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하의 아내들까지 탐한 절대권력...그가 향락에 빠지도록 판 깔아준 이 남자 [히코노미]
[히코노미-4] 그는 세상의 주인이 되고자 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큰 궁전, 아름다운 여인들, 진귀한 동식물까지. 모든 것은 그의 소유여야 했습니다. 불이 꺼지지 않는 궁전에는 그의 치세를 찬양하는 신하들로 가득합니다. 측근의 부인들도 거리낌 없이 자신의 침실로 불러들입니다. 지상에 만든 천국에서 그는 신과 다름 없었습니다. 프랑스 절대왕정의 상징인 ‘태양왕’ 루이14세의 이야기입니다.
루이14세의 프랑스가 향락의 극치를 달리면서도, 유럽의 최강자로 떠오른 배경에는 콜베르의 회계적 지식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오늘날 가장 아름다운 궁전으로 통하는 베르사유 역시 콜베르가 없었다면 존재하지 않았을테지요. 이 사내는 어떻게 프랑스를 강대국으로 만든 것이었을까요.
오늘날 태양왕이자 절대왕정의 상징으로 통하는 루이14세지만 그 시작은 미약했습니다. 아버지 루이13세는 네살에 불과한 루이14세를 두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에게 남겨진 건 전쟁으로 인한 막대한 부채에 허덕이는 프랑스. 어머니 안 도트리슈와 재상 마자랭의 섭정기(대리통치), 민중의 삶은 비참하기 그지없었습니다.
마자랭 재상이 루이14세를 알현할 때, 한 남자를 대동합니다. 장바티스트 콜베르라는 이름의 남성. 마자랭의 최측근으로 그에게 정치적·경제적 조언을 아끼지 않는 ‘브레인’이었습니다. 마자랭이 루이14세의 ‘두뇌’였다면, 콜베르에겐 마자랭이라는 조언자가 있었습니다. 루이14세의 국정운영에 콜베르가 간접적으로 관여한 것이었지요.
근무하면서 그는 회계의 중요성을 가슴 깊이 새길 수 있었습니다. 문서 처리, 법적 절차, 행정력까지. 그는 당대의 이름난 재무전문가가 되어가고 있었지요. 중세 상인들의 상업 메뉴얼인 아르스 메르카토리아(Ars Mercatoria)를 완전히 체화한 인물이 콜베르였습니다. 회계의 중요성이 무시되던 프랑스에서는 이례적인 일이었습니다.
마자랭은 콜베르를 자신의 핵심 인재로 활용합니다. 그에겐 엄청난 재산이 있었지만 관리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콜베르는 지식은 있었으나 재산이 미미했지요. 두 사람은 서로에게 부족한 걸 채워줄 수 있었습니다.
회계사의 눈으로 프랑스의 재정을 바라보기 시작합니다. 기본적인 재정 구조부터 바로잡고자 했습니다. ‘매의 눈’ 콜베르는 진단합니다. 프랑스에 돈이 없는 게 아니라, 이를 몰래 빼내 가는 도둑이 많은 것이라고.
큰 도둑은 가까운 거리에 있었습니다. 재무대신이었던 니콜라 푸케. 전임 재상인 마자랭과 함께 루이14세를 보필한 인물. 왕실 금고에서 사부작사부작 돈을 빼돌린 덕에 엄청난 부를 쌓아 올릴 수 있었지요. 프롱드의 난으로 프랑스 왕실이 휘청거리고 있을 때 조차 그의 가문은 부유해져만 갔습니다.
이 압수수색을 이끈 총사가 소설 ‘삼총사’에 나오는 ‘다르타냥’이었습니다. 다르타냥과 짝을 이룬 콜베르는 이제 무서운 것이 없었습니다. 루이14세는 콜베르를 앞세워 회계를 무기로 정적을 제거했던 셈이지요.
‘회계사’ 콜베르는 프랑스의 최고 지도자이자 루이14세의 선생님이었습니다. 국가 전반의 운영에 회계가 반영되어야 한다면서, 국왕에게도 회계의 기본을 교육했습니다. 루이14세가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프랑스 재무에 관한 역사적 회고록’도 집필합니다.
콜베르는 일주일에 두 번 이상 회계 장부를 보고합니다. 루이14세는 그가 보고하는 부기를 이해하고 좋아했지요. 콜베르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프랑스의 군주는 ‘회계의 왕’이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돈이 어떻게 들어오고 흘러가는지를 알아야 국부를 쌓을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부채 이자는 5200만 리브르에서 절반 이하로 떨어집니다. ‘중상주의’를 기치로 내걸고 리옹에 실크 제조업체를 육성하고, 유럽의 여러 장인들을 프랑스로 불렀습니다. 산업을 본격적으로 육성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루이13세 때의 병약한 프랑스는 이제 없었습니다. 경제학의 아버지 애덤 스미스도 “콜베르가 국고 세입의 징수와 지출에 질서를 도입했다”고 상찬했을 정도입니다.
루이14세와 콜베르의 관계는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했습니다. 부유한 재정 상태임에도 콜베르가 언제나 루이14세의 결정에 어깃장을 놨기 때문입니다. 베르사유 궁전의 확장에도, 신흥 강호 네덜란드와의 전쟁에도 콜베르는 회계장부를 들이밀었습니다. 자신이 만들어 놓은 부국 프랑스를 망쳐놓지 말라는 경고였습니다.
콜베르에 이어 재무총감의 자리에는 클로드 르 펠레티에가 차지합니다. 콜베르의 오랜 라이벌 집안이었습니다. 권력을 분산시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루이14세의 조치였지요. 콜베르 집안은 신임 재무총감 클로드에게 재무 정보와 관련된 정보를 인계하지 않았습니다.
콜베르라는 고삐가 사라지자, 태양왕의 야심은 더욱 더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프랑스를 넘어 유럽 전역에서 부르봉 왕가의 영향력을 확대하고 싶었던 것이지요. 점점 성장하는 개신교 국가들을 혼내주고 싶은 마음도 컸습니다. 루이14세는 독실한 가톨릭이기 때문이었지요. 퐁텐블로 칙령을 통해 국내 개신교 박해를 공식화하기도 했습니다.
콜베르의 죽음 이후 프랑스가 경제보다 정치를 우선시하면서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켜켜이 쌓인 재정적 부담은 결국 프랑스를 무너뜨립니다. 1789년 7월 프랑스 혁명이 터져 부르봉 왕조를 몰락시킵니다. ‘르 그랑 콜베르’가 죽은지 100년이 조금 지난 뒤였습니다.
콜베르의 정신은 그럼에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튼튼한 국가 재정이 부국의 기본임을 입증해서였습니다. 그래서인지, 미국 건국의 아버지 중 한 명이자 초대 재무부 장관을 지낸 알렉산더 해밀턴은 열렬히 콜베르를 존경했습니다. “프랑스가 번영을 찾을 수 있었던 건 ‘위대한 콜베르’의 능력과 불굴의 노력 덕분이다.”
2024년 8월 대한민국과 가계 채무가 합계 3000조원을 넘었다는 뉴스를 보면서, 저는 콜베르를 떠올렸습니다. 재정의 튼튼함이 부국의 기본이라고 태양왕 앞에서도 설파하는 그의 모습을. 위대한 회계, 방만한 재정의 반대자는 번영의 열쇠가 되기 때문입니다.
ㅇ프랑스 절대왕정의 상징인 루이14세가 향락을 즐길 수 있었던 배경에는 튼튼한 국가 재정이 있었다.
ㅇ이 국가 재정을 설계한 이가 회계사 콜베르였다.
ㅇ콜베르는 ‘다르타냥’과 함께 국가 재정을 좀먹는 이들을 적발하고, 세금제도를 개편했다.
ㅇ콜베르가 사망한지 100년이 조금 지나서 부르봉 왕조는 방만한 국가 운영으로 무너졌다.
<참고문헌>
ㅇ제이컵 솔, 회계는 어떻게 역사를 지배해왔는가, 메멘토, 2016년
ㅇ앙드레 모로아, 프랑스사, 김영사, 201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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