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실 돈으로 세운 보성학교, 최대 항일 조직 천도교가 인수
[근현대사 특강] 천도교와 근대적 국민의 성장
일본제국은 1905년 5월 전승 후 전시 병력을 한반도에 잔류시켜 그 무력으로 보호조약을 강제하여 대한제국의 국권을 빼앗았다. 고종은 1906년 6월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보내 조약의 불법 강제를 폭로하면서 국제사회에 도움을 구했다. 그러나 만국평화회의는 특정한 국가의 불법행위를 통제하기에는 한계가 많았다. 일본제국의 침략 극복 문제는 고스란히 한민족 자신의 몫이었다. 여러 형태의 노력 가운데 동학·천도교가 국가원수 고종에게 보인 무언의 지원 관계는 국민의 성장이란 관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황실 특파유학생 출신들 3·1운동 주도
서울에 진입한 일본군은 황제의 최측근 이용익, 길영수, 이학균, 현상건 등을 수배했다. 길·현·이 3인은 산둥반도 취푸로 피하였으나 이용익은 일본군에 잡혔다. 일본군은 그를 군함에 태워 일본으로 데려가서 ‘만유(漫遊)’란 이름으로 이곳저곳 둘러보게 했다. 이용익은 교육시설을 선호하여 살펴보고 12월에 귀국하였다. 그가 돌아오기 두 달 전 황제는 ‘황실 특파유학생’ 50명을 선발해 일본으로 보냈다. 분노를 삼키면서 오늘의 일본의 위세를 살펴 배울 것은 배워 내일을 대비하자는 취지였다. 귀국한 이용익은 황제에게 고등 교육기관의 증설을 건의하였다. 황제와 이용익의 뜻은 공교롭게 교육 육성에 집중했다. 황제가 이용익의 건의를 받아들여 세운 보성학교는 우리나라 최초의 대학이 되었고, 황실 특파유학생 50명 중 최남선, 최린, 조용은(조소앙), 한상원 등은 15년 뒤 3·1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는 인물이 되었다.
이용익은 1906년 다른 밀명으로 유럽으로 갔다가 블라디보스토크의 독립운동 세력 근거지를 방문한 후 얼마 되지 않아 거기서 사망하였다. 보성학교는 손자 이종호에게 맡겨져 운영되다가 1910년 12월 천도교 대 교주 손병희가 인수했다. 황제가 특별한 뜻으로 세운 대학을 천도교가 인수한 것은 예삿일이 아니었다.
1904년 2월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손병희는 이를 교단 재건의 기회로 삼아 진보회(進步會)를 결성하여 ‘단발 흑의 운동’을 벌였다. 국내의 이용구가 나서 교도들이 “상투를 자르고 검은 옷을 입고” 민족 개화를 표방하는 운동을 벌이게 했다. 20만 명의 동학도들이 참여하여 단합을 과시했다. 그러나 이용구가 일진회로 일본에 부역함으로써 운동은 중단되고 말았다.
1905년 12월 1일 자 『제국신문』 1면 머리에 손병희가 천도교 ‘천도주(天道主)’ 자격으로 특별한 광고를 냈다. 천도교는 내년 2월부터 교당을 짓는다는 광고였다. 동학이 천도교로 이름을 바꾼 첫 대외 공고였다. 손병희는 광고에서 모든 종교는 자유 신앙인 것이 만국 통례이며, 교당을 짓는 것도 자유라고 하였다. 우리는 이제 종교단체의 일반 예를 따르니 탄압을 가하지 말라는 선언이었다. 천도교는 근대적 종교의식으로 주문(呪文) 청수(淸水) 시일(時日: 매주 일요일 집회) 성미(誠米; 식량의 10분의 1을 아껴 교회에 내기) 기도 등 다섯 가지 의식을 정해 신도들이 지키도록 했다. 천도교는 갈수록 신도가 늘어 1910년대에 300만을 헤아렸다. 성미 제도는 교단의 재정을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천도교는 나라 안 최대 조직이 되었다.
1916년 조선 총독 데라우치 마사다케는 본국 총리대신으로 영전했다. 그는 총리로서 미국 윌슨 대통령의 특별한 동향에 관한 보고에 접했다. 1915년부터 세계대전이 끝나면 식민지 약소국을 모두 해방하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것이었다. 윌슨 대통령의 기획은 1918년 1월 연두 교서에서 ‘민족자결주의’로 표명되었다. 미국에서 오는 정보에 접할 때마다 총리 데라우치 머릿속에는 ‘이 태왕(고종)’이 1907년 6월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때처럼 파리 강화회의에 특사를 보내 일본의 만행을 폭로하고 독립을 요청하는 장면이 떠올랐다. 1909년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 ‘암살사건’ 때 육군 대신으로 보고받았던 기밀 정보도 생각이 났다. 조선인 밀정을 한인 사회에 투입해 얻은 특급 정보는 서울의 황제가 사건의 핵심 배후라고 했다. 데라우치는 후임 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에게 만약 ‘이 태왕’에게 수상한 움직임이 보이면 독살하라고 지시했다. 1919년 1월 21일 아침 고종이 급서하자 ‘독살설’이 삽시간에 퍼졌다. 윤치호는 고종은 온몸이 붓고 입안과 식도가 타서 검은색이 된 상태로 발견되었다고 ‘일기(영문)’에 기록했다. (이태진, 2009)
고종 황제 국장을 계기로 일어난 3·1 독립 만세운동은 학생들이 시위를 맡고 천도교, 기독교, 불교 등 종교단체가 선언서를 준비했다. 천도교 15인 기독교 16인 불교 2인 등 33인이 민족대표로 이름을 올렸다. 천도교 대표 15인 가운데 권병덕, 나용환, 나인협, 박준승, 손병희, 이종훈, 박예환, 홍기조, 홍병기 등 9인이 1894년 2차 항일 봉기 때 농민군을 지휘한 접주 출신이었다. (유바다, 2019) 동학교도와 군주 간에 오간 무언의 신뢰와 성원은 25년 세월에도 변함이 없었다.
1922년 손병희가 사망하면서 천도교는 교단 운영에 위기를 맞았다. 최린 등 일본 유학 출신들이 ‘타협적’ 문화 운동을 벌이면서 동학 출신들은 일선에서 밀렸다. 손병희로부터 4대 교주로 지명받았던 박인호를 중심으로 동학 출신들이 뭉쳐 신·구파의 대립이 일어났다. 동학 계통의 구파는 1926년 순종 황제 국장을 계기로 일어난 6·10 만세운동, 1927년의 신간회 운동 등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천도교의 항일 운동은 황실의 의친왕과 협력하면서 1929년 구파의 청년동맹 조직 운동이 사전에 발각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 후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면서 구파를 지지하던 많은 신도는 보천교 등 이른바 ‘유사 종교’ 형태로 민간 속에 잠입하여 항일 투쟁을 이어갔다.
국민국가는 선출제 국가원수를 중심으로 이뤄지는 형태뿐만 아니라 전통적인 왕정을 입헌군주제로 바꾸어 성립한 경우도 많다. 동학·천도교는 시종 근왕 정신으로 대일 항쟁을 벌여 당당한 근대 국민국가 국민의 모습을 보였다. 계급투쟁 사관으로는 읽어낼 수 없는 귀중한 역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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