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밀 100% 면, 생강향 고기육수…샛별처럼 등장한 ‘평냉’ 그 맛집

박미향 기자 2024. 9. 7.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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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미향의 요즘 뭐 먹어 평양냉면 전문점 ‘서령’
숭례문 인근 신상 평양냉면 맛집
홍천 ‘장원막국수’ 전국 맛집 이력
“‘흔들리지 않는 맛’ 만드는 게 계획”
‘서령’에서 파는 평양냉면. 박미향 기자

지난 5월1일에 문 연 서울 숭례문 인근 평양냉면 전문점 ‘서령’에서 한끼 식사를 하려면 최소 2시간 이상 줄을 서야 한다. 개장 시간인 오전 11시 이전에 이미 긴 줄이 선다. 올해 상반기 외식업계를 뒤흔든 식당을 꼽으라면 단연 ‘서령’이 으뜸으로 꼽힌다. ‘면스플레인’ ‘평냉부심’ 등 신조어가 탄생할 정도로 한국인의 평양냉면 사랑은 극진하다.

한국전쟁 이후 남하한 실향민들이 고향에서 먹던 겨울철 야식을 생계 수단으로 팔기 시작하면서 남쪽에 뿌리내린 음식이 평양냉면이다. 달지도, 짜지도, 쓰지도, 새콤하지도 않은 맛이 특징이다. 섬세한 미뢰(미각세포)를 가진 미식가라도 한마디로 규정짓기 어려운 맛이다. 미식가들은 밍밍한 육수 맛과 툭툭 끊기는 면 식감에서 ‘궁극의 맛’을 찾아내려 애썼다. 이런 특징 때문에 평양냉면은 여간해선 제대로 된 맛을 내기 어려운 음식이다. 이렇다 보니 40년 넘는 역사를 가진 노포가 오랫동안 위세를 떨쳐왔다. 노포 종업원이 퇴사해 차린 평양냉면집이 하나둘 생기기 시작한 때가 고작 4~5년 전이다. 어쩌다 등장한 ‘나 홀로 맛 연구’로 가게를 차린 소수의 평양냉면집은 단박에 화제가 됐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오랜만에 외식시장에 등장한 ‘신상 평양냉면집’인 ‘서령’에 사람들의 시선이 갈 수밖에. 더구나 창업자 부부의 이력이 남다르다면 더욱더 말이다. 지난달 21일 ‘서령’ 창업자 정종문(59)·이경희(56)씨 부부를 만났다.

‘서령’을 연 창업자 정종문(사진 오른쪽)씨와 그의 아내 이경희씨. 박미향 기자

“가장 좋은 식재료, 뭘 더 넣을 필요 없어”

―2000년대 전국적으로 소문난 막국수 집 ‘장원막국수’가 강원도 홍천에 있었다.

이경희(이하 이) 우리가 그 집을 연 때가 2001년 10월1일이다. 남편 고향은 청평이지만 내 고향이 홍천이다. 당시 한 집 건너 한 집이 다 막국수를 하던 시절이라서 자연스럽게 막국수로 정했다. (식당 창업) 경험도 없던 우리가 빚더미에 앉은 상태에서 시작한 가게라 정말 제대로 해야 했다.

이씨는 ‘스위스 그랜드 호텔 서울’ ‘서울올림픽파크텔’ 등 호텔 식음 파트에서 일했던 호텔리어였다. 남편 정씨는 그라운드를 누비는 축구선수였다. “(인생) 목표가 운동선수였던 사람이 부상으로 꿈을 빨리 접게 되자, 힘든 시간을 한동안 보냈죠.”(이경희) 아이엠에프(IMF) 외환위기의 긴 터널도 함께한 이들은 “안 해 본 일이 없다”고 했다. “하나를 파면 끝장을 보는 외골수 성격”인 정씨는 직장생활도 맞지 않았다.

―‘장원막국수’는 당시 단박에 전국권 맛집이 됐다. 비결이 궁금하다.

호텔리어로서 배운 손님 응대 서비스가 큰 도움이 됐고, (가격이 저렴한 편인) 막국수지만 대접받는다는 느낌 주려고 고급스럽게 만들었다. 순메밀 100%로 면을 뽑았다. 그게 가능하냐면서 믿지 않은 이도 많았다. 외로운 사투를 벌였다. 막국수 국물도 동치미가 아닌 고깃국물로 냈다. 당시 강원도 막국숫집이 2500원할 때인데, 우리는 4000원 했지만, 문 연 후 얼마 되지 않아 입소문이 빠르게 났다. 맛은 우리 면장님(정종문)이 맡았다.

‘서령’ 창업자 정종문씨가 삶은 면을 말고 있다. 박미향 기자

평양냉면 맛의 두 축은 육수와 면이다. 육수 내는 고기의 종류나 부위, 우린 시간 등이 맛에 영향을 미친다. 동치미 국물 등을 활용하는 집도 있다. 이 둘을 섞기도 하고 갖가지 채소로 감칠맛을 배가시키는 식당도 있다. 이런 예민한 공정 때문에 평양냉면 맛 수준을 가르는 데 육수를 기준 삼는 이도 있다. 이런 이유로 자칫 면 제조는 소홀해질 수 있다. 하지만 ‘서령’은 평양냉면에 면이 차지하는 중요성을 확고하게 드러낸다. 막국수 집에서 시작한 평양냉면집으로서 어쩌면 당연할지 모른다. 메밀 100%로 면을 만든다는 점을 강조한다. 통상 메밀 8할에 2할 정도는 고구마 전분 등을 섞어 만드는 집이 많다. 메밀로만 반죽하면 어려움이 많다. 그의 면 고집의 시작은, 그리고 ‘서령’ 맛의 비법 완성은 ‘홍천 장원막국수’ 시절에서 단초를 찾을 수 있다.

―‘장원막국수’ 면 완성이 궁금하다. 결국 지금 ‘서령’ 면 맛일 테니까.

정종문(이하 정) 막국수를 원체 좋아한다. 정말 많이 먹으러 다녔고, 대표님(이경희)이 절대미각이라 그 기준에 맞추려고 노력했다.(웃음) 뭘 많이 넣으려고 안 한다. 오히려 빼려고 한다. 원재료를 가장 좋은 식재료로 쓰려고 하니깐, 뭘 더 넣을 필요가 없는 거다. 양념장도 다른 데 20여가지가 들어간다면 우리는 6가지만 쓴다. 가장 좋은 메밀을 찾는 일부터 했다. 좋은 메밀은 씹으면 쉽게 으스러지지 않는다. 반죽하면 찰지다. 결론은 내몽고산 일모작 메밀을 쓴다.

―메밀 산지를 정했다고 해도 제대로 면을 뽑는 일은 다른 일이다.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메밀 알갱이 굵기마다 다른 수분을 측정하고, (반죽하기에) 가장 적당한 수분 함량을 찾았다. 면 뽑는 우리 메밀의 수분 함량은 같다. 고생해서 결국 메밀 100%로도 면 뽑는 방법을 찾아낸 거다.

면장님이 건조를 통해 최상의 메밀(가루) 나오는 조건들을 알아낸 거다. 수분은 어느 정도가 좋은지, 어떤 크기 (메밀) 알갱이가 좋은지 등을 말이다. 그걸 찾아내는 데 밤샌 날이 부지기수였고, 반죽 실험을 하면서 어른들 방식대로 느릅나무도 끓여보고, 간수도 써보고, 심지어 사이다, 콜라, 동치미까지 다 해봤는데, 너무 어려웠다. 하지만 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첫째도 메밀, 둘째도 메밀이었다. 원재료를 중심에 두니 답이 분명해 보였다. 온도나 습도에 따라서도, 계절에 따라서도 반죽은 달라지는데, 면장님은 엄청난 노력으로 감 잡으신 거다.(웃음)

“결국 찾아낸 메밀 (알갱이) 수분 함량은 몇 퍼센트냐?”고 묻자 이씨가 웃으면 말한다. “영업 비밀입니다.(웃음) 물과 메밀로만 반죽하는데 이 수치는 공개 안 됩니다.(웃음) 사실 레시피란 게 없어요. 지금도 알 거 같다가도 모르겠어요. 같은 반죽으로 삶아도 날에 따라 맛이 다르기도 하니까요.” 주문받으면 그제야 반죽하고 바로 면을 뽑는다. 미리 만든 반죽을 냉장숙성으로 하지 않는다. ‘서령’에서 ‘빨리빨리’ 서빙이 안 되는 이유다. 맛은 기다림의 미학이 맞다.

‘서령’의 평양냉면 면. 박미향 기자

“나는 ‘쟁이’, 눈 가리고 아웅 안 돼”

이들 부부는 2010년대 중반 돌연 홍천 살림을 정리하고 강화도로 향했다. 매년 손님이 늘기만 한 ‘장원막국수’는 전국에 기술 전수 하는 지점 계약을 할 정도로 승승장구하고 있었는데 말이다. 왜일까.

―이유가 궁금하다.

13년을 거의 하루도 쉬지 않았다. 빚을 갚아야 했으니 전투적으로 살았다. 면장님 혼자 하루 700~800개를 만들었다. 혼자서 새벽 3시 일어나 육수 끓이고 면 뽑고, 영업이 끝나면 청소까지 하루 3~4시간밖에 못 잤다. 몸이 너무 많이 축이 나 있었다. 힘겨워서 못 버틸 정도가 됐다.

손님들이 어느 날부터 무서웠다. 내 몸이 감당을 못하는 거였다.

애들도 어느 정도 자랐고, 우리는 ‘사업’하는 사람이 아니라 ‘음식’하는 사람들이라 소박하게 살자, 그랬다. 지금 홍천 장원막국수 간판 걸고 하시는 분께 다 넘기고 떠난 거다. 그 전에 지점 계약하면서 기술 전수 했던 몇 곳은 당신들이 잘하고 있어서, 안심하고 정리할 수 있었다.

―강화도에서 다시 식당을 열었는데?

2019년에 열었다. ‘강화도에서 쉬자’는 생각으로 갔다. 면장님이 편찮으신 시어머니를 돌봐야 했는데, 그런 조건에서도 강화도가 적당했다. 쉬다 보니 면장님 몸도 어느 정도 회복됐고, 우리가 잘할 수 있는 게 음식 만드는 거라 식당을 열게 됐다. 소박하게 하자는 생각에 30석밖에 안 되는 작은 규모로 차렸다. 그때가 2019년이다.

점심 장사만 했는데도 입소문이 나서 홍천 시절 단골들도 찾아왔다. 감사한 일이었다. 3년 전엔 상호를 ‘서령’으로 바꾸고 평양냉면을 본격적으로 내기 시작했다.

‘서령’을 연 창업자 정종문씨가 면을 삶고 있다. 박미향 기자
‘서령’ 창업자 정종문(가운데)씨가 뽑은 제자들. 이원재(맨왼쪽), 김의곤(맨오른쪽), 황석준 3명의 제자는 쉬는 날이 달라 다 모이기가 쉽지 않다. 박미향 기자
‘서령’ 창업자 정종문와 직원들. 사진 왼쪽부터 제자 김의곤·이원재씨, 김재성 ‘서령’ 본부장, 창업자 정종문씨와 제자 황석주씨. 이경희씨 제공

―평양냉면에 육수도 중요하다.

우리 육수 맛을 찾는데, 꼬박 3년이나 걸렸다. 등급별로 다 육수를 만들어봤다. 등급 낮은 것으로 우리면 조미료를 많이 넣어야 한다. 그게 싫었다. 최상급 고기로 우리려고 노력한다.

정말 고생했다. 면장님이 육수 통을 붙잡고 운 적도 많다. 육수 맛에 생강 향이 살짝 날 거다. 사실 (향이 강한) 생강 넣는 건 모험이다. 고깃국물에 자신 있으니까 가능한 일이다.

‘서령’은 ‘서쪽 봉우리’란 뜻이다. 강화도에서 “우리 음식에 맞는 이름표를 찾고 더 새로운 일에 도전해보자”란 생각에 주력 상품을 막국수에서 평양냉면으로 바꾼 이들은 동쪽으로 이동했다. 기실 이들이 낸 막국수는 평양냉면에 가까운 맛이었다. 두 자녀 중 한 명이 이들을 돕고, 함께 면을 뽑는 제자도 3명 뽑았다. 정씨는 “어설프게 배워 편법 쓰는 건 용납 못하”기에 “순메밀 만드는 고된 과정을 가르치고” 있다고 했다. 그들에게 그가 자주 하는 말이 있다. “솥 앞에 오래 자리를 지켜라.” 개업 전에 이력서 낸 이가 너무 많았다고 한다. 해외 유명 요리대학 졸업생부터 ‘미쉐린 가이드’ 별 식당에 일한 이도 있었다고 했다. 제자 3명은 치열한 경쟁을 뚫고 선발된 이들이다. “나는 ‘쟁이’입니다. 음식 장사는 ‘눈 가리고 아웅’ 식으로 하면 안 됩니다. 지금 계획은 ‘흔들리지 않는 맛’을 만드는 것입니다.” 정씨의 단단한 목소리에 실린 고집이 지금 ‘서령’의 맛이다.

박미향 기자 m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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