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다리 아저씨가 몇이야···기업후원과 함께 커온 K골프

양준호 기자 사진 제공=KLPGA·KPGA 투어 2024. 9. 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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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OO 회장님께 감사”···선수들의 코멘트엔 이유가 있다
[서울경제]

혹자는 지난달 끝난 2024 파리 올림픽의 최고 스타로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을 꼽는다. 그도 그럴 것이 양궁 대표팀이 5개 전 종목 금메달이라는 최초 기록을 쓰면서 정 회장은 연일 미디어의 조명을 받았다. 현대차는 대한양궁협회의 오랜 회장사. 올림픽 때마다 전폭적인 지원이 주목을 받곤 했는데 이번에는 선수 개개인의 마음까지 살피는 정 회장의 세심한 리더십이 특히 주목 받았다. 기업 총수가 이렇게까지 좋은 이미지로 일반에 널리 각인되는 것도 드문 일이다.

더불어 삼성전자의 최신 스마트폰도 올림픽의 대표 승자 중 하나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는 메달 시상식 때 ‘셀카’ 촬영용 공식 휴대폰으로 삼성전자의 플립 형태 스마트폰을 지정했고 이 제품은 시상식 때마다 TV 등 중계 화면을 통해 전 세계에 노출됐다. 파리 올림픽은 스포츠 마케팅의 힘이 새삼 확인된 무대였다.

골프로 눈을 돌려보자. 스포츠 분야에서 기업의 후원 활동이 가장 활발한 곳 중 하나가 바로 국내 프로골프 투어 무대다. 선수들은 모자 하나에도 여러 개의 기업 로고를 단다. 톱 랭커는 이미 로고가 너무 많아 모자나 옷에 더는 패치를 붙일 공간이 남아있지 않을 정도다. 대회 후원도 마찬가지다. 선수들이 기량을 마음껏 펼치도록 판을 깔아주는 역할을 기업들이 하고 있다.

코오롱 한국오픈에서 두 차례 우승한 김민규.

대회가 있어야 선수가 있다

현대차는 1985년부터 한국 양궁을 후원하고 있다. 기간을 한정한 후원도 소중하지만 이렇게 지속적인 후원은 종목의 경쟁력 자체를 끌어올리는 역할을 한다.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투어에서 단일 기업이 가장 오래 개최하고 있는 대회는 하이트진로 챔피언십이다. 올해로 24회째. 2000년 하이트컵으로 시작했고 2002년 경기 여주의 블루헤런GC 인수 후에는 블루헤런을 고정 개최 코스로 사용하고 있다. 2009년부터는 메이저 대회로 승격돼 가을의 고전으로 자리 잡았다.

KPGA 투어 대회의 최장기 단일 스폰서는 신한금융그룹이다. 1981년 창설된 동해오픈의 타이틀 스폰서를 1989년부터 맡아 지금까지 30년이 훌쩍 넘는 세월 동안 신한동해오픈이라는 이름으로 대회를 개최해오고 있다.

KLPGA 투어 한화 클래식은 한화컵의 후신이다. 박세리의 연속 우승으로 유명한 1996년과 1997년에 한화컵 서울여자오픈을 열었던 한화는 2011년부터 다시 대회를 열어 10년 넘게 든든한 스폰서로 투어를 지키고 있다.

2006년 스타 투어 대회로 KLPGA 투어와 동행을 시작한 KB금융그룹은 KB금융 스타챔피언십으로 지금까지 명맥을 이어오고 있으며 NH투자증권 레이디스 챔피언십은 2008년(당시 우리투자증권 레이디스 챔피언십)부터 쭉 열리고 있다.

2008년 무렵 시작된 대회가 많다. 두산 매치플레이와 하이원리조트 여자오픈이 2008년 창설됐고 S-OIL은 2007년 타이틀 스폰서로 KLPGA 투어에 참여해 지금까지 S-OIL 챔피언십을 열고 있다. 2010년 러시앤캐시 대회로 시작한 OK금융그룹, 2013년 출발한 E1 채리티 오픈, 2014년 시작인 제주삼다수 마스터스 등도 10년 이상 전통을 자랑하고 있다.

골프의류업체 크리스에프앤씨는 타이틀 스폰서가 여러 번 바뀐 KLPGA 챔피언십을 2018년부터 맡아 안정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하나금융그룹은 KLPGA 투어 대회를 한 시즌 2개나 개최한다. 하나금융그룹 싱가포르 여자오픈과 하나금융그룹 챔피언십이다.

하나금융그룹 싱가포르 여자오픈에 출전한 아마추어 국가대표 오수민이 드라이버 샷을 하고 있다.

KPGA 투어에도 선수들에게 10년 이상 경쟁의 장을 마련해온 기업들이 많다. 한국여자오픈을 후원하는 DB그룹은 KPGA 투어 시즌 개막전의 붙박이 타이틀 스폰서다. 2014년부터 늘 시즌 개막전은 DB손해보험 프로미 오픈(동부화재 프로미 오픈 시절 포함)이다. 코오롱 한국오픈은 올해 벌써 66회째 대회를 치렀다. 1990년 공동 주최사로 참여한 코오롱은 1996년부터는 단독 타이틀 스폰서를 맡고 있다.

올해 최경주의 기적 같은 우승으로 화제가 된 SK텔레콤 오픈은 1997년부터 시작된 대회이고 데상트코리아 매치플레이는 2010년 먼싱웨어 챔피언십부터 시작됐다. DB그룹처럼 KB금융그룹과 하나금융그룹도 여자와 함께 남자 투어 대회도 개최하고 있다. KB금융 리브챔피언십과 하나은행 인비테이셔널이다. 현대차는 2017년부터 제네시스 챔피언십을 열고 있다. 시즌 성적을 포인트로 환산해 연말에 주는 KPGA 제네시스 대상은 선수들이 가장 받고 싶어하는 상이다.

어느 기업이 몇 승 올렸나

이번엔 선수 후원 쪽을 살펴보자. 먼저 KLPGA 투어. 2022년 8월 대회부터 최근 약 2년 간 대회의 우승자를 돌아봤다. 우승 당시 모자 앞면에 로고가 들어간 메인 스폰서가 기준이다.

총 67개 대회가 치러진 가운데 가장 많은 트로피를 가져간 메인 스폰서 기업은 한국토지신탁이다. 박현경과 박지영 투톱의 맹활약에 무려 10승을 챙겼다. NH투자증권과 KB금융그룹이 각각 8승으로 공동 2위다. NH투자증권은 박민지와 이가영, KB금융그룹은 이예원과 방신실을 앞세워 부지런히 트로피를 수집했다.

그다음으로는 건설사들의 약진이 두드러졌다. 동부건설과 안강건설이 5승씩을 챙겼고 요진건설도 4승으로 짭짤한 수확에 성공했다. 특히 안강건설은 건설사 도급 순위에서 100위 안에 들지 못하는 중소 건설사지만 임진희를 발굴하고 박보겸까지 우승자 대열에 합류하면서 회사 인지도 상승이라는 톡톡한 효과를 봤다.

롯데와 한화큐셀이 4승씩을 기록했고 삼천리는 3승을 수확했다. 하이트진로는 출전 정지 징계를 받은 윤이나와 계약을 해지하지 않고 기다려줬는데 복귀 후 우승이 터지면서 함박웃음을 지었다. SK텔레콤은 세 번의 준우승이 최고 성적인 김재희와 올 시즌 전 4년 계약을 했다. 메인 스폰서 계약은 2년이 보통인데 선수의 상품성과 가능성에 베팅한 것이다. 베팅은 적중했다. 김재희는 계약 후 첫 출전 대회에서 데뷔 첫 우승을 터뜨렸다. 생일에 이뤄낸 우승이라 더 뜻 깊었다.

건강기능식품 기업 프롬바이오의 선택도 결과적으로 혜안이었다. 지난 시즌 중반 영입한 배소현이 올 시즌 데뷔 7년 만에 첫 우승을 거뒀고 첫 승 뒤 석 달 만에 2승, 그리고 두 대회 만에 3승까지 달성하며 최고의 한 해를 맞았다.

KPGA 투어는 같은 기간 46개 대회를 치렀다. 김민규, 정찬민의 활약과 미국프로골프(PGA) 투어 스타 임성재의 국내 대회 우승을 더해 8승이나 거둔 CJ가 단연 돋보였다. 하나금융그룹과 대보건설이 각각 4승으로 그다음이다. 하나금융그룹은 한승수와 함정우, 박은신 등을 후원한다. 대보건설은 고군택이 4승 전부를 책임졌다. 서요섭과 문도엽을 앞세운 DB손해보험이 3승을 거뒀고 부동산 마케팅 회사 PNS홀딩스는 김영수가 2승을 올릴 때 그를 후원했다. 중견 건설사 금강주택도 허인회의 2승으로 적잖은 홍보 효과를 누렸다.

KPGA 제네시스 대상은 선수들이 가장 받고 싶어하는 상이다.

스폰서에 감사 인사 잊지 않는 이유

선수들은 우승 직후 방송 인터뷰나 공식 기자회견에서 ‘OOO 회장님께 감사 인사 드립니다’는 식의 코멘트를 꼭 한다. 시청자나 독자 입장에서는 ‘굳이 저렇게 해야 하나’ 싶을 때도 있겠지만 기업들의 물심양면 지원을 들여다보면 ‘회장님께 감사’가 꼭 기계적인 것만은 아님을 알 수 있다.

모두가 잘 알듯 골프는 돈이 많이 드는 운동이다. 웬만큼 부유한 가정이 아니고선 주변 후원 없이 꿈을 키우기가 쉽지 않다. 이때 기업들의 주니어 후원 프로그램이 큰 힘이 된다. 상당수 기업이 유망주들을 뽑아 직접 후원을 하거나 주니어 대회를 여는 방식으로 미래의 프로골퍼들을 지원하고 있다.

지난달 경기 용인의 88CC에서 끝난 덕신EPC배 전국주니어골프챔피언십은 데크플레이트(대형 철제 거푸집) 기업 덕신EPC가 8회째 개최한 어린이 대회다. 김명환 덕신EPC 회장은 각 부 우승자에게 200만 원의 상금에 더해 최대 1년간 월 100만 원씩의 장학금을 지급하기로 즉석에서 약속해 학부모들로부터 큰 환호와 박수를 받았다. 우승자는 1400만 원을 지원 받게 된 것이다. KLPGA 투어 장타 스타 윤이나도 어릴 적 이 기업으로부터 장학금을 받으며 꿈을 키웠다.

골프장의 지원도 선수 입장에서는 단비 같다. 88CC는 골프 유망주 육성과 사회 공헌의 일환으로 2010년부터 매년 장학생을 선발해 지원하고 있다. 올해는 보훈 대상자, 사회적 배려자, 유망주를 각각 뽑았으며 대상자는 모두 15명이다. 장학생들에게는 88CC 라운드 기회가 주어진다. 부지 내 연습장과 파3 코스도 이용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대다수 골프 꿈나무들이 라운드를 통한 실전 연습에 목 마른 상황임을 생각하면 88CC의 라운드 제공은 특별한 기회다.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의 최혜진, KLPGA 투어 박민지·방신실·이소영, KPGA 투어 김민규 등이 88CC에서 기량을 길러 스타 플레이어로 자리매김했다.

미국골프협회(USGA)와 R&A는 2022년부터 아마추어 선수의 스폰서 계약을 허용했다. 이른바 입도선매가 가능하게 된 것. 기업들은 점찍은 유망주가 프로가 되기까지 기다릴 것 없이 아마추어 때부터 계약하고 관리하기도 한다.

같은 후원사 선수끼리 팀을 이루는 구단 대항전이 유행이다.
하나금융그룹 소속의 한승수(왼쪽부터), 함정우, 박은신.

베네핏의 세계

직장인들 사이에 베네핏(benefit)은 말 그대로 애사심을 돋우는 혜택이나 특전을 뜻한다.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을 우선시하는 젊은 직장인들 사이에는 연봉 외 복지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 대기업이 제공하는 통 큰 혜택, 가족까지 챙기는 작은 회사의 배려 등 갖가지 사례들이 어깨를 으쓱하게 하거나 부러움을 부른다.

프로골프 투어에도 베네핏 문화가 있다. 모자에 후원 기업의 로고를 달고 소속 선수로 뛰는 게 일반적이라 선수들은 해당 기업으로부터 계약금(연봉)과 성적에 따른 인센티브, 그리고 베네핏을 제공 받는다. 물론 높은 계약금을 받는 게 최고지만 같은 조건이라면 베네핏이 후원사 선택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흔하지만 가장 유용한 베네핏은 라운드 제공이다. 골프장을 운영하는 기업들은 소속 선수들에게 연습 기회를 제공하기가 편하다. CJ(나인브릿지), SK텔레콤(핀크스), 롯데(롯데스카이힐), 한화큐셀(제이드팰리스·플라자), 하이트진로(블루헤런), 대보(서원밸리·서원힐스) 등이다.

한국토지신탁은 회사 소유 골프장은 없지만 대회가 열릴 코스들을 추려 라운드 예약을 잡고 비용을 부담한다. 신한금융그룹은 일본 투어를 뛰는 한국 선수들을 위해 일본 내 네트워크를 이용해 골프장을 섭외한다.

샷 연습만큼 중요한 것은 몸 관리. 한국토지신탁과 롯데, 메디힐 등이 트레이닝 비용을 부담한다. 특히 롯데는 아예 전담 트레이너를 고용하기도 한다. 이들이 시즌 내내 대회장을 돌며 경기 전후 선수들의 웜업과 근육 이완을 돕는다. 롯데는 연 1회 세브란스병원 프리미엄 건강 검진도 제공한다. 검진 결과는 트레이너들과 공유해 체계적인 몸 관리를 위한 자료로 활용한다. 대방건설과 메디힐은 각각 이대서울병원, 나누리병원과 제휴해 상시 부상관리 체계를 구축했다. 대방건설은 멘탈 코치도 붙여준다.

잊을만하면 보내주는 먹을거리 선물도 쏠쏠하다. CJ는 자사 한식 브랜드 비비고의 각종 제품을 몇 상자씩 분기에 한 번 꼴로 제공하고 롯데도 홍삼 제품, 음료 등을 정기적으로 선물한다. 노랑통닭은 선수 계약 때 100만 원 상당(50마리)의 치킨 상품권을 전달해 눈길을 끌었다. 주류 기업들은 정기적으로 프리미엄 소주 등을 증정하는데 특히 선수 부모님들이 좋아한다고 한다.

금융사들은 자사 프라이빗 뱅커(PB)를 통한 자산관리 서비스를 제공한다. 한·일 상금왕을 지낸 김경태는 신한금융그룹의 후원을 받는 동안 신한PWM 분당 센터의 10년 고객이었다. 한화는 자사 리조트·콘도 인근에서 열리는 대회 때 선수당 객실 1개를 제공하며 동아제약은 선수가 지정한 기부처에도 박카스 등 제품을 지원한다. NH투자증권은 명절이나 시즌 전후는 물론이고 수시로 농협 쌀과 한우 등을 선물한다.

성적에 따른 인센티브는 갈수록 진화한다. 업계 한 관계자는 “과거에는 우승하면 상금의 50%, 2~5위 성적에 30%, 6~10위에 20%를 인센티브로 지급하는 게 일반적이었지만 이제는 그런 기준이 희미해졌다. 계약금을 낮추는 대신 인센티브를 세게 걸거나 그 반대로 합의하는 등 유연한 계약이 많다”며 “기업과 선수에 따라 다르겠지만 KLPGA 투어 1승은 투자 대비 최소 수십 배의 홍보 효과를 보장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신문·방송 노출은 물론이고 요즘은 소셜미디어 노출에 따른 반응이 즉각적이라 브랜드 홍보·마케팅에 효과적”이라고 밝혔다.

[서울경제 골프먼슬리]

구름 갤러리는 선수와 후원 기업을 춤추게 한다.

◇최근 2년간 후원기업별 합작승수

KLPGA 투어

한국토지신탁 10승

NH투자증권·KB금융그룹 8승

동부건설·안강건설 5승

롯데·요진건설·한화큐셀 4승

프롬바이오·삼천리 3승

KPGA 투어

CJ 8승

하나금융그룹·대보건설 4승

DB손해보험 3승

금강주택·PNS홀딩스 2승

양준호 기자 사진 제공=KLPGA·KPGA 투어 miguel@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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