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주의 전염 막으려 이 남자 내세웠더니 더 끔찍한 일 터졌다…전쟁의 씨앗, 리더들의 망상 [Books]

김유태 기자(ink@mk.co.kr) 2024. 9. 6. 2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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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 이용하자” 英·佛 오판
나치 팽창·끔찍한 혈전 불러
‘러시아 기원은 우크라 키이우’
푸틴·수뇌부 뿌리깊은 신념
영토 침공하게 한 근본 원인
우크라이나군 소속 제43중포병여단이 최전방 격전지 중 하나인 바흐무트에서 자주포로 러시아군에 반격하고 있다. [로이터 = 연합뉴스]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은 전쟁의 포연 뒤에서 등장했다. 희뿌연 장막이 걷혔을 때 현대 세계의 실루엣이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인류사를 결정지을 가장 중요한 전쟁은 두 세기에 걸쳐 반복중이다. 하나는 20세기 ‘제2차 세계대전’, 또 다른 하나는 21세기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다.

그런데 여기서 질문. 인간은 왜 전쟁을 반복하는 걸까?

피와 화약이 버무려진 역사의 밭을 뒤엎어 ‘전쟁의 뿌리’를 매만지는 명저 두 권이 나란히 출간됐다. 조너선 해슬럼 케임브리지대 교수의 ‘전쟁의 유령’, 세르히 폴로히 하버드대 교수의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이다. 국경 너머의 분쟁은 인간의 오해와 망상 때문이었음을 그려낸 역사책이다. 각권 600페이지에 달하는 두 벽돌책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해부학적으로 두 개의 전쟁을 각각 절개(切開)한다.

전쟁의 유령 : 국제공산주의와 제2차 세계대전의 기원
먼저 책 ‘전쟁의 유령’부터. 이 책은 한 세기 전 유럽 자본주의 권력자들이 소름끼치도록 느낀 ‘공산주의 포비아’를 독자의 살갗에 이식하며 시작된다.

책의 시계추가 멈추는 시기는 1920년대. 직전인 1917년,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이 성공했다. 공산주의의 기세는 유럽과 아시아로 뻗어나갔다. 왜 그런가. 궁핍한 민중의 불만은 국경을 뛰어넘었고 박탈감을 해소할 대안으로서의 ‘혁명’은 수출되기 직전이었다.

그때 제1차 세계대전의 막대한 전후(戰後) 배상금 때문에 고통받았던 독일에도 ‘붉은 혁명’의 대의가 전파됐다. 독일을 회생 불가능하게 짓밟으려던 옆나라 영국와 프랑스는 몸을 떨며 생각했다.

‘만약 독일이 자국의 생사와 운명을 볼셰비즘(공산주의)에 걸기로 작심한다면, 경제적 공동체로서의 유럽은 산산조각날 것이 아닌가?’

저들의 눈엔, 공산주의보다 아돌프 히틀러라는 정치인이 일으킨 나치의 파시즘이 차라리 다루기가 수월했다. 나치는 ‘잠재적 위협’이었지만 공산주의는 ‘당장의 위협’으로 간주됐다. 파시즘을,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사이에 껴 있는 유일한 세력으로 여긴 그들은 이런 결론에 도달했다.

‘나치 파시즘은 하나의 방파제, 완충지대가 될 수 있다. 나치에 유화정책을 써서 공산주의 혁명의 전염을 저지하는 방향이 옳다.’

그러나 그건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오판이었다.

히틀러를 간과하고 과소평가했던 오해와 망상, 히틀러를 이용해 유럽 전역에 ‘붉은 혁명의 깃발’이 드리우는 사태를 막겠다던 믿음이 바로 이 책 제목처럼 ‘전쟁의 유령’이었다고 책은 쓴다. 나치 파시즘은 팽창했고 결국 유럽 전체를 숨막히도록 짓눌렀다. 공산주의를 유럽이란 공동 시스템을 무너뜨릴 ‘국제적 전염병’으로 파악하고, 되려 나치의 부상을 거들었던 잘못된 판단이 끔찍한 혈전을 잉태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 : 역사의 귀환
이어서 볼 책은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그를 따르는 러시아 수뇌부의 ‘뇌 속’에 뿌리박힌 신념으로 러·우 전쟁의 신화적 기원을 들여다보는 독특한 책이다.

저자에 따르면 러시아는 자신들의 기원이 ‘우크라이나 수도’인 키이우에 있다고 믿는다.

푸틴에게, 키이우는 ‘러시아 모든 도시들의 어머니’다. 10세기경의 키이우 지역은 ‘키이우 루스(Kyivan Rus)’라 불리는 중세 러시아의 중심도시였다. 10세기경 처음 형성됐다가 13세기경 몽골 침공으로 함락됐는데 러시아는 자신들의 종교, 문학, 예술, 법전의 기원이 바로 키이우 루스라고 믿는다.

키이우의 상속자인 러시아가 도시 키이우를 낀 우크라이나에 집착하는 건 당연한 수순이다. 우크라이나 시민들 역시 이 믿음에 근거해 “러시아 침공이 임박했다”는 서방세계 경고를 무시했다고 책은 서술한다. 러시아가 자신들을 상대로 ‘대규모’ 전쟁을 벌이지는 않으리라고 본 것이다.

하지만 러시아 엘리트들의 의식에 깊이 뿌리내린 ‘하나의 러시아’란 신화는 예상을 전복시켰다.

‘러시아에서의 민주주의 실패’와 ‘우크라이나에서의 민주주의 확립’이란 두 상황이 빚어낸 갈등상태인 러·우 전쟁의 승자는 과연 누가 될까. 승패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지만 러시아의 약점과 운명은 이미 노출됐다고 저자는 진단한다.

전쟁 발발로 유럽과 러시아 사이에는 정치적·경제적 ‘만리장성’이 세워졌고, 미국과 EU가 러시아산 석유와 가스 의존도를 낮춰갈수록 이 장벽은 높아질 게 분명하다는 이유에서다.

또 러시아는 중국과 동맹을 맺은 것처럼 보이지만 서방의 운전석엔 여전히 미국이, 동방의 운전석에 중국이 버티고 앉아 있으니, 러시아는 “원래 중국이 수행하던, 더 가난하고 더 무모한 동맹의 일원”으로 전락했다고도 본다.

반면, 우크라이나는 이미 어떤 의미에선 승자다. 우크라이나는 ‘제국 러시아’라는 우아한 신화에 균열을 내버렸다. 우크라이나는 새로운 영웅, 새로운 존재, 새로운 순교자를 만들어내면서 ‘신(新) 정체성 서사’를 구축 중이라고 책은 전한다.

‘전쟁의 유령’의 저자 조너선 해슬럼은 ‘역사란 무엇인가’로 우리에게도 익숙한 E. H. 카의 직계 제자로 ‘E. H. 카 평전’을 저술한 세계적인 역사학자이고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의 저자 세르히 플로히는 하버드대 우크라이나연구소장으로 재직 중이다. 원제 ‘The Spectre of War’, ‘The Russo-Ukrainian W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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