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영옥의 말과 글] [370] 매미와 귀뚜라미의 시간
8월 말, 미루었던 휴가를 다녀왔다. 여행 전, 저녁 산책을 하던 공원에서 아직 여름이 끝나지 않았다는 듯 자지러지던 매미 소리가 무색하게 어느새 낭창낭창한 귀뚜라미 소리가 들렸다. 문득 시절인연(時節因緣)이란 말이 떠올랐다. 이 말은 본래 불교 용어로 “모든 현상은 어떤 시기가 되면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는 뜻인데 최근에는 친구나 연인 관계에서 더 많이 쓰인다. 인연에도 생로병사와 유효 기간이 있다는 뜻이다.
사람이 살면서 판단하기 어려운 게 ‘때’를 아는 것이다. 특히 시작할 때와 물러날 때를 아는 건 더 힘들다. 바다에는 밀물과 썰물이 몰아치는 ‘물때’가 있다. 노련한 어부는 물때를 잘 파악해, 물이 들어올 때 바다로 나가고, 빠지기 전에 돌아온다. 지혜로운 농부 역시 계절에 부는 바람의 밀도로 씨를 뿌리고 거둬야 할 때를 안다. 높은 산을 오르는 등반가 역시 마찬가지다. 앞으로 나아가며 오를 때와, 물러서며 내려올 때를 알아차린다. 돌이켜보면 잘못된 결정으로 실패를 하는 경우보다 오히려 결정을 내려야 할 때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해서 불행해지는 경우도 많다. 삶은 이처럼 우리가 선택한 ‘찰나’의 총합이다.
여름 매미의 시간이 가을 귀뚜라미의 시간으로 바뀌는 건 인간이 어찌할 수 없다. 그저 그 시간을 묵묵히 살아내면 그뿐이다. 다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주어진 행복과 불행 사이에서 더 나은 사람으로 깊어지는 것이다. ‘아이다 미쓰오’의 시 ‘생명의 뿌리’에는 “눈물을 참고 슬픔을 견뎠을 때/ 입으로 말하지 않고 고통을 견뎠을 때/ 변명을 하지 않고 잠자코 비판을 견뎠을 때/ 분노를 삭이고 굴욕을 견뎠을 때/ 당신의 눈빛은 깊어지고/ 생명의 뿌리는 깊어진다”는 문장이 있다.
얼마 전, 세상을 떠난 김민기는 “고맙다, 할 만큼 다 했다”는 마지막 말을 남겼다. 박경리의 마지막 책 제목은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이다. 홀가분한 고마움! 두 거장의 유언 같은 마지막 말을 새기며 나아갈 때와 물러설 때를 계속 배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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