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기도 전에 퍼준다…윤석열식 '마음 외교'가 최악인 이유
윤석열 정부 외교 정책을 만든 김태효 국가안보실 1차장의 "중요한 것은 일본의 마음"이란 말은 매우 중요한 함의를 갖고 있다. 윤석열 정부의 대일 외교 전략을 설명하려면 '마음 외교'라는 새로운 개념으로 접근해야 한다. '마음 외교'라는 개념을 학술적으로 발전시켜도 꽤 좋을만 하다.
'마음 외교'의 가장 큰 특징은, 상대의 마음을 헤아려 상대가 요구하기도 전에 그 일을 실행에 옮겨주는 것이다. 염화미소 외교라고 할까. 말이 필요 없다. '마음'이 중요한 것이니까. 그리고 남은 물컵의 '절반'을 채워주길 기다리는 마음을 가지면 된다. 물론 여기에서 제일 중요한 건 '외교 주체의 마음'이 아니라 '외교 상대의 마음'이다.
개념화가 필요한 이유는 '마음 외교'라는 말의 어감이, 마치 식민지 가해국이나 전범국이 피해국을 위해 배상과 보상을 행하는 외교 쯤의 의미로 착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윤석열 정부의 '마음 외교'는 피식민 국가, 전쟁 피해국가가 가해국을 상대로 하는 경우로 한정된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피해국가는 '마음 외교'를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윤석열 정부 시대 한일 관계는 '마음 외교'의 '전형'으로 그 학술적 가치가 높은 사례들의 총합이라 하겠다. 모든 상식을 뒤집는 독특한 '윤석열식 마음 외교'는 외교학 교과서에 '반면교사'로 기록해 반드시 후대에 길이 남겨야 한다. '마음 외교'의 개념 연구를 위해 윤석열 정부의 대일 외교 사례를 수집하고 분류하는 일이 먼저 필요하다.
2023년 3월 6일 윤석열 대통령은 일본 전범기업을 대신해, 한국 기업이 낸 돈으로 만든 기금으로 한국인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금을 대납하는 '제 3자 변제안'을 제안해 일본을 감동시켰다. 일본이 요구한 것도 아니고 윤석열 정부가 자발적으로 내놓은 안이었다. 대통령은 일본 최대 일간지 <요미우리>와 인터뷰에서 해당 아이디어를 "내가 생각한 것"이라고 당당히 밝혔다. 일본 언론은 강제동원 피해 생존자 3명이 반대할 것을 우려하는 보도를 내 놓았지만, 윤 대통령은 이런 '일본의 마음'까지도 선제적으로 이해해 주면서 "향후 (한국이 일본 기업에) 구상권을 청구하지 않는다. 걱정할 필요 없다"고 안심시켰다.
일본의 사과도 필요 없다. 윤 대통령은 <로이터> 통신 등과 인터뷰를 통해 "(일본 정부는) 역대 정부의 입장을 통해 과거 식민 통치에 대해 깊은 반성과 진심 어린 사과를 표명했다"고 말했고, <워싱턴포스트>와 인터뷰에서 "100년 전 일을 가지고 (일본에) '무조건 무릎 꿇으라'라고 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했다. 일본이 무릎 꿇는 걸 받아들일 수 없다는 해석이 잠시 나왔지만, 기자가 원문을 공개한 걸 보니, '일본에 무조건 무릎 꿇으라는 것을 윤 대통령 본인이 받아들일 수 없다'는 뜻이 명확했다. 이 모든 게 '일본의 마음'을 미리 헤아린 외교 전법에 따른 것으로 봐도 부족함이 없다.
'물잔 반컵 외교'는 '마음 외교'의 하위 개념으로 비중 있게 다룰만 하다. 박진 당시 외교부장관의 "앞으로 이어질 일본의 성의 있는 호응에 따라서 그 물컵은 더 채워질 것으로 기대한다"는 발언은 '마음 외교'의 정수에 가까운 문장이기 때문이다.
윤석열 정부는 이후 3월 24일 일본이 먼저 취한 수출 규제(2019년 7월부터 시작한 포토레지스트·불화수소·폴리이미드 등 3개 품목에 대한 수출 규제)를 공식적으로 풀기도 전에, '일본의 마음'을 먼저 읽고 세계무역기구(WTO)에 제소했던 것을 먼저 철회한다.
이후에도 '마음 외교'는 다각적으로 펼쳐진다. 2023년 8월 24일 후쿠시마 오염수가 바다에 방류되기 전부터 윤석열 정부의 '마음 외교' 전략은 빛을 발했다. 윤 대통령이 일본 정치인들을 만나 후쿠시마 수산물 수입 재개 질의를 받고 '이해를 구해 나가겠다'고 말했다는 일본 언론의 보도가 나왔다. 한국의 여당은 일본 오염수의 안전성을 홍보하기 위해 자비를 들여 '우리바다 지키기 검증 TF'를 만들었다. 조승환 당시 해양수산부장관(현 국민의힘 부산 중구영도구 국회의원)은 "알프스(ALPS)를 거친 오염수가 연간 최대량까지 방류돼도 우리 해역에 미치는 영향은 미미할 것"이라고 단언했다.
일본의 '마음'을 배려한 자발적 홍보 노력은 눈물겨웠다. TF 위원장인 국민의힘 성일종 의원은 '오염수'라는 단어를 문제삼고 "오염처리수라고 하는 게 맞다"고 주장했고, 정부는 공식 문서에 '오염수'를 '오염처리수'로 바꿔 나가기 시작했다. 일본 파견 검증단 대신 '시찰단'이 꾸려졌고, 그 활동은 비밀리에 이뤄졌다. 정부 기관이 초청한 영국의 교수는 한국에서 "오염수 1리터(ℓ)도 당장 마실 수 있다"고 말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7월 기시다 총리에게 "국제원자력기구의 발표 내용을 존중한다"며 방류를 기정사실화했다.
압권은 대통령실이 지난 8월 23일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1주년을 맞아 "핵폐기물, 제2의 태평양전쟁 같은 야당의 황당한 괴담 선동이 아니었다면 쓰지 않았어도 될 예산 1조6000억 원이 이 과정서 투입됐다"고 브리핑하며 야당에게 사과를 요구한 일이었다. 바꿔 말하면 한국은 일본이 방류한 오염수의 안전성 홍보를 위해 1조6000억 원을 쓴 셈이다. 결국 일본은 가만히 앉아서 남의 돈으로 '후쿠시마 오염수' 안전 홍보 성과를 거뒀는데, 이런 일은 모두 자발적 '마음 외교' 개념화를 위한 중요한 사례들로 인용될 수 있겠다.
최근 일본의 사도 광산 유네스코 등재 과정 역시 마음 외교'의 선제적 가동 사례로 손색이 없다. 한국은 일본 '근대 산업 유산'이 내재한 윤리적 논쟁을 과감히 생략하고 곧바로 인도 뉴델리로 달려가 일본이 원하는 거의 모든 것을 다 들어줬다.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 등재는 관련국 한 국가라도 반대할 경우 이뤄지지 않는다.
일본의 <요미우리> 신문은 한·일 정부가 사전에 '강제노동'이란 표현을 사용하지 않기로 합의했다고 보도했다. 일본은 '사도 광산의 전체 역사' 반영 전시물을 변방의 향토박물관에 가둬놓고, '강제'라는 말을 흐릿하게 만들었다. 사도섬 주민들은 '축제'를 벌였고, 피해국 한국은 국론 분열과 내부 논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쓸려 들어갔다. 2015년 일본은 군함도 등재 당시 강제노역을 인정하고 조선인 피해자를 기리겠다고 한 약속을 어긴 적이 있는데, 똑같은 일이 더 나쁜 방식으로 재현된 셈이다.
가장 중요한 사도 광산 논란의 근원적 질문은 지워졌다. 아베 정부가 극우 표를 의식해 만든 일본의 '근대 산업 유산' 지정 프로젝트는 생존 피해자가 엄연히 존재하는 인류의 불행한 역사의 흔적들에 '산업 유산'과 '근대화'란 이름의 싸구려 포장지를 둘러버린 기괴한 정치적 장난질이다. 과거를 지우려는 '일본인의 자긍심'을 돋우고, 역사 왜곡의 우회로를 뚫어 준 윤석열 정부의 '마음 외교'는, 돈이나 외교적 실익으로 따질 수 없는 인류 보편 윤리 가치의 훼손으로 이어진다.
폴란드의 아우슈비츠는 유네스코 등재된 '관광지'이지만, 사도광산이나 군함도처럼 '근대 산업 유산'으로 포장하지 않는다. 만약 아우슈비츠 일부 시절에 '근대 바이오 산업 유산' 따위로 의미를 부여해 한쪽 구석에 전시실을 운영한다고 생각해보자.
'강제 동원'을 두고 해석을 달리하는 일본의 대표적인 논리는 '당시 식민지 조선인의 국적은 일본인'이라는 것이다. 일본인이 일본인을 채용했는데 무슨 강제가 있느냐는 것이다. 김형석 독립기념관장, 김문수 고노동부 장관의 인식과 똑같다. 1910년 한일병합이 불법인데, 조선인이 일본국적이라는 해괴한 논리는 이렇게 '일본의 마음'을 이용하는데 요긴하게 쓰인다. 이렇게 따지면 프랑스인은 한때 나 독일 국적을 가졌던 적이 있고, 인도인은 한때 영국 국적을 가진 적이 있는 것이다.
영화 <파묘>를 두고 '반일 영화'라 거품을 문 사람들이 '민족 정기'나 '쇠말뚝'의 비이성적 해프닝을 진지하게 다뤘다고 비난하느라 시간을 쏟아 부었지만, 정작 간과된 부분은 현재 진행형인 으스스한 내선 일체의 기막힌 현실이다. 이 영화는 지금 한국 정부가 하고 있는 일들에 대한 알레고리로 작동한다. 한국 정부는 일본의 추악한 과거의 무덤 위에 묘를 쓰고 피해당한 자국민의 정당한 요구에 '출입 통제' 철망을 둘러주고 있는 중이다.
사도광산과 군함도가 유네스코 문화유산 등재 자격이 되는가에 대한 논쟁은 어디로 사라졌는가. 수많은 '하층 노동자'와 '식민 노동자'들이 혀 죽어나간 으스스한 폐건물을 두고 벌이는 '축제'에 들러리 서는 한국 정부는 대체 누구를 대변하고 있는가. "중요한 건 일본의 마음" 운운하며 조연이 못 돼 안달이 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 모든 걸 피해 국가가 '자발적'으로 세금을 들여 진행하고 있다. 가해국에 이익을 안겨주고, 국론 분열을 일으키며 인류 보편의 가치를 뭉개버리는 윤석열 정부의 '마음 외교'는 꼭 기록돼야 한다.
일본의 근대화 과정에서 사도광산과 군함도는 기민(棄民, きみん, 버려진 국민)의 역사다. 메이지유신에서 시작해 '전쟁국가'로 탈바꿈한 일본의 동력을 상징하는 유물이다. 더 정확하게는 '쓰고 버려진' 일본의 하층 노동자, 식민지의 2등 국민들이 '근대화'와 '전쟁'을 위해 이름도 없이 죽어나가며 체제를 지탱했다. 국가는 증기 기관차의 뻘건 아궁이에 석탄을 집어 넣듯 '기민'들을 광산에 내던졌고, 그에 대한 윤리적 고찰도 없이 무명의 '산업 유산' 역군으로 서둘러 매장해 버렸다. 지금 이 순간에도 출신 불분명의 이름없는 일본 노동자의 죽음으로 버텨내고 있는 후쿠시마를, 언젠가 '일본 국난 극복의 모범 유산'으로 지정하자고 할까 두렵다. 거기에 한국이 '마음 외교'로 들러리 설까 더 두렵다.
대통령실이 최근 공식 브리핑에서 야당을 비판하며 '탄핵 빌드업'이라는 말을 사용한 걸 봤다. 대통령실의 언급 덕에 이제 사람들은 대통령과 '탄핵'을 연관지어 생각하게 됐다. 그 유명한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속 프레임 전략 실패의 전형적인 사례다. 기왕 대통령실이 '탄핵'을 언급했으니 한마디 하겠다. 윤석열 정부의 비상식적, 비윤리적 '마음 외교'도 혹시 '탄핵 빌드업'의 재료로 사용될 수 있을까?
[박세열 기자(ilys123@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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