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오, 국민밴드가 되길 거부하고 청춘의 길 위에 남다
특정 분야의 최고 수준이 되면 이름 앞에 수식어가 붙는다. 천재 화가, 괴물 투수, 투자의 신, 심장 수술의 대가, 체조 요정, 요리왕 등 칭호는 다양하다. 이 중에서 가장 얻기 힘든 칭호가 국민이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인기를 얻어야 하고 그 인기를 오랜 세월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분야를 가수, 그중에도 밴드로 좁혀보면 난도는 더욱 높아진다. 멤버 간 불화와 교체, 심지어 해체와 재결성 등을 극복하면서 함께 수십년을 버텨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국민밴드는 누굴까?
포털 사이트에 국민밴드를 검색해보면 딱 하나의 이름만 나온다. 당신이 윤도현 밴드 혹은 와이비(YB)를 떠올렸다면 무난하게 대중적인 감을 가진 셈이다. 2002년 월드컵 기간에 특수를 누린 적도 분명히 있지만, 와이비는 산울림과 송골매 이후 아주 오랜 세월 끊겼던 국민밴드의 칭호를 누릴 자격이 충분히 있다. 국민밴드의 다음 후보로 내가 주목한 그룹은 장기하와 얼굴들이었는데 10년 만에 그룹이 해체되었다. 그리고 혁오가 눈에 들어왔다.
혁오는 보컬이자 리더인 오혁의 이름을 거꾸로 해서 지은 이름이다. 기타리스트 임현제, 베이시스트 임동건, 드러머 이인우까지 4명의 전형적인 록밴드 편성으로 2014년에 데뷔했다. 아무도 모르는 인디밴드였던 그들은 별다른 홍보도 없이 입소문만으로 유명해지더니 각종 록 페스티벌 무대에 서고, 단독 공연을 성공시키고, ‘유희열의 스케치북’에 출연하고, ‘무한도전’까지 진출했다. 인기 드라마 ‘응답하라’ 시리즈에 노래를 싣고 라면과 자동차 광고까지 찍었는데, 이 모든 일이 1년 사이에 벌어졌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다. 이후에도 혁오의 기세는 멈출 줄을 몰랐다. 정규 앨범을 발표하고 타이틀곡 ‘톰보이’가 엄청난 인기를 누리더니 2018년 ‘한국대중음악상’이 선정한 올해의 노래로 뽑히기도 했다. 그즈음 나는 확신했다. 또 하나의 국민밴드가 탄생할지도 모르겠다고. 이제 다들 흥얼거릴 만한 록발라드 한곡 정도만 발표하면….
기대 혹은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록발라드는 고사하고 혁오는 모습을 감춰버렸다. 대중적으로 가장 큰 성공을 거둔 직후, 소위 노를 막 저어야 하는 그때 방송 출연을 뚝 끊어버린 것이다. 조금이라도 대중의 관심을 얻고 싶어 애쓰는 것이 가수의 속성인데 그들은 대중의 열렬한 관심을 거부하는 것처럼 보였다. 사업하는 사람이 돈을 너무 많이 벌자 이렇게 큰돈은 싫다며 사업장을 접는 느낌이랄까.
2020년에 내놓은 두번째 정규 앨범은 대중과 더 멀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사랑으로’라는 앨범 제목을 보고 드디어 록발라드 하나 만든 줄 알고 좋아했는데 결과적으로 위장 전술. 진입장벽이 만리장성급이었다. 총 6곡이 한곡의 긴 노래이기도 한 이 앨범은 라디오에 틀 만한 노래 하나를 고를 수 없을 정도로 난해했다. 그나마 이 앨범에서 많이 언급되는 노래가 무려 9분에 이르는 마지막 곡 ‘뉴 본’이니 말 다 했다. 물론 취향은 참으로 다양하기에 이 앨범이 최고라는 사람들도 있다.
그 뒤로 거의 활동 없이 4년이 흘렀고 마침내 올여름, 데뷔 10주년을 앞두고 혁오가 돌아왔다. 대만 밴드 선셋 롤러코스터와 함께 만든 프로젝트 앨범 ‘에이에이에이’(AAA)를 발매한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지난 앨범보다는 훨씬 더 우리에게 다가왔다. 느슨하게 앉아 듣고 있노라면 전자음이 아닌 진짜 악기들의 다채로운 소리가 고막을 씻어주는 기분이 든다. 물론 남녀노소 무난하게 좋아할 만한, 이를테면 잔나비 같은 말랑말랑함은 없다. 우리말 가사 거의 없이 영어와 중국어로만 노래를 불렀는데 앨범에서 가장 대중 친화적인 노래 ‘영 맨’의 노랫말을 보자. 비주얼과 패션도 음악만큼 신경쓰는 팀이니까 뮤직비디오로 보는 것을 추천한다.
“우린 살아남기 위해 애쓰고 싸워야 해/ 쓰러진 친구들은 뒤에 남겨졌어/ 손에 불을 쥐고 바다에 뛰어들자/ 너와 나 오직 더 위로만 가야 해”(영어 가사를 번역)
어떤 가수가 신곡을 내놓고 상업적인 면보다 음악적인 부분을 더 신경썼다는 소리를 하면 나는 의심한다. 상업적인 성공을 거둘 능력이 안 되니까 저런 소리를 한다고. 하지만 혁오만큼은 의심하지 않는다. 이문세의 ‘소녀’를 다시 부른 오혁의 음색이나 ‘시티즌 케인’에서 질주하는 멤버들의 연주를 들어보라. 작사·작곡 실력은 말할 것도 없고. 다만 그들은 대중적인 지평을 확장하는 대신 진짜 하고 싶은 음악을 선택했을 뿐이다. 국민밴드가 되기를 거부하고 그 끝에 뭐가 있을지 모를 청춘의 길 위에 남은 팀. 어쩌면 내가 록밴드에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찬사일지도 모르겠다.
혁오를 잘 모른다면 새 앨범부터 도전하기 전에 일단 ‘톰보이’부터 감상해보시길. 초기 명곡인 ‘와리가리’와 ‘위잉위잉’, 묘한 흥겨움이 넘치는 ‘멋진 헛간’도 들어보시고. 계속 좋다면 처연한 ‘폴’과 선언적인 ‘러브 야!’까지 들어보자. 여기까지 다 취향이라면 당신은 혁오의 새 앨범에 푹 빠질 준비가 된 것이다.
에스비에스 라디오 피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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