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누군지 알지?"…애인 데리고 '불법 통과' 금수저 정체 [성수영의 그때 그 사람들]
혜원 신윤복(1758~?)
그림을 통해 들여다보는
조선시대 양반의 '맨얼굴'
“어, 형이야. 오늘도 좀 부탁해. 지나갈게.”
“아, 한두 번도 아니고…. 통금시간에 자꾸 이러시면 안 되지 말입니다.”
“미안하다니까 그래. 형이 또 다음에 술 한잔 살게.”
그림 속 18세기 조선 한양(서울) 길거리에서는 이런 실랑이가 벌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당시 한양에는 오후 8시부터 새벽 4시까지 통행금지령이 내려져 있었습니다. 이 시간대에 돌아다니다가 순라군(순찰하는 군인)에게 들키면 감옥에 갇히거나 곤장을 맞아야 했지요.
하지만 그림 속 갓을 쓴 양반은 이런 통행금지 따윈 개의치 않습니다. 털로 만든 방한용 토시, 앞에서 길을 안내하는 소년이 들고 있는 모피 풍차(방한용 모자)에서 볼 수 있듯이 돈깨나 있는 집안이거든요. 양반 옆에 있는 여인을 보세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허리에 손을 얹고 담배를 피우는 모습이 아주 여유롭습니다. 소년도 늘 있는 일이라는 듯 무심하게 뒤를 돌아보고 있습니다.
빨간 옷을 입은 순라군은 짜증이 난 표정으로 손가락으로 여인을 가리키며 양반을 질책하고 있습니다. “자꾸 이러면 안 된다, 다른 사람이 보면 큰일 난다”고 이야기하는 듯합니다. 반면 양반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슬쩍 갓을 내리며 양해를 구하고 있지요. 힘세고 돈 많은 사람이 법을 우습게 여기는 것은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나 벌어지는 일인 것 같습니다.
이 작품은 간송미술관이 소장 중인 신윤복의 혜원전신첩(국보)에 수록된 30개 그림 중 하나인 ‘야금모행’. 대구간송미술관에 전시된 이 그림을 보다가, 혜원 신윤복(1758~?)의 섬세한 표현과 재치, 그 속에 숨겨진 스토리에 새삼 감탄이 나왔습니다. 좀 더 많은 분이 이런 작품들을 보고 깊이 즐겼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지난주에 이어 한 번 더 간송미술관과 관련한 기사를 준비했습니다. 혜원전신첩을 중심으로, 신윤복의 삶과 작품 속 이야기를 풀어 봅니다.
신윤복은 누구인가
이런 그림을 그린 신윤복은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신윤복이 누구였는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간접적인 기록을 통해 전해지는 세 가지 정도의 유력한 설만 있을 뿐입니다. ①대대로 도화서(그림 그리는 일을 담당하던 관청)에서 일해온 화가 집안이었으며, 화가인 신한평(1726~?)의 아들이다. ②한때 도화서에서 일했는데 격이 낮고 속된 그림을 그려서 쫓겨났다. ③중인, 서얼 등과 어울려 놀며 떠돌아다녔다는 겁니다. 오늘은 이 세 가지 설에서부터 시작해 신윤복의 삶을 더듬어 보겠습니다.
일단 ①에 나오는 도화서. 도화서는 그림 그리는 일을 맡아서 하던 조선시대의 관청이었습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나라의 기록물을 관리하는 국가기록원과 비슷한 곳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곳에 소속된 ‘국가가 공인한 화가 공무원’을 부르는 이름이 화원(畵員)이었습니다. 이런 화원들은 나라의 중요한 사람들이나 여러 크고 작은 일에 관한 정보를 그림으로 그려서 남겼습니다. 대표적인 게 어진(왕의 얼굴)이나 왕족, 공신 등의 초상화였고요. 왕실의 제사를 비롯한 각종 공식 행사에서 누가 무슨 옷을 입고 어떻게 서야 하는지를 그리는 것도 중요한 임무였습니다.
당시 화원은 중인 계층에 속했는데, 대부분의 중인 집안은 대대로 정해진 직업에 종사했습니다. 아버지가 역관(외교관)이면 아들도 역관, 아버지가 의관(의사)이면 아들도 의관이 되는 식이었지요. 신윤복의 집안도 대대로 화원 집안이었다고 전해집니다. 특히 신윤복의 아버지인 신한평은 치밀하고 예쁜 그림을 잘 그리기로 유명한 특급 화원이었습니다.
하지만 신한평이 50대에 접어들 무렵 정조가 즉위하면서 그의 인생은 꼬이게 됩니다. 신한평이 그리는 예쁜 그림과 정조의 엄근진(엄숙·근엄·진지) 문화 취향은 완전히 상극이었거든요.
당시 조선 사회의 모습은 상업이 발달하고 경제가 발전하면서 급격히 변하고 있었습니다. 문화적으로도 청나라(중국)의 글과 그림 등이 수입되면서 여러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지요. 새로운 것들이 들어오면서 전반적으로 사회 분위기가 자유로워졌고, 유교를 기반으로 한 기존의 사회 질서도 약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변화를 막고 기존의 질서를 지키고 싶었던 정조는 문화 정책부터 바꿨습니다. 한국사를 배울 때 나오는 문체반정(文體反正)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정통 문화’와 글을 지키고 세속적인 글을 금지하는 정책이었지요.
정조는 글뿐만 아니라 그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정책을 펼쳤습니다. 정통 유교 정신을 강조하는 그림이나 책 그림은 권장했지만, 지나치게 화려하거나 도덕적으로 바람직하지 못한 내용은 가만두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일이 터졌습니다. 1788년(정조 12년) 정조가 신한평에게 책 그림(책가도)을 그리게 시켰는데, 그려온 그림의 화풍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궁중에서 쫓아내 귀양을 보낸 겁니다. 자세한 전후 상황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대대로 내려오는 화원 집안에는 날벼락 같은 일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왜 벌을 받아야 하는지, 귀양을 갈 정도로 큰 잘못을 했는지, 이런 식의 정책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지, 기존의 질서가 그렇게까지 해서 지킬 만큼 가치가 있는 것인지. 아버지와 함께 도화서에서 일하고 있었을 젊은 신윤복은 분명히 이런 상황을 납득할 수 없었을 겁니다. 아버지가 왕에게 제대로 ‘찍힌’ 만큼 ‘앞으로 열심히 일해봤자 소용없다’는 생각도 들었을 겁니다. ②방황을 거듭하던 신윤복은 결국 화원을 그만두게 됩니다. ③그리고 양반들과 중인들의 의뢰를 받아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상업 화가이자 자유로운 예술가로서 말입니다.
유쾌한 그림 속 ‘파티 피플’의 삶
앞서 언급했듯이 당시 정부와 관련된 영역의 예술은 정조 때문에 엄숙한 분위기였습니다. 하지만 민간에서는 상업 발달과 자유로워진 사회 분위기 덕분에 다양한 예술이 꽃피기 시작한 상황이었습니다. 신윤복은 돈 많은 양반이나 중인들과 친하게 지내며 그들의 의뢰를 받아 여러 그림을 그렸습니다. 대부분 상업의 발달 등 사회 변화에 잘 적응해 큰돈을 만지게 된 이들이었고, 돈을 펑펑 쓰는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신윤복은 요즘으로 치면 돈 많은 ‘파티 피플’들을 따라다니며 사진을 찍어주는 전속 사진사 역할에 비유할 수 있겠습니다.
신윤복은 관찰력과 통찰력이 뛰어나고, 놀기 좋아하며 천성이 유쾌한 사람이면서도, 마음속에는 양반들의 생활에 대한 은근한 비웃음도 품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지금부터 소개해 드릴 신윤복의 주요 작품을 보면 여러분도 당시 시대가 어땠는지, 신윤복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감을 잡으실 수 있을 겁니다.
‘주유청강’은 말하자면 양반들의 ‘선상 파티’ 장면입니다. 양반 집 아들들이 배를 띄워 기생들과 함께 놀고 있군요. 배에는 햇빛을 막아주는 볕가리개도 있고, 음악을 연주하는 악사도 있습니다. 분위기는 아주 좋아 보입니다. 왼쪽 아래에서는 턱을 괸 선비가 물에 손을 담근 기생을 아주 푹 빠져서 바라보고 있군요. 어깨를 감싸고 담뱃대를 물려주는 남녀의 모습도 볼만합니다.
주목할만한 건 볕가리개 아래에 있는 갓 쓴 양반. 세조대(허리띠)의 색이 흰색인데, 이는 상을 치르는 중이라는 걸 의미합니다. 즐거운 자리에 빠지기는 싫으니까 일단 뱃놀이에 따라 나오긴 했는데, 남들 보는 눈도 있고 양심에도 찔리니 엉거주춤하게 친구들 노는 걸 바라만 보고 있습니다. 그 모양이 우습습니다.
‘연소답청’에 나온 양반들의 모습은 더욱 재미있습니다. 양반 두 명과 기생 두 명이 함께 봄나들이를 나왔는데, 양반들이 자기 말에 각각 기생들을 태웠습니다. 거기까지는 그렇다 치는데, 왼쪽의 양반은 손을 내민 기생에게 담뱃대를 쥐여주기 위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오른쪽 양반은 한술 더 뜹니다. 자기 갓을 마부에게 넘긴 뒤 마부의 벙거지를 빼앗아 쓰고 말고삐를 잡았습니다. “오빠가 네 마부가 돼 줄게.” 뭐 이런 식의 ‘스윗’하고 느끼한 말을 하지 않았을까요. 뒤쪽에 따라가는 마부의 표정은 당연히 좋지 않습니다. 양반이 쓰는 갓을 쓸 수는 없으니 갓을 손에 들고, 다른 손에는 말채찍을 그대로 든 채 ‘이게 뭐 하는 짓인가’ 하는 표정으로 뒤를 따라가고 있습니다.
‘기방난투’는 유흥가에서 술에 취해 벌어진 싸움 장면을 그린 것입니다. 붉은 옷을 입은 남자는 유흥가를 관리하는 공무원인데, 이 상황에서는 경찰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선생님, 여기까지만 하세요.” “그래, 네가 참아.” 한 대 맞고 분해서 씩씩거리는 남자를 왼쪽에 있는 친구가 말리고 있네요. “한주먹거리도 안 되는 녀석이 까불고 있어. 또 덤벼 보란 말이야.” 웃통을 벗은 채 호기를 부리는 가운데 남자는 이렇게 말하는 듯합니다.
그 장면을 바라보는 기생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무덤덤한 표정으로 지켜보며 담배를 피우고 있군요. ‘또 싸우네.’ 수백 년이 흐른 지금도 이런 일은 밤마다 거리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신윤복이 사람들의 한심한 모습만 그린 건 아닙니다. ‘월하정인’은 달밤에 만나는 연인의 사랑을 그린 그림입니다. 통행금지 시간에 몰래 나온 남녀. 호롱불을 든 남성이 허리춤에서 뭘 꺼내고 있는데, 선물일까요 편지일까요? 사회 분위기가 어떻든 젊은 남녀의 사랑은 막을 수 없는 법입니다.
서로의 모습을 잘 볼 수 없는 밤중이지만, 그래도 여성은 한껏 멋을 냈군요. 자주색 깃 저고리, 풍성하게 연출한 남색 치마에 보라색 신이 포인트로 작용합니다. 이런 옷차림은 원래 기생들이 주로 하는 스타일이었는데, 그 유행이 상류층 여인들에게까지 널리 퍼졌다고 합니다. 이는 상당히 특이한 현상이었습니다. 그 전 조선 사회에서는 상류층 여인의 스타일을 천민인 기생들이 따라하는 게 보통이었거든요. 패션 리더로서의 주도권이 상류층에서 기생에게 넘어갔다는 것은 그만큼 사회 질서가 급격하게 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이런 현상을 한탄하는 선비들의 기록이 꽤 많이 남아있습니다. “세상이 어떻게 되려고 그러는지 원, 요즘 젊은 것들은 글러먹었어!”
‘쌍륙삼매’는 당시 유행하던 쌍륙이라는 놀이(보드게임)를 즐기는 모습을 그린 작품입니다. 게임판을 두고 양쪽에 앉은 남녀는 승부에 몰입한 모습입니다. 남성은 탕건(모자)까지 벗어 던지고 담뱃대를 입에 문 채 고민 중인데, 여성은 여유가 있어 보입니다. 판의 모양을 보면 이미 승부가 여성에게 기운 상황이라고 합니다. 가운데 여성은 마치 심판을 보듯 앉아 게임을 구경하고 있네요. 길 가던 남성도 게임에 푹 빠져서 판을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스님이 시주받기 위해, 즉 기부금을 받기 위해 길에서 북을 치는 ‘버스킹 공연’을 하고 있습니다. 왼쪽에 있는 남성 두 명은 절에서 일하는 노비로 추정됩니다. 오른쪽 아래에는 고깔을 쓴 스님이 ‘시주를 하면 복 받는다’는 내용의 글을 두 손으로 내밀며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고 있네요. 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억눌렀던(숭유억불) 조선시대, 스님들은 이렇게 길거리에서 시주를 받아야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림 제목은 ‘노상탁발’입니다.
스님들을 마주한 여인들은 그다지 달갑지 않은 눈치입니다. 하지만 모른 척 하기는 좀 그렇고, 양쪽이 바위로 막혀 있는 산길이니 다른 길로 돌아갈 수도 없습니다. 서로 눈치를 보던 중 가운데 여성이 돈을 꺼내고 있습니다. 그 모습을 북 치는 스님이 쳐다보고 있네요.
그래도 소위 ‘기도빨(기도발)’이 잘 먹히는 절에는 상당한 시주가 들어왔습니다. ‘문종심사’는 불공을 드리러 가는 여성이 주인공인 그림입니다. 절로 향하는 세 사람의 얼굴은 엄숙하게 굳어 있습니다. 마음이 불편한 모양이네요. 아마도 잘 안 풀리는 일을 해결하기 위해, 예컨대 아이를 낳게 해달라거나, 집안사람의 병이 낫게 해달라거나, 남편이 과거에 급제하게 해달라는 종류의 소원을 빌러 가고 있습니다. 뒤에 따라가는 여성은 시주할 물건을 붉은 보자기에 싸서 들고 가고 있습니다. 스님이 문 앞까지 마중을 나와 고개를 숙이며 이들을 맞이하고 있는데, 평소 시주를 많이 하는 집이었던 것 같습니다.
왜 이런 그림을 그렸을까
신윤복이 이처럼 독특하면서도 매력적인 작품들을 그린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이 나옵니다. 겉으로는 엄숙한 척하지만 실제로는 엉망진창인 양반들의 삶을 통해 유교 사회를 비판했다는 의견도 있고요. 반대로 인간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기 위해 당시 사람들이 살아가는 본연의 모습을 적나라하면서도 유머러스하게 드러냈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그 이유가 뭐가 됐든 신윤복은 똑똑하고 재미있는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의 화려한 작품 속에는 18세기 한양의 도시 풍경, 멋쟁이들이 입고 다니던 옷, 남녀의 사랑, 양반 사회의 부조리나 사회 상황에 대한 풍자들이 복잡하게 녹아 들어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인간이 만들어낸 각양각색의 스토리와 인간 본성에 대한 통찰이 있습니다. 덕분에 우리는 그의 작품을 보며 공식 문서에 기록되지 않았던 당시 조선 사람들의 실생활을 조금이나마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조선시대 사람들도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었고, 사람 사는 건 어느 시대 어느 장소나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도요.
이 귀중한 작품들을 볼 때 잊지 말아야 할 게 있습니다. 한때 일본으로 유출됐던 혜원전신첩을 지금 우리가 한국에서 볼 수 있는 건, 우리 문화재를 지키기 위해 사재를 털어 일본에서 유물을 거액에 사 온 간송 전형필(1906~1962) 덕분입니다. 지금 대구간송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전시에 오늘 소개해 드린 그림의 일부가 나와 있습니다. 기사에 나온 그림들의 화질은 조금 아쉬운 부분도 있지만, 실제로 보면 원하는 만큼 디테일을 들여다볼 수 있으니 한 번쯤 직접 보시기를 권합니다.
행복한 주말 보내세요.
**이번 기사는 여세동보(대구간송미술관 개관전 전시도록) 조선 미술관(탁현규 지음), 혜원 신윤복 연구(황효순 성신여대 박사논문) 등을 참조해 작성했습니다.
***별도의 소장처 표기가 없는 작품은 모두 간송미술관 소장품입니다. 다만 이번 대구간송미술관 전시에 이 작품들이 모두 나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출품작과 비출품작이 섞여 있으니 참고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때 그 사람들>은 미술과 고고학, 역사 등 과거 사람들이 남긴 흥미로운 것들에 대해 다루는 코너입니다. 토요일마다 연재합니다. 쉽고 재미있게 쓰겠습니다. 네이버 기자 페이지를 구독하시면 6만여명 독자가 선택한 연재 기사를 비롯해 재미있는 전시 소식과 미술시장 이야기를 놓치지 않고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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