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던 경성]우리가 잊었던 ‘왕십리 미나리’
‘미나리는 어디서든 잘 자라.’ 미주(美洲) 한인 이주민의 정착 과정을 그린 영화 ‘미나리’는 배우 윤여정에게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안겨줬다. 우연의 일치인지 한국인의 외식메뉴에도 미나리가 돌아왔다. 청도 미나리 간판을 단 고깃집이 하나둘씩 늘어난다 싶었는데, 마침내 집 근처까지 파고들었다. 매운탕이나 지리같은 생선탕에 곁들임으로 먹던 미나리가 주요리를 제치고 간판으로 등극하다니….
미나리 붐의 선두주자는 물 좋고 흙 좋은 자연을 앞세운 경북 청도다. 그런데 한 때 ‘미나리’하면 ‘왕십리’를 떠올리던 시대가 있었던 사실을 아시는지?
◇엄동혹한기 초특산물
한겨울인 1936년 1월 얼음 구덩이에서 미나리를 캐는 사진이 신문에 실렸다. ‘빙혈(冰穴)에서 미나리 채취광경’이란 설명이 붙었다. 촬영지는 ‘왕십리’. ‘경남(京南)특산품’을 소개하는 기획 첫번째가 ‘왕십리 미나리’였다. 여기서 ‘경남’은 경상남도가 아니라 ‘경성 남쪽’이란 뜻이다. ‘경남(京南)지방에는 허다한 산물중에서도 유독 엄동혹한기에 월등 산출되는 초특산물 몇 개가 있다. 그중 먼저 경남의 미나리(芹)를 말해보자. 미나리는 타지방에서도 산출되지만 경남의 미나리와 같이 사시장절(四時長節) 산출되는 지방은 없을 것이다. 또 풍미와 미각으로도 이런 품질은 없을 것이오. 산액으로 말하더라도 여기처럼 많지는 못할 것이다.’(경남특산1 왕십리의 미나리, 조선일보 1936년1월24일)
◇만주, 일본까지 수출
45만 인구(1935년)의 경성을 배후삼아, 이 도시에 미나리를 공급하는 대규모 생산지가 왕십리에 있었던 것이다. 왕십리는 전국 미나리 공급지로 급성장하고 있었다. ‘근래에 와서는 장안인들에게 국한되어 소화되던 이 미나리가 차차 지게꾼들의 등짐을 벗어나 기차로 남으로는 멀리 현해탄을 건너가고, 북으로는 만주국에 사절적 식료품으로 수출되어 간다한다.’경부선, 경의선, 경원선 등 철도를 타고 현해탄 건너 일본과 만주국까지 수출됐다는 것이다. 1933년 6만2000원,1934년 8만5000원, 1935년 11만2원으로 매년 생산액이 급증했다.
◇연한데다 향취도 좋아
천도교 개벽사에서 발간한 대중월간지 ‘별건곤’23호(1929년9월호)에도 ‘왕십리 미나리’가 등장한다. ‘경성의 명물’을 소개하는 코너에서다. ‘안주의 미나리가 백상루와 같이 평남에서 이름이 높고 남원 미나리가 춘향이에 지지 않게 전라도에 소문이 높지만, 서울 왕십리의 미나리처럼 명물은 되지 못할 것이다. 다른 곳의 미나리는 봄철에만 있지만 서울 미나리는 유행동요에 미나리는 사철이란 말과 같이 사철 없는 때가 없다. 길고 연하기도 하려니와 향취 또한 좋다. 특히 동지섣달 얼음이 꽝꽝 언 논속에서도 새파랗게 새싹이 난 미나리를 캐내는 것은 서울이 아니고는 그 생신(生新)한 맛을 보지 못할 것이다.’
왕십리 미나리는 연한데다 향기도 좋지만, 사시사철 특히 한겨울에도 난다는 점에서 다른 지방과는 구분되는 특징이라고 했다.
◇왕십리처녀는 미나리 장수?
‘왕십리’하면 ‘미나리’를 떠올리다보니, 이런 대화도 신문에 실렸다. “순진이, 봄 미나리를 씻어본 일이 있니?” ‘왜 내가 왕십리 처녀라구?” “왕십리 처녀야 미나리장수로 나가지, 미나리 씻으러 가나?”(봄 거리의 프로므나드, 조선일보 1939년 3월5일)
◇조선시대 왕십리는 채소밭
왕십리는 조선시대부터 채소밭으로 유명했다. 박지원의 열하일기 ‘예덕선생전’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왕십리의 무와 살곶이의 순무, 석교의 가지·오이·수박·호박이며 연희궁의 고추·마늘·부추·파·염교며 청파의 미나리와 이태인의 토란들은 상상전(上上田·최상급 밭)에 심는데 모두 엄씨의 똥을 가져다 써야 땅이 비옥해지고 많은 수확을 올릴 수있으며 그 수입이 1년에 6000전이나 된다네.’ 왕십리는 미나리뿐 아니라 무와 배추로도 유명한 채소산지였다
박지원은 미나리 산지로 청파를 거론했는데, 일제시대 청파동은 왕십리와 더불어 미나리 산지로 이름을 날렸다. 조선일보 1920년 5월20일자에는 청파에서 미나리를 키우는 사진이 게재됐다. 경찰청 본청이 있는 서대문구 미근동도 미나리밭으로 유명했다. 이 지역 지명인 근동(芹洞)은 미나리를 많이 재배해서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광복 후에도 왕십리 미나리
광복 후에도 왕십리 미나리의 인기는 여전했던 듯하다. 봄 미나리 인기가 높았던지, 봄마다 미나리 캐는 사진과 기사가 함께 실렸다. 조선일보 1955년 4월13일자는 행당동에서 촬영한 미나리 수확 사진과 함께 이런 글을 실었다. ‘옛 노래에도 있는 봄미나리는 지금이 한창인 듯. 왕십리밖 미나리에서만도 하루에 만여단씩 뽑아낸다니…시민의 식욕도 과연 적지 않다.’
3년 후에도 왕십리에서 찍은 미나리 수확 사진과 기사가 실렸다.’산뜻한 봄의 미각을 돋구(우)어 주는 미나리가 미끈미끈하게 자라난 논에서 조심스레 미나리를 캐는 손에 대지의 흐뭇한 냄새가 안기는 듯하다. 한묶음 또 한묶음 캐어내는 미나리의 싱싱한 푸른 빛이 혀끝에 닿는 냄새를 풍겨주어 한 입 머금어 보고 싶다. 이제부터는 채소와 과일이 정성들인 결실을 빚어 계절과 함께 차례차례로 우리들에게 생선한 삶을 맛보게 해줄 것이다.’(조선일보 1958년4월29일)
아파트 숲으로 바뀐 왕십리에서 미나리밭의 자취를 떠올리긴 쉽지 않다. 그래도 근처를 지날 때 숲 향기 가득한 미나리 내음을 떠올리면 잿빛 도시 풍경이 조금은 색다르게 보일 것같다.
◇참고자료
경성명물집, 별건곤23호,1929년9월
박지원, 예덕선생전, 연암집 제8권 별집, 한국고전번역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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