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관이 머리보다 오래 남듯, 오래된 새 향기의 그윽함

한겨레 2024. 9. 7.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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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S] 신지은의 옛날 문화재를 보러 갔다
‘향, 푸른 연기 피어오르니’ 특별전
문헌·그림 속 옛 향 문화 컬렉션
한자 어원은 구수한 햇곡식 냄새
다가가는 대신 한발짝 물러나서
우리 문화 속 향 자취 가늠해보기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향’(香) 자 모양을 투각하고 청화로 칠한 19세기 조선의 백자 향꽂이. 신지은 제공

박물관에서 만나는 유물 가운데서도 공예품은 쓰임새를 상상해보는 재미가 있다. 옛 물건을 볼 때는 눈으로 오래도록 간직된 고운 모양새를 즐기는 것도 좋고, 머리로 역사적인 의미를 생각해 보는 것도 좋다. 그리고 잠시나마 마음으로, 그 안에 담기고 실렸던 먼 옛날의 삶까지 떠올려보기를 권한다. 그 경험은 나들이를 마치고 돌아온 뒤에도 우리 손이 닿는 일상의 물건들을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볼 힘을 준다. 심보르스카의 시 ‘박물관’의 “왕관이 머리보다 오래 살아남았어요”라는 구절처럼, 우리가 가진 물건들은 높은 확률로 우리보다 오래 살아남아서 후세 사람들에게 지금의 기억을 이야기할 것이기 때문이다.

호림박물관 신사분관의 새 특별전 ‘향, 푸른 연기 피어오르니’(12월21일까지)는 우리나라의 향 문화를 전시 주제로 삼았다. 향로, 향주머니와 같은 향을 즐기는 도구를 비롯해, 옛사람들이 향에 대해 기록한 문헌, 향을 태우는 모습이 담긴 그림 등 여러 시대와 분야의 문화유산들을 폭넓게 소개한다. 주로 호림박물관의 방대한 컬렉션 안에서 꾸려내던 이전 전시들과 달리, 이번에는 전시작 170여점 중 다른 기관과 개인의 소장품도 비중이 상당하다.

삼국시대에 쓰인 다양한 향로들

처음 만나게 되는 작품은 향꽂이에 ‘향’(香) 자를 새겨넣은 조선시대 청화백자이다. 한자 ‘香’은 ‘가로 왈’(曰) 위에 ‘벼 화’(禾)를 얹은 모양인데, 이는 그릇에 담긴 곡식을 형상화한 것이라는 설명이 따른다. 농업이 먹고사는 가장 중요한 바탕이 되었던 고대 사람들에게는 갓 수확한 햇곡식에서 풍기는 구수한 냄새야말로 더없이 좋은 냄새였을 것이다. 짚 위로 쌓아 올린 제단 같은 받침대 위에 백자 향꽂이를 올린 연출은, 식량의 냄새에서 비롯된 향이라는 개념이 희귀한 동식물이나 약재의 독특한 냄새로 그 의미가 바뀌고, 경건한 의례의 도구이자 일상 속 기호품으로 쓰이게 된 긴 역사를 상징적으로 아우른다.

동아대학교 석당박물관에 있는 합 뚜껑에 구멍을 뚫어 향로로 만든 신라시대 토기. 신지은 제공

기원 전후 우리나라에 들어온 향을 태우는 분향(焚香) 문화가 본격적으로 자리 잡은 것은 삼국시대이다. 고구려 고분 벽화, 신라시대 마애불, 범종과 암막새에 새겨진 비천상 등 삼국시대 유물 곳곳에 등장하는 다양한 향로들을 소개한다. 중국 청동기를 모방하는 대신, 제사용 그릇으로 많이 쓰이는 토기 합 뚜껑에 구멍을 뚫어 향로로도 활용해 실용성을 추구한 흥미로운 유물도 있다. 그 사이에는 백단향을 섞어 굳힌 조형물을 두어 관람객이 직접 향기를 맡을 수 있다. 직접 진열장 유리 너머에 있는 향 도구를 보며 그 향기를 가늠해보는 것은, 문화유산이라는 그릇의 뚜껑을 열고 그 안에 담긴 알맹이를 엿보는 치트키이다.

대부분의 박물관 전시는 ‘다가가는 경험’이다. 사진으로만 보던 문화유산을 실제로 보고, 고화질 영상이나 확대경 등을 활용해 작아서 잘 볼 수 없는 세부까지 또렷하게 볼 수 있는 기회를 준다. 그래서 문화유산을 가까이서, 크게, 자세히 볼 수 있도록 관람객을 기술적으로 뒷받침해주는 것이 좋은 전시로 여겨지는 게 근래의 추세이다.

통일신라 8~9세기에 만들어진 금동 향로들. 왼쪽은 익산 미륵사지에서 출토된 국립익산박물관 소장품, 오른쪽은 개인 소장품이다. 신지은 제공

그런데 이 전시는 반대로 한발짝 뒤로도 물러나 본래의 크기로 유물을 바라보며 그 쓰임새를 생각하도록 사람들을 이끈다. 익산 미륵사지에서 출토된 금동 향로(보물) 옆에 나란히 놓인 닮은꼴 향로가 그 예이다. 같은 시대에 같은 모양과 용도로 만들어진 물건이어도 크기에 따라 놓이는 자리는 달랐을 것이다. 두 손으로 들어야 할 커다란 향로는 넓은 공간에, 손에 쏙 들어오는 조그만 향로는 훨씬 작은 공간에. 관람객이 옛 공예품들의 쓰임새를 보다 다양한 장면들로 상상할 수 있다.

그런데 왜 지금 향을 주제로 한 전시가 열렸을까? 그 단서는 전시 제목에 들어간 ‘푸른 연기 피어오르니’라는 문장에서 먼저 찾아볼 수 있다. 고려시대 문인 이규보(1169~1241)가 지인과 차를 즐기며 향나무를 태우는 장면을 그린 시에서 빌려온 것이다. 향나무 심재(줄기의 중심부)를 사르는 향불은 희다 못해 푸르스름한 연기를 낸다는 것을 표현했다. 향이라면 향료 가루를 가느다란 막대 모양으로 빚은 선향을 우선 떠올리는 이들에게는 나무에 불을 붙여 향을 맡는 것이 생소할지도 모른다. 반면 말린 식물을 태워 향을 맡는 ‘스머지 스틱’을 아는 젊은 세대는 오히려 이런 고려시대의 티타임 장면을 단번에 연상하고 그 연기를 바라보는 이규보의 기쁨에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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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기마저 짙었을 조선 궁궐의 방

국가민속문화유산인 구름과 봉황을 수놓은 19세기 조선의 향낭. 서울공예박물관 제공

이렇게 마침 요즈음 젊은 세대가 ‘절 냄새’로 불리는 전통적인 향을 선호하고, 다양한 형태의 향 제품을 즐기는 경향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1부에 소개된 다양한 향료 사이에는 자단목(로즈우드), 백단향(샌달우드), 침향(아가우드), 정향(클로브) 등 오늘날에도 사랑받는 향들도 보인다.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해도 이렇게 먼 옛날 사람들과 취향이 통하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시대가 다르니 서로 연관이 없을 것 같던 요소들도 조금 멀리 떨어져 보면 더 큰 문화 속에서 이어져 있음을, 이 전시는 향기로 긴 시간을 묶어내며 이야기한다.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우리 문화 속 향의 자취를 따라 흘러간 전시 마지막에는 굵은 마침표를 찍는 듯한 유물이 하나 있다. 어른 손바닥을 쫙 펼친 것만 한 큼직한 조선시대 향주머니로, 양쪽으로는 1미터가량 되는 끈목까지 늘어뜨렸다. 첫눈에 보아도 조선시대에 몸치장으로 달던 조그만 향주머니들과는 다른 박력이 넘친다. 전통 자수 수집가로 널리 알려진 허동화 선생이 생전에 서울공예박물관에 기증한 국가민속문화유산이다. 가운데에는 구름 사이로 어울려 나는 봉황을, 위아래에는 나비와 연꽃을 수놓은 디자인이 국립고궁박물관에 전하는 19세기의 자수본과 꼭 닮은 것으로 보아, 궁중에서 침실 장식으로 만든 물건이었을 것이다.

커다란 향주머니 하나로 향기마저 짙었을 조선 궁궐의 화려한 방을 생생히 그려보고 박물관을 나서는 길. 향이라는 한자 속에 먼 과거의 인류가 남겨놓은 기억을 한번 더 돌이켜본다. 다가올 계절들을 넉넉히 살아낼 수 있으리라는 푸근한 희망의 냄새. 이번 추석에 만나게 될 햇것들에선 아주 오래된 새 향기를 맡을 수 있을 듯하다.

문화유산 칼럼니스트

박물관과 미술관의 문화유산 전시나 전통문화를 주제로 한 전시를 소개합니다. 우리 문화유산을 사회 이슈나 일상과 연결하여 바라보며, 보도자료에는 나오지 않는 관람 포인트를 짚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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