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레그램에 '읽씹' 당한 경찰의 딥페이크 수사 [경솔한 이야기]
경찰청, 범죄 온상 텔레그램 첫 내사
텔레그램 측, 협조 요청에도 '무대응'
서버 확보 난항···"위장수사 강화해야"
100여명 디지털범죄 인력 보강 지적도
높은 보안성과 익명성을 보장하는 글로벌 메신저 플랫폼 텔레그램(Telegram)을 활용한 딥페이크(이미지·음성 합성 기술) 성범죄물이 사회적 문제로 떠올랐습니다. 온라인 공간에 익숙한 현대인들에게 딥페이크 성범죄는 일상을 공포로 몰아넣고 있습니다.
경찰청에 따르면 딥페이크 등 허위영상물 사건 피해자는 2021년 53명에서 2022년 81명으로 증가세를 보이다가 지난해 181명으로 급증했습니다. 익명성이 보장된 공간에서 벌어진 범죄라는 점을 볼 때 알려지지 않은 암수범죄가 훨씬 많을 것으로 우려됩니다.
시민들의 불안감이 커지자 경찰이 딥페이크 범죄에 강경한 입장을 냈습니다. 우종수 경찰청 국가수사본부장은 2일 정례 기자간담회에서 “서울청이 텔레그램 법인에 대해서 입건 전 조사에 착수했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텔레그램 법인에 대한 내사가 시작됐지만 경찰 수뇌부의 고심은 나날이 깊어질 것으로 보입니다. 범인을 잡으려면 텔레그램의 수사 협조가 절실한 탓입니다. 텔레그램 측은 최근까지 경찰의 강력한 수사 협조 요청을 ‘읽씹’한 것으로 파악됐습니다.
경찰이 텔레그램과의 공조 없이 들끓고 있는 딥페이크 성범죄와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을지 경솔한 이야기에서 알아봤습니다.
“FBI가 와도 난 못잡는다.”
2020년 12월말부터 2022년 8월15일까지 아동·청소년 9명을 협박해 알몸이나 성착취 장면을 촬영하고, 1200여개 영상을 유포한 ‘엘(가명)’이 수사 당국을 조롱하며 한 말입니다.
그가 믿는 구석은 메시지 암호화 등 강력한 보안을 자랑하는 텔레그램이었습니다. 해외에 있는 텔레그램 서버 확보가 어려워 경찰 수사가 쉽지 않을 것이란 얄팍한 계산이 깔린 발언입니다. 국내 수사기관이 해외 텔레그램 본사와 서버를 확보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 맞습니다.
'서울대판 N번방' 사건 역시 2021년 범죄 혐의가 확인됐지만 텔레그램의 벽에 막혀 수사가 중단된 바 있습니다. 텔레그램 측이 강력한 ‘익명성’을 바탕으로 급성장한 점을 고려할 때 이번 경찰의 딥페이크 수사에 협조할 가능성도 여전히 낮습니다. 텔레그램의 대화 데이터는 분산 인프라를 사용해 전 세계 여러 데이터센터에 저장돼 국가별 사법부의 명령을 받아야 하는 점도 수사에 큰 부담입니다.
우 본부장 역시 이 같은 어려움을 토로했습니다. 그는 "텔레그램이 계정정보 등 수사 자료를 우리뿐만 아니라 미국 등 다른 국가 수사기관에도 잘 주지 않는다"고 수사의 어려움을 인정했습니다.
사이버 수사 업무를 맡고 있는 한 수사관도 “지금까지 텔레그램이 한국 경찰의 자료요구에 협조한 적은 없었다”며 “국제공조 등 여러 방면으로 고민하겠지만 텔레그램 수사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습니다. 2019년 발생한 N번방 사건 당시에도 텔레그램은 경찰이 보낸 7건의 수사 협조 공문을 읽씹했습니다.
경찰이 신분을 노출하지 않는 ‘위장 수사’는 디지털 성범죄자를 잡는 강력한 무기 중 하나입니다. 텔레그램 서버 확보가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에서 위장수사는 경찰이 익명성에 숨은 범죄자에게 접근해 혐의를 입증할 증거와 자료를 수집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입니다.
현행 청소년성보호법상 위장수사는 아동·청소년 대상 디지털 성범죄를 수사 대상으로 하고, 수사의 방법과 절차 등에 따라 ▵경찰관 신분을 비공개하는 신분비공개수사와 ▵문서·도화·전자기록 등을 활용하여 경찰관 외 신분으로 위장하는 신분위장수사로 분류됩니다.
위장수사는 이미 디지털 성범죄자 검거에 탁월한 효과가 있는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경찰은 위장수사 제도가 시행된 2021년 9월 24일부터 지난해 6월 30일까지 3년간 총 350건의 사건을 수사했고, 705명(구속 56명)을 검거했습니다. 2022년 6월 경부터 일명 ‘윤드로저’ 사건의 피해자 신상정보 목적의 텔레그램 대화방에서 피해자들의 신상정보를 올리고, 불법촬영물을 및 아동‧청소년 성착취물을 유포한 피의자를 검거한 것이 대표적인 위장수사 검거 사례입니다. 지난 2022년 11월부터 지난해 2월까지 디스코드 내에서 아동‧청소년 성착취물 유포 채널을 개설하고, 가입비 등 명목으로 2700만 원을 취득한 일당도 위장수사에 덜미가 잡혔습니다.
이에 정치권에서도 위장수사를 강화하는 법안을 내놓고 있습니다. 조은희 국민의힘 의원은 현행 아동·청소년 대상 디지털 성범죄에 대해서만 허용되는 신분 비공개·위장 수사 특례를 성인 대상 디지털 성범죄까지 확대해 적용하도록 하는 내용의 성폭력범죄의처벌등에관한특례법 개정안을 3일 대표 발의했습니다. 조 의원은 "텔레그램 등 보안 메신저의 활성화로 80%를 상회하던 디지털 성범죄 검거율이 50% 수준에 그치고 있다"며 "포괄적 수사 공조 대안과 함께 피해자 지원 강화 방안을 찾는 데 더 집중해야 할 시점"이라고 법안 발의 배경을 설명했습니다.
법안 강화와 함께 디지털 성범죄 수사 인력도 늘려야 한다는 지적이 나왔습니다. 현재 전국 18개 시도 경찰청 디지털 성범죄 전담수사 인력은 총 25개 팀, 127명에 불과합니다.
디지털 성범죄가 2019년 9043건에서 지난해 2만127건으로 크게 증가한 점을 고려할 때 수사인력의 부담이 매우 커졌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제도의 정비와 함께 익명성과 강력한 보안성이라는 거대한 장애물에도 디지털 성범죄는 반드시 처벌받는다는 사회저 인식 확립도 중요하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았습니다.
경찰은 디지털 성범죄자였던 엘을 잡기 위해 해외 기업에 대해 140차례에 이르는 압수수색영장을 집행해 필요 자료를 확보하는 끈질긴 노력 끝에 엘의 신원을 특정해 그를 체포할 수 있었습니다. 경찰이 수사에 착수했음에도 잡지 못했던 서울대 N번방 사건 주범 역시 범죄자를 잡겠다는 시민 활동가 단체 ‘추적단 불꽃’의 집념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 었을 것입니다.
박우인 기자 wipark@sedaily.comCopyright © 서울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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