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의 소녀는 평생의 사회운동가였다

이후남 2024. 9. 7. 0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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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렌 켈러
맥스 월리스 지음
장상미 옮김
아르테

헬렌 켈러(1880~1968)라는 이름을 들으면 자동으로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그래서 말도 하지 못했던 어린 소녀와 설리번 선생님. 소녀는 선생님이 손바닥에 써주는 ‘water’(물) 같은 단어들을 익히면서도 이것이 사물의 이름을 가리킨다는 것을 모르다가, 어느 날 펌프에서 쏟아지는 물의 감촉이 손에 닿는 순간 그 의미를 깨닫는다. 소녀가 여섯 살 때의 일이다.

이후 놀라운 학습 능력을 발휘한 소녀의 이야기는 당시 언론에서도 큰 주목을 받았다. 헬렌 켈러가 ‘기적의 소녀’라면, 애니 설리번 선생님은 ‘기적의 일꾼’으로 널리 알려졌다. 하버드대가 여학생을 입학시키지 않던 시절, 성장한 헬렌 켈러는 그 자매학교인 래드클리프에 입학해 우등으로 졸업했다. 대학 학위를 받은 최초의 시청각장애인이었다.

이 책 『헬렌 켈러』의 영어 원제는 ‘After the Miracle’(기적 이후). 기적의 소녀라는 이미지와 성장기를 넘어 평생의 삶을 통해 사회운동가로서 헬렌 켈러를 보여준다. 헬렌 켈러는 일찌감치 미국 사회당에 입당한 사회주의자였다. 여성참정권자였고, 흔히 ‘빵과 장미’ 파업이라고 불리는 20세기초 로렌스 섬유노동자 파업의 지지자였다. 남부 출신으로 흑인 하녀가 일하는 집안에서 자랐으되,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을 반대하는 운동에 목소리를 높였다.

헬렌 켈러가 1918년 영화 촬영장에서 만난 찰리 채플린의 얼굴에 손가락을 대고 입술을 읽고 있는 모습. [사진 로이엑스포트유한회사]
사실 ‘기적의 소녀’가 사회주의자라는 건 당시 대중에게 쉽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일은 아니었는데, 언론 인터뷰나 기고문에 드러나는 헬렌 켈러의 말에는 대담한 재치가 번득인다. 특히 자신의 정치적 성향을 장애와 관련짓는 인신공격에 대해 “청각장애와 시각장애가 사람을 사회주의로 기울게 하는 모양”이라며 “어쩌면 마르크스는 완전히 농인이고 윌리엄 모리스는 맹인인지도 모르겠다”는 식으로 신랄하게 맞받아쳤다.

책에는 러시아 혁명, 스페인 내전, 세계 대전, 매카시즘 등 세계사의 흐름과 함께 이와 관련한 헬렌 켈러의 시각과 활동이 고루 언급된다. 책 서두에 나오듯 헬렌 켈러는 70대였던 1950년대에도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인종차별 정권에 대항하는 반체제인사들을 지지하는 활동에 참여했다.

그렇다고 이 책이 또 다른 방향의 위인전은 아니다. 우생학이 새로운 과학인 양 대두한 시절, 헬렌 켈러 역시 그 영향을 받았다. 그 자신이 두 살이 되기 전 병을 앓고 시력과 청력을 잃은 장애인이었지만, 헬렌 켈러는 장애와 기형을 갖고 태어난 신생아의 치료를 거부한 의사의 행동이 사회적 논란이 되자 우생학을 언급하며 의사에 대한 지지를 공개적으로 드러내기도 했다.

이를 비롯해 이 책이 전하는 구체적인 삶은 장애를 이겨낸 위인으로, 기적의 소녀로 그를 바라보는 시각을 탈신화화한다. 장애인을 위한 연구로 전화를 발명하게 된 그레이엄 벨, 헬렌 켈러의 대학 입학 무렵 재정적 후원자들을 모아준 소설가 마크 트웨인 등 성장기에 영향을 받은 인물들과의 교류는 물론 카네기나 록펠러 집안과의 일화, 훗날 재정적 타개책으로 보드빌 무대에 선 일 등도 흥미롭게 다가온다.

설리번 선생님 역시 이 책은 그저 ‘기적의 일꾼’이 아니라 삶의 여러 면면을 비교적 상세히 전한다. 아일랜드 이민자 출신의 가난한 부모에게서 태어난 설리번도 실은 시각장애인이었다. 어린 시절 감염 질환을 앓아 제대로 앞을 보지 못하다 수술을 통해 시력을 회복했는데, 말년에는 다시 시력을 잃었다. 헬렌 켈러와 달리 사회주의나 여성참정권 등에 대해서는 보수적인 성향이기도 했다.

에필로그를 통해 지은이는 21세기에 헬렌 켈러를 두고 벌어진 뜻밖의 논란도 전한다. 그럼에도 “헬렌은 자신의 유산을 필요에 따라 부정직하게 왜곡하는 사람들보다 자신이 평생 이룬 업적에 대한 선의의 비판을 훨씬 마음 편하게 받아들일 것이 틀림없다”고 책에 썼다. 헬렌 켈러는 “펌프장에 선 여섯 살 소녀 시절에 갇힌 세속의 성자가 아닌 맥주 한잔과 짓궂은 농담을 즐기던 결점 있지만 거침없는 여성으로 기억될 것”이라면서다. 원제 After the Miracle: The Political Crusades of Helen Keller.

이후남 기자 hoona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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