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일상의 차이는 무엇일까. 꼭 멀리 떠나지 않아도 문화를 누릴 수 있는 공간에서 시간을 보내며 평소에 느끼지 못했던 감각이 일깨워지는 순간, 일상은 여행이 되는 듯하다.
서울 종로구에 자리한 경복궁, 바로 옆 동네의 서촌에는 낭만적이고 감각적인 문화 공간이 많다. 고궁 돌담길을 따라 걷다 보면 자연스럽게 만나게 되는 서촌의 문화 예술 공간 세 곳을 소개한다.
1. 경복궁 뷰 보며 예술 서적 읽기, ‘보안책방’
감각적인 독립 서점과 편히 앉아 독서할 수 있는 북카페를 찾는다면, 두 가지를 한 번에 만족시키는 보안책방을 추천한다. 보안책방은 과거 보안여관을 개조한 복합문화예술공간 보안1942의 책방이다. 경복궁 영추문 건너편 붉은색 벽돌 건물 2층에 위치한다.
책방에 들어서자마자 탁 트인 통창 뷰가 눈에 들어온다. 커다란 창을 통해 보이는 영추문과 돌담길, 그리고 아름드리 은행나무가 마치 한 폭의 그림 같다. 어느 각도에서 봐도 아름다운 풍경을 볼 수 있는 ‘뷰 맛집’이다. 창가에 누워 낮잠을 자다가 인기척에 일어나 기지개를 켜는 책방지기 강아지 ‘연두’까지, 책방의 분위기는 나른하고 편안하다.
보안책방은 예술 서적 위주의 책을 전시하고 판매한다. 도록이나 독립 출판물, 외국작가의 책 등 대형 서점에서는 판매하지 않는 예술 책이 대부분이다. 보안책방 관계자는 “사지 않더라도 이곳에 와서 작품을 직접 접하는 것은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잘 알려지지 않은 국내 작가를 알리고자 책방 자체적으로 도록을 출판하기도 하고, 외국 출판물 시리즈를 전국에서 유일하게 판매하기도 한다. 이처럼 보안책방은 작가와 대중을 연결 짓는 플랫폼의 역할을 하고 있다.
예술 작품을 잘 전달하기 위해 고심한 흔적이 책방 곳곳에서 보인다. 예쁜 표지의 책들이 감각적으로 배치해 둘러보는 동안 반복적으로 손을 뻗어 책을 펼치게 만든다. 몇몇 책 옆에는 작은 메모지에 추천 이유를 적어 책에 대한 궁금증을 유발하기도 한다. 한국의 30대 여자 작가들이 추천하는 책들로 구성하거나 장르별로 배치하는 등 큐레이션을 잘해놔 익숙하지 않은 예술 서적도 잘 이해할 수 있다.
보안책방을 제대로 즐기기 위해서는 자리를 잡고 앉아야 한다. 서 있을 때와 앉아서 시간을 보내는 것은 천지 차이다. 공간이 널찍해 오고 가는 손님에 구애받지 않고 편안한 시간을 보낼 수 있다. 책방에서 판매하는 도록은 대부분 샘플 책이 있으니 자리로 가져와 마음껏 펼쳐보자. 창밖의 평화로운 경치와 도록 속 작품을 번갈아 보는 것만으로 마음에 여유가 차오른다.
책방의 좌석은 1층 카페 보안의 메뉴를 주문하면 이용할 수 있다. 커피를 비롯해 여러 음료를 판매한다. 차 전문집인만큼 차 메뉴를 추천한다. 그중에서도 캐모마일 오미자차는 캐모마일 티와 직접 만든 오미자청을 섞어 상쾌하면서도 달콤하다. 가을과 겨울에는 직접 우린 잎차가 잘 나간다고. 전문 제빵사가 직접 만드는 디저트도 별미다. 배가 출출하다면 닭가슴살 브리오슈 번을 꼭 먹어보길. 바삭한 빵에 잘게 찢은 닭가슴살과 홀그레인 머스터드 소스, 쪽파까지 올라가 풍미가 입안 가득 퍼진다.
보안책방은 옆 건물에 위치한 보안1942의 전시 공간과 연결된다. 오는 10월 6일까지 기획 전시 ‘오리너구리와 유니콘’을 무료로 진행하고 있다.
“둘러만 보고 가기보단 꼭 앉아서 시간을 보내보세요.”- 보안책방을 더욱 잘 즐기는 방법 by 직원
2. 일상을 예술로, 주택을 개조한 ‘대림미술관’
대림미술관은 서촌의 터줏대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오랜 시간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주말이면 전시를 보기 위해 줄 선 사람들로 늘 인산인해를 이룬다.
대림미술관은 찾아가는 길목부터 전시의 일부다. 화살표와 함께 ‘대림미술관’이라고 적힌 흰 벽 위로 초록색 나뭇잎이 흔들리는 모습에 방문객들은 발걸음을 멈추고 사진을 찍는다. 화살표를 따라 시선을 이동하면, 통의동 골목 고택 사이 대림미술관 건물이 등장한다.
티켓 부스가 특이하게 야외에 있는데, 입장권을 받아 들고 미술관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마당 같은 작은 정원을 지나쳐 가야 한다. 일반적인 미술관과는 달리 어딘가 친숙하다. 골목부터 마당까지, 미술관보단 친구 집에 놀러 온 기분이 든다.
실제로 대림미술관은 일반 주택을 개조해 만든 미술관이다. 건물을 허물지 않고 주택이 가진 특징을 그대로 살렸다. 방마다 크기가 제각각이고 한 공간에서도 층고가 다른 일반 가정집의 구조를 활용해 어디에도 없는 미술관이 탄생했다. 미술관 곳곳에 나 있는 창 너머로 보이는 주택가와 인왕산 풍경까지, 괜스레 격식을 차리게 되는 대형 미술관과는 달리 편안한 마음으로 전시를 관람할 수 있다.
사적 공간인 집을 미술관으로 만든 것처럼, 대림미술관은 ‘일상이 예술이 되는 미술관’이라는 비전을 지녔다. 예술에 관심이 없는 이들도 누구나 쉽게 이해하고 접할 수 있는 주제의 전시를 진행한다. 지난 4월까지 열렸던 미스치프: 신성한 건 없다(MSCHF: NOTHING IS SACRED)는 전 세계의 주목을 받는 아티스트 그룹 미스치프의 트렌디하고 재치 있는 작품들로 젊은 세대를 열광케 했다.
현재 대림미술관에서는 무료로 ‘낫띵 벗 어 ‘G’ 탱: 지드래곤의 예술과 아카이브(Nothing But a ‘G’ Thang: The Art & Archive of G-Dragon)‘를 관람할 수 있다. 디지털 경매 플랫폼 주피터(JOOPITER)와 지드래곤(G-Dragon)의 협업 프로젝트로, 이 기간 동안 지드래곤이 수집한 다양한 패션 아이템과 예술 작품을 전시한다. 지난 4일 열린 오프닝 파티에는 주피터의 설립자이자 세계적인 아티스트 퍼렐 윌리엄스(Pharrell Williams)와 지드래곤이 참석하기도 했다.
미리 다녀온 이 전시, 생각보다 괜찮다. 소장품 종목이 다양해 보는 재미가 있다. 지드래곤이 직접 리폼한 의상과 오브제, 무대에서 사용한 소품, 그의 브랜드 피스마이너스원의 신발은 명실상부한 패션 아이콘의 기개를 느낄 수 있다. 지드래곤이 직접 그린 그림도 여러 점 전시 중이다. 작은 캔버스부터 한 벽면을 가득 채우는 그림과 포스터는 그의 예술적 감각을 보여준다.
또한 그의 취향이 듬뿍 담긴 전 세계 예술가들의 작품까지 볼 수 있다. 특히 한국 장인 배명주의 자개 의자와 이탈리아 디자이너 조 콜롬보의 쨍한 분홍색 쿠션 의자가 나란히 놓인 대목이 흥미롭다.
지드래곤의 다채로운 예술관을 엿볼 수 있는 이 전시는 오는 7일까지 진행하며 사전 예약을 해야 한다. 기간이 짧다고 아쉬워 말자. 대림미술관에 따르면 현재 차기 전시를 준비 중이다.
“대림미술관은 창이 많아요. 가끔 작품에서 눈을 돌려 창밖을 보세요. 창을 통해 들어오는 빛과 창밖의 풍경까지 하나의 작품이 됩니다.”- 대림미술관을 더욱 잘 즐기는 방법 by 기자
3. 눈이 즐거운 리스닝 바? ‘뮤추얼사운드클럽’
서촌에는 해가 지고 난 뒤 문화 예술을 즐길 수 있는 공간도 있다. 하루를 낭만적으로 마무리할 수 있는 리스닝 바, 뮤추얼사운드클럽이다. 뮤추얼사운드클럽은 자하문로 대로변의 건물 3층에 자리 잡고 있다. 다소 평범해 보이는 철문을 열면 새로운 세계가 펼쳐진다.
‘이렇게나 다양한 것들로 가득 차 있는데 이토록 조화롭다니!’ 바의 첫인상은 감탄에 가까웠다. 빨간색, 파란색, 노란색 등 알록달록한 의자와 가구를 배치했고 벽에는 여러 모양의 거울과 조명, 포스터가 붙어있다. 따뜻하게 빛나는 호박빛 조명 덕분에 전체적인 분위기는 아늑하고 포근하다. 한쪽에 마련된 턴테이블, 디제잉 부스와 바이닐로 가득 찬 수납장이 리스닝 바임을 증명하고 있다.
뮤추얼사운드클럽의 가구와 조명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회사의 제품이거나, 어디 가서 쉽게 볼 수 없는 빈티지 제품이다. 외국까지 나가서 직접 공수해 오기도 하고, 꾸준히 가구를 교체할 만큼 인테리어에 ‘진심’이다.
예컨대 매장에 가장 많은 투명 의자도 최초의 투명 플라스틱 의자를 만든 회사의 제품이다. 70년대 빈티지 거울, 유명 영화에도 나온 조명, 전 세계에 3000장뿐인 데이비드 호크니(David Hockney)의 한정판 포스터까지, 뮤추얼사운드클럽은 복제품이 아닌 예술적 가치를 지닌 오브제로 가득하다.
사장님의 설명을 듣고 다시 매장을 둘러보니 갤러리처럼 느껴졌다. “살아가기에 바빠 다양한 문화 예술을 누리기 쉽지 않잖아요. 여기서는 시대적 가치가 있는 제품과 좋은 음악 등 다양한 문화를 쉽게 접하고 즐기셨으면 좋겠어요.” 누구나 문화생활을 향유하길 바라는 마음이 뮤추얼사운드클럽에 녹아있다. 덕분에 가구 전시나 해외에 가야 볼 수 있을 법한 가구들이 이곳에서는 사람들의 손을 타며 일상에 자연스레 스며든다.
각기 다른 시대, 다른 나라에서 온 소품처럼, 뮤추얼사운드클럽에 울리는 음악의 장르도 경계가 없다. 재즈, 올드팝, 인디팝 등 장르를 한정 짓지 않고 분위기에 따라 다양한 음악을 선곡한다. 확실한 것은 이 공간과 잘 어우러진다는 것. 취향을 저격해 몇 번이고 휴대전화를 켜 음악을 검색하게 될지 모른다.
뮤추얼사운드클럽의 또 다른 매력은 잔이다. 칵테일, 맥주, 위스키, 와인 등 다양한 주류와 논알콜 음료를 판매하는데, 그중 시그니처 칵테일을 주문하면 메뉴별로 특별한 디자인의 잔에 제공한다. 장미, 쿠키, 튤립 모양 등 독특하고 예쁜 디자인에 반해 잔을 보고 메뉴를 결정하는 손님도 많다고. 그중 직접 맛본 두 가지 추천 메뉴를 소개한다.
장미꽃 잔에 담겨 나온 잇츠 유얼스(It’s yours)는 딸기와 라임이 들어가 달콤하면서도 상큼하다. 특히 장미 모양의 얼음이 녹을수록 딸기 맛이 진해져 오랜 시간 즐길 수 있다. 분홍색 잔 속에 분홍색 곰돌이 얼음이 반신욕을 하고 있는 피치리보(Peachribo)는 복숭아향이 강해 알코올 맛이 거의 느껴지지 않아 가볍게 즐길 수 있다. 하리보 젤리가 가득 들어있어 씹는 재미도 있다.
“뮤추얼사운드클럽은 ‘서로 다른 음악과 사람들이 모이는 공간’이라는 뜻이에요.” 사장님의 말처럼 서로 다른 음악, 서로 다른 오브제, 서로 다른 사람들이 이곳에 모여 유일무이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해가 진 후에 방문하기. 뮤추얼사운드클럽의 조명이 더욱 빛을 발하거든요.”- 뮤추얼사운드클럽을 더욱 잘 즐기는 방법 by 사장님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실용적이지 않은 시를 왜 읽어야 하냐’는 학생들의 질문에 키팅은 말한다. “의학, 법률, 경제, 기술 따위는 삶을 유지하는 데 필요해. 하지만 시와 미, 낭만, 사랑은 삶의 목적인 거야.”
바쁜 일상이 버거울 때는 책과 예술, 음악과 낭만이 흐르는 서촌으로 떠나보면 어떨까. 문화 예술로 가득 찬 공간에 머무는 것만으로 삶이 풍요로워질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