화사는 아주 작은 절이다. 석조여래좌상과 입상은 약사전 안에 나란히 모셔져 있는데, 정확히 만든 시기는 알 수 없지만 불상의 비례나 얼굴 표현 등으로 볼 때 통일신라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나이가 들어서일까, 석불이나 마애불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해져서 좋다. 비바람에 닳아 희미해진 얼굴과 알듯 말듯한 불상의 표정 앞에 서 있노라면 세월의 힘이랄까, 무상함이랄까 한 마디로 설명할 수 없는 조금은 복잡한 감정이 전해져 온다. 이런 얼굴과 표정을 가지려면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분명 20~30대에는 느끼지 못했던 마음이다. “이 부처가 원래는 요 근처 어디에 있었는데, 여기로 모셔 온 것이라 하데예. 부처님 두 분이 영험하셔서 기도를 잘 들어준다고 하는데, 아무래도 두 분이 함께 계시니 한 분이 계신 것 보다는 낫지 않겠슴니까. 보살님도 원하는 거 있으면 부처님께 말씀 드리고 가이소. 혹시 알란가, 들어줄란지.” 불상 앞에 서 있는데, 기도를 하러 온 아주머니가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가실 때 스님께 인사나 드리고 가요.” 나는 아주머니께 합장을 한다. “네, 감사합니다.”
상주에서 점심으로 우거지 해장국을 먹었다. 남천식당은 1936년 문을 열어 지금은 2대째 사장님과 3대째 사장님이 같이 꾸려가는 곳인데, 3000원(곱빼기 3500원)이라는 믿기지 않는 가격으로 국밥을 판다. 된장국에 우거지가 푸짐하게 담겨 있고 밥이 말아져 있다. 밥과 국을 잘 섞으려고 하다가 날달걀 하나가 빠져 있는 걸 보고는 달걀이 풀어지지 않게 조심스럽게 숟가락질을 했다. 달걀은 뜨거운 국물에 익고 나면 맨 나중에 먹어야지. 노른자가 풀어져 국물이 탁해지는 건 싫다. 국물은 구수하고 달았다. 다진 고추를 넣으니 맛이 더 풍성해졌다. 오랫동안 경상도를 떠나와 산 탓에 가끔 먹는 경상도 음식의 맛이 거칠고 투박하게 느껴질 때가 많지만, 몇 번 숟가락질을 하면 또 적응이 된다. 미각이란 원체 개인적이고 로컬스러운 감각이니까.
여행 중엔 작은 용기라도 내보기
밥을 먹고 나니 힘이 난다. 역시 사는 것도 글쓰기도 여행도 밥심이다. 다음 코스는 성주다. 성주에 가볼 만한 곳을 찾아보다가 성주에 고분군이 있다는 것과 ‘성산가야’라는 왕국이 존재했다는 것도 알게 됐다. 나는 고향이 김해라 금관가야를 비롯해 가야에 대해 많이 듣고 자랐는데 성산가야는 조금은 낯선 이름의 왕국이다.
고분군은 공원처럼 잘 정비되어 있었다. 고분군 앞에는 고인돌도 있고 무덤도 유리로 덮어 내부를 볼 수 있게 해 놓았다. 고분군 앞에는 현대적으로 지어놓은 커다란 전시관이 있는데 계단을 따라 옥상을 올라가면 고분군 전체를 내려다볼 수 있다. 옥상에서 내려다보는 고분군이 대단한 풍경을 자랑했다. 자료에 따르면 고분군은 5세기 무렵의 것으로 성산의 능선을 따라 크고 작은 봉토분들이 밀집해 있는데, 지금까지 모두 129기가 확인되었다고 한다. 지금부터 1500여 년이라는 아득한 시간 전에 이곳에 이토록 많은 고분이 있었다는 것 자체가 상상력을 자극하는 일이다.
성주 시내에서 하룻밤 묵었다. 하루 종일 혼자서 낯선 곳을 돌아다니는 사람에게 숙소는 중요하다. 그래서 시내 쪽에 자리한 조금 좋은 곳에 묵으려고 한다. 시내에 숙소를 잡고 저녁을 먹으러 갔는데, ‘돼지국밥’이라는 간판이 보이길래 주저하지 않고 들어갔다. 낮에도 국밥을 먹었지만, 그건 우거지국밥이고 이번엔 돼지국밥이니까. 경상도에 오니 돼지국밥이 기본이라 좋다. 경상도에서는 메뉴에 순대국밥이 있어도 그 선택에 있어 순대국밥은 돼지국밥보다 한참 후순위에 자리한다. 부추가 가득 담긴 접시가 기본으로 나오는 것도 마음에 든다. 돼지국밥에 부추를 잔뜩 넣으니 비로소 경상도에 여행을 왔다는 것이 실감이 났다.
오랜만에 타보는 케이블카다. 대혜폭포는 구미 금오산에 있는데, 걸어서 갈 수도 있고 케이블카를 타고 갈 수도 있다. 선택은 물론 케이블카다. 50대다. 타고 갈 수 있다면 최대한 타고 간다. 케이블카가 레트로 풍으로 예쁘다. 그도 그럴 것이 1974년에 개통했다고 한다. 총길이가 805m인데, 해운사가 있는 산 중턱까지 6분 정도가 소요된다. 최근 설치된 케이블카와 달리 에어컨이 없다. 대신 양쪽으로 개방된 창문 덕분에 시원한 바람과 탁 트인 전망을 오롯이 즐길 수 있다.
“지금 대혜폭포 가시면 아마도 물이 없을 낍니더. 너무 기대하시고 가싰다가는 욕이 좀 나올 수도 있는데 그 욕이 마음속에서 사그라지실 때쯤, 마 내리오시믄 됩니다. 관절이 조금 괜찮으신 분들은 도선굴 먼저 갔다가 대혜폭포로 내리오시믄 되고예. 도선굴은 신라말 풍수의 대가인 도선선사가 득도한 곳이라고 해서 도선굴이라고 합니데이.” 케이블카 안내원 아저씨가 진한 경상도 사투리로 이렇게 안내를 해주신다. “도선굴은 꼭 가보이소. 가는 길이 아찔한데 중국 벼랑길 못지 않다니까예.”
안내원 아저씨 말대로 도선굴 안 갔으면 후회할 뻔했다. 벼랑길을 걸으며 살짝 다리가 후들거리기도 했다. 이왕 여행을 왔다면 약간 무리해서 작은 용기라도 내보는 것이 좋다. ‘거기엔 뭔가가 있다’는 걸 확인하는 데는 용기가 필요하다. 도선굴 앞에 서니 금오산 아래로 펼쳐진 구미가 훤히 내려다보였다. 대혜폭포도 생각했던 것보다 볼만했다. 폭포 물이 조금 더 있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다.
내려가는 케이블카 안에서 한 아주머니가 “내가 신발만 쪼메 괜찮은 거 신고 왔어도 도선굴 가보는 건데 마이 아십네예”라고 하자 다른 아저씨가 “그 신발이면 충분합니다. 좋은 거 신었구만”이라고 하셨다. ‘저도 그냥 운동화 신고 다녀왔어요’라고 말하려다가 그냥 가만히 있었다.
군위엔 ‘리틀 포레스트’ 혜원의 집
영화 ‘리틀 포레스트’는 인상 깊게 본 영화다. 고된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고향으로 내려온 혜원(김태리)이 고향 미성리에서 농사를 짓고 음식을 해 먹으며 살아가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미성리는 시내로 나가려면 한 시간 정도는 자전거를 타고 나가야 하는 외딴 마을. 이곳에서 혜원은 자신이 직접 기른 채소로 한 끼 한 끼 정성스럽게 요리를 만들어 먹으며 그동안 자신을 짓눌렀던 삶의 무게에서 벗어나고 상처받은 몸과 마음을 치유한다. 이가라시 다이스케라는 일본 작가의 만화를 원작으로 하고 있는데 일본에서도 이미 영화로 제작됐다. 군위에 있는 ‘혜원의 집’은 영화에서 나오던 모습 그대로 서 있었다. 삐거덕 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서자, 의자와 탁자, 싱크대, 물잔과 화병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
이 영화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혜원이 시골 고향 집에 돌아온 첫날, 배추된장국을 끓여 먹던 장면이다. 혜원은 끼니를 때우기 위해 부엌 이곳저곳을 살펴보지만 반찬이라고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그나마 다행히 쌀이 조금 남아 있다. 혜원은 밥을 올려놓고 마당 한 편에 있는 밭으로 가 눈을 치우고 배추 한 포기를 찾아낸다. 파도 한 줌 남아 있다. 혜원은 그것들로 배추된장국을 끓인다. 그리고 첫 숟가락을 입으로 가져간다. 이때 혜원의 표정은 뭐라고 할까, 행복감과 안도감이 함께 어우러진 표정이랄까. 영화를 보며 이토록 강렬하게 식욕을 느꼈던 장면은 처음이었다.
영화를 보며 이런 작업실 하나 갖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나무로 만든 마룻바닥이 있고 작은 방과 부엌 하나가 있는 집에서 쓰고 싶은 글을 쓰며 살고 싶었다. 그리고 나는 지금 혜원의 집 평상에 앉아 오후의 햇살이 만드는 담장의 그림자를 바라보고 있다. 뭐, 당장은 무리지만 언젠가 이런 곳에 작업실을 마련할 날이 오겠지. 그나저나 자기가 쓰고 싶은 글만 쓰고 사는 작가는 어떤 기분일까. 원고청탁이 오면 “죄송합니다만, 그런 글은 쓰지 않습니다”하고 정중하게 거절할 수 있는 그런 인생 말이다. 떠나고 싶을 때 떠날 수 있는 인생(이것저것 따져야 하지만)은 대충 이룬 것 같지만, 하기 싫은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인생을 이루기엔 아직 한참 모자란다. 살면서 진정으로 성공한 인생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는 게 아니라 하기 싫은 일을 하지 않는 것이라는 걸 알게 됐다. 참, 군위에 와서 군위가 대구에 편입됐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
여행 정보
대구광역시 군위군에 있는 화본역은 중앙선에 위치한 간이역이다. 영화 세트장처럼 예쁜 모습으로 서 있다. 1930년 말 지어진 급수탑도 아직 남아 있다. 증기기관차에 물을 공급하던 시설이다. 금오산 케이블카는 어른 기준 왕복 1만1000원. 주차 요금 1500원. 상주 남천식당(054-535-6296)은 새벽 5시에 문을 열어 오후 2시까지 영업한다. 군위 부계면 시골밥상(054-382-2776)은 누른국수로 유명하다. 직접 만든 두부도 정말 맛있다. 배추를 큼지막하게 썰어 넣고 부추도 푸짐하게 넣는다. 전형적인 경상도 스타일의 국수다.
글·사진 최갑수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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