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기시다 한마디에 건네진 ‘명단’… 日정부는 왜 79년간 은폐했나
일본 정부는 기시다 후미오 총리의 방한 하루 전날인 지난 5일 우키시마마루(浮島丸·이하 우키시마)호 승선자 명부 일부를 우리 정부에 제공했다. 일본 정부가 확보한 75건의 명부 자료 가운데 정밀 조사를 마친 19건이다. 우키시마호는 1945년 8월 한국으로 귀국하는 재일 한국인을 태우고 부산항으로 오다가 침몰한 비극적인 선박이다. 제대로 조사하기 위한 시작점이 희생자 명단 확보였지만 일본 정부는 79년간 이를 은폐했다. 그러다 기시다의 총리로서 마지막 방한을 앞두고 겨우 첫 고리를 채웠다.
퇴임을 3주 남겨둔 기시다 총리는 승선자 명부 제공을 본인의 선의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우키시마호 침몰과 같이 일제강점기 일본에 갔다가 희생된 조선인의 비극은 이 밖에도 많다. 관동대지진·군함도·사도광산·조세이 탄광·다카시마 해저탄광·유바리 탄광·이이즈카 아소탄광·미이케 탄광·우토로 마을 비행장·나가사키 조선소·야하타 제철소 사건 등등 다 나열하기 힘들 정도다. 예컨대 1923년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은 죽은 조선인의 이름·주소는커녕, 사망·실종자 숫자도 모른다. 조선총독부의 ‘관동지방 지진의 조선인 현황’ 중 ‘살해된 조선인 수’라는 통계 항목에 ‘도쿄 약 300명, 가나가와현 약 180명’과 같은 기록이 있지만, 일본 정부의 공식 입장은 여전히 “사실 관계를 명확히 할 기록이 없다”는 것이다.
조세이 탄광은 1942년 붕괴된 해저 탄광이다. 조선인 징용자 136명이 수몰돼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 그나마 조세이 탄광은 일본 정부가 아닌, 한 시민단체가 희생자 이름을 하나씩 찾아내 적으나마 사망자 이름이 공개됐다. 과거의 비극적 사건에 대한 정보 공개에 일본 정부가 지나치게 소극적이라는 이 같은 현실이 한일 관계가 여전히 역사의 멍에를 벗어나지 못하는 원인 중 하나라는 점을 일본 정부도 알아야 한다.
기시다 내각은 일본을 방문하는 한국인에 대한 사전 입국 심사 제도 도입도 추진한다고 밝혔다. 역시 방한을 계기로 한 ‘선의’로 포장하는 모양이다. 한국인이 김포·인천공항 등에서 일본 심사관에게 미리 입국 심사를 받으니 편리해지는 건 맞는다. 하지만 일본은 내년부터 대만의 방일객에 대해서도 같은 제도를 도입한다. 연간 3000만명 이상의 외국 관광객이 몰려, 일본 주요 공항의 시스템이 더는 수용하기 어려운 상황이어서 사전 입국 심사로 업무를 분산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기시다 총리의 ‘고별 방한’을 보면서 ‘아리가타 메이와쿠’라는 일본 표현을 떠올렸다. ‘고맙지만 민폐’라는 뜻이다. 퇴임을 앞둔 기시다 총리에게 고별 방한은 한일 관계 개선이란 본인 성과를 확인하는데 딱 좋은 이벤트일지 모른다. 하지만 생색내기식 선의에 ‘고맙다’고만 하기엔 일본 정부가 풀지 못한 오랜 숙제가 너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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