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이면서 이미  소년이 아닌… [주말을 여는 시]

하린 시인 2024. 9. 7. 0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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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린의 ‘특별한 감정이 시가 되어’
김안 시인의 ‘서정적인 삶’
자신만의 세계 찾으려는 오기
육체적 이미지로 보는 절망
낭만 대신 시에 가득 찬 것

서정적인 삶

당신은 나를 향해 몸을 벌려요 나는 그것이 사랑이 아닌 것을 알고 있지만 어느새 내 얼굴은 녹색이 되어요 당신이 몸을 벌리면 파르르 서리 낀 창이 흔들려요 방 전체가 하얀 서리들로 가득 차요 밤이 거짓말을 하기 시작하고, 당신의 벌어진 몸에선 노래가 흘러나와요 나는 이 노래를 알고 있지만 아무리 불러도 첫 소절로만 돌아갈 뿐이에요 나는 이 노래의 끄트머리에 뱀과 쥐들, 개와 파리들이 가득하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나는 당신의 노래를 움키고 당신의 푸른 질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요 온갖 은유를 만져요 제발 나를 안아 주세요 베어 먹지 않을게요 제발 나를 안아 주세요 베어 먹지 않을게요 당신은 사려 깊은 장님처럼 내 손을 빼내어 당신의 입 안으로 넣어요 아직 나의 고백은 끝나지 않았는데 당신의 입 안에서 내 손이 사라져요

김안, 「오빠생각」, 문학동네, 2011.

김안 시인의 첫 시집 「오빠생각」은 말, 언어, 노래, 음악, 리듬을 향한 육체적 상상력으로 가득 차 있다. 자신을 스스로 폐쇄하면서 자기만의 시 세계를 끊임없이 탐구하는 젊은 시인들의 '오기'가 느껴지는 시집이다. 그런 집요함 때문에 시에 등장하는 화자는 대부분 '외골수'의 기질을 가지고 있다. 불안한 사춘기를 통과한 '반항아' 기질을 가진 화자가 시집 전체를 주도한다.

이성과 철학보다 육체가 앞서기도 한다.[사진=펙셀]

불우한 사춘기를 보낸 한 소년이 있다. 매부에게 성기를 희롱당하거나('글루미 선데이 (Gloomy Sunday)') "늙은 목사의 성기가 육중한 예배당 문을 두드리"('부활절')는 것을 본(상상한) 소년도 있다. 소년이면서 이미 소년이 아닌 소년의 세계. 세상의 '진리'를 깨달은 소년도 어른도 아닌 다른 차원의 '인간'이다. "일기장 구멍 속에 손을 집어넣어 비명을 만"('버려진 말의 입')질 줄 아는 '인간'을 등장시켜 절망의 끝까지 가본 자만이 갖게 된 위악적인 태도와 미학적인 언어 의식을 보여준다.

어떤 강렬한 갈증으로 가득 찬 김안이 택한 시적 방식은 절망을 가장 정밀하게 보여주는 동시에 시가 갖는 장점인 감각적인 이미지의 덧씌움이다. 이미지는 주로 육체적 코드에서 발생한 것들이 많다. 육체적 이미지를 통해 강렬하게 자리한 절망을 현시하고 있다. 이성보다 철학보다 앞서는 것이 육체다. 이 육체의 비정상적인 행위를 통해, 육체의 말을 통해 시인은 시의 메시지를 끊임없이 강화한다.

'서정적인 삶'은 그런 시적 특징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시다. 정상적이면서 정상적이지 않은 성행위가 상징적으로 시적 정황을 주도한다. 성행위는 서로에게 쾌감을 주고 서로 뜨거워지는 지극히 정상적인 인간의 행위다.

그런데 시인이 바라보는 성행위는 다르다. "당신은 나를 향해 몸을 벌리지만" "방 전체가 하얀 서리들로 가득 차"고 "거짓말을 하기 시작하고, 당신의 벌어진 몸에선 노래가 흘러나"온다. 열렬한 사랑은 온데간데없고 오히려 창백한 사랑이 찾아온다. 노래도 긍정적인 대상이 아니다. "노래의 끄트머리에 뱀과 쥐들, 개와 파리들이 가득"하고 "온갖 은유"가 만져진다.

그런데도 화자는 "제발 나를 안아 주세요 베어 먹지 않을게요 제발 나를 안아 주세요 베어 먹지 않을게요"라고 말하며 애원을 한다. 비정상적인 성행위 때문에 독자들은 '당신'이라는 대상에 의문을 갖게 된다. 그리고 '당신'이라는 대상을 누구로 설정하느냐에 따라 시가 완전히 다르게 읽힌다는 사실에 놀라게 된다.

[사진=펙셀]

필자는 당신을 '시'로 읽었다. 시인은 끊임없이 시를 사랑하지만(쓰지만) 시의 전부를 느낄 수도 만질 수도 없다. 시인의 시는 낭만이 아니라 "뱀과 쥐들, 개와 파리들이 가득" 차 있는 절망이다. 그러기에 김안 시인의 시는 색깔로 치면 진한 검정이다. "서정적인 삶"은 곧 검은색으로 가득 찬 시인의 '절망적인' 노래가 되는 셈이다.

김안은 절망적인 상황을 시로 표출하면서 시를 향한 열망을 불태우고 있다. 그래서 시인의 시를 향한 고백은 영원히 끝나지 않는다. 그 열정으로 그의 시는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한다. 시집 첫 페이지부터 끝 페이지까지 한 번의 흐트러짐도 없이 그는 오직 절망으로 가득 찬 언어 미학을 향해 질주하고 또 질주한다.

하린 시인 | 더스쿠프
poethr@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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