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코 인사이드] 잭슨 브로만의 짧았던 한국 여정
본 기사는 7월 중하순에 작성했으며, 바스켓코리아 웹진 2024년 8월호에 게재됐습니다.
잭슨 브로만은 2011~2012시즌을 인천 전자랜드(현 대구 한국가스공사)에서 보냈다. NBA 출신이자 레바논 국적을 보유한 이로 관심을 모았다. 하지만 한국 무대에서 활약은 이름값이나 기대치에 비해 다소 아쉬웠다. 시즌 중 교체를 피하지 못했다.
대학 시절 & 한국 진출 이전
브로만은 어린 시절부터 농구와 가까울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인 브렛 브로만이 지난 1980~1981시즌 유타 재즈에서 뛴 농구 선수였기 때문. 그러나 브로만은 고등학생이 돼서야 본격적으로 농구공을 잡기 시작했다. 유타의 뷰먼트 고교를 거친 그는 스노우 칼리지에 진학했다.
그러나 프로 선수가 되기 위해서는, NCAA 주요 무대에서 뛸 필요가 있었다. 스노우칼리지에서 두 시즌을 보낸 브로만은 전학을 결정했다. 대학교에서 전학한 선수는 한 시즌 동안 뛸 수 없으나, 브로만은 전문대에서 아이오와 사이클런스로 전학했다. 그래서 징계가 없었다. 그러나 아이오와에서 돈을 받고 뛴 것으로 알려져, 징계를 받아야 했다.
대학을 졸업한 그는 2004 NBA 드래프트에 지원했다. 유망주로 꼽히는 경우, 드래프트 신청부터 각 구단과의 접촉 등 많은 과정이 관심을 받는다. 그러나 브로만은 유망주로 손꼽히기에 거리가 있었다. 큰 신장에 부드러운 슛 터치를 갖추고 있었으나, 운동능력과 활동량에서 다른 선수에게 밀렸기 때문.
하지만 브로만은 2라운드 2순위로 시카고 불스의 부름을 받았다. 그렇지만 브로만은 곧바로 피닉스 선즈로 향했다. 시카고가 루얼 뎅을 받는 대신, 브로만의 권리와 2005 NBA 드래프트 1라운드 지명권(네이트 로빈슨 지명)을 넘겼기 때문. 또, 브로만은 시즌 중에 뉴올리언스 호네츠(현 펠리컨스)로 트레이드됐다.
브로만은 데뷔 시즌에 46경기를 뛰었다. 18경기에서 주전으로 출장했다. 경기당 15.3분을 소화하며, 평균 4.6점(필드골 성공률 : 41.2%, 3점슛 성공률 : 0%, 자유투 성공률 : 64.0%) 3.8리바운드를 기록했다. 한 차원 높은 상대 수비를 뚫어야 했던 만큼, NBA에서 뚜렷한 활약을 펼치지 못했다.
그나마 뉴올리언스에서 좀 더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당시 피닉스에는 아마레 스타더마이어와 션 메리언 등이 포진해, 브로만이 뛸 기회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뉴올리언스에서 36경기, 평균 18분을 뛰었다. 그러나 이듬해에 뉴올리언스에서도 부진했다. 41경기에서 평균 9.9분 동안, 1.8점(필드골 성공률 : 39.4%, 자유투 성공률 : 47.7%) 2.1리바운드에 그쳤다. 2005~2006시즌을 끝으로 NBA에 돌아오지 못했다.
브로만은 그 후 스페인리그에서 두 시즌을 보냈다. 그란 카라니아와 히로나에서 각각 한 시즌씩 보냈다. 그 후 리투아니아리그를 거쳤다. 그러다 이란에서 선수 생활을 이어갔고, 2010~2011시즌에 중국으로 건너갔다. 동관 레오파즈(현 선전 레오파즈)에서 뛴 브로만은 아시아에서 위력을 떨쳤다.
한국 진출 이후
중국에서 뛴 브로만은 한국에 많이 알려졌다. 또, KBL이 외국 선수 제도를 자유계약으로 바꾸면서, 브로만도 한국에서 뛸 기회를 얻었다. 결정적으로, ‘외국 선수 보유 인원’이 한 명으로 줄였다. KBL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에 외국 선수의 내구성은 물론, 한 명의 존재감이 상당히 중요했다. 각 구단도 검증된 선수를 찾고자 애를 썼다. 전자랜드도 마찬가지. NBA와 스페인리그, 중국 등 여러 무대를 거친 브로만을 선택했다.
전자랜드는 2010~2011시즌 서장훈과 문태종을 주축으로 리그 2위를 달성했다. 구단 역사상 처음으로 4강 플레이오프에 직행했다. 그러나 챔피언 결정전에는 진출하지 못했다. 그래서 전자랜드는 외국 선수를 바꾸기로 했다. 브로만을 영입한 이유. 동시에, 서장훈을 창원 LG로 트레이드했고, LG로부터 강대협과 이현민을 받았다.
그러나 브로만과 전자랜드의 조합은 생각만큼 돋보이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브로만은 코뼈를 다쳤다. 보호 장구를 착용한 채 경기에 나섰지만, 슛 성공률이 좀처럼 기대치를 충족시키지 못했다. 게다가 운동 능력 좋은 상대 외국 선수를 마주하기 쉽지 않았다. 결정적으로 승부처에서의 역할이 저조했다.
브로만이 부진하면서, 국내 선수의 부담도 커질 수밖에 없었다. 전자랜드의 계획도 크게 틀어졌다. 전자랜드는 결국 칼을 빼들었다. 외국 선수를 교체하기로 한 것. 2011~2012시즌 중반에 허버트 힐을 데려왔다.
한국을 뒤로 하고
브로만은 다시 중국으로 향했다. 장수 드래곤스에서 남은 시즌을 보냈다. 이후 필리핀과 중국을 오가며, 선수 생활을 했다. 주로 중국에서 뛰었고, 오프 시즌에 간헐적으로 필리핀으로 향했다. 지난 2013~2014시즌에 다시 장수로 둥지를 틀었다. 그 후에는 푸에르토리코에서 뛰었다. 그리고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그러다가 브로만의 사망 소식이 갑작스레 전해졌다. 브로만의 시신이 2015년 9월 29일(현지 시간) 할리우드에서 발견된 것. 부검 결과, 심장이 지나치게 비대해진 것으로 확인됐다. 약물 중독이 원인이었다. 선수 시절 부상을 많이 겪었던 브로만은 고통을 많이 겪었고, 이를 잊기 위해 마약을 사용했다. 그렇게 브로만은 유명을 달리했다.
사진 제공 = KBL
바스켓코리아 / 이재승 기자 considerate2@basketkore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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