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의 기억] 나그네의 귀가

2024. 9. 7.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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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그네, 전남 장성, 1977년 ⓒ 김녕만
하늘이 높아졌다. 구름과 바람도 한결 가벼워졌다. 여름과 가을이, 낮과 밤이 교차하는 어스름한 저녁에 봇짐을 지고 먼 곳으로 향하는 행상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본다. 박목월 시인의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라는 시를 떠올리며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그 나그네가 아주 멀리 하나의 점으로 사라질 때까지 한참을 지켜보았다. 부디 어둠이 짙게 깔리기 전에 “술 익는 마을”에 닿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예전에는 동네를 찾아다니며 물건을 파는 행상이 참 많았다. 일일이 장에 가기에는 너무 멀고 깊숙한 마을에 간간이 나타나는 행상은 반갑고 고마운 손님이었다. 커다란 봇짐에 생활용품을 지고 다니며 팔거나 칼을 갈아주고 농기구를 고쳐주는 아저씨들이 찾아오곤 했다. 손수레에 반쯤 말린 생선을 싣고 다니는 생선 장수, 옷가지를 팔러 다니는 행상도 있었는데 특히 어머니와 누이들에게 필요한 규방 용품을 파는 방물장수는 단연 인기였다. 방물장수가 마당에서 물 한 바가지로 목부터 축이고 마루 끝에 걸터앉아 물건을 펼치고 이야기보따리를 풀어헤치면 그 입담에 홀리지 않을 재간이 없었다. 물건을 팔기도 했지만 먼 동네 총각과 중매를 서는 일도 있었다.

그날이 그날인 심드렁한 마을에 외부인의 출현은 활기를 불어넣는다. 특히 명절을 앞두고 눈에 띄게 잦아지는 행상의 발길이 명절 분위기를 예열했던 것 같다. 한바탕 이런저런 사람들이 나타나 마을 공기를 들썩거려 놓은 후 타지에 떨어져 사는 자녀와 친지들이 선물꾸러미를 들고 하나, 둘 찾아오면서 비로소 즐거운 명절이 시작되었다. 지금 이 행상도 추석 명절을 앞두고 이 마을, 저 마을로 나그네 되어 떠돌다가 외줄기 길을 따라 집으로 돌아가는 길일까. 저 산 아래 동네까지 아직 갈 길이 멀어 보인다. 그러나 기다려주는 사람이 있다면 어두운 밤길이 대수인가. 곧 기다림은 기쁨으로 변할 테니 말이다.

사진가 김녕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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