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이 된 영화 속 과학] ①사지마비 환자, 진짜 걸었다...'업그레이드(2018)'

박정연 기자 2024. 9. 6.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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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업그레이드>의 한 장면. 등장한 뇌의 신호체계를 대체하는 첨단 컴퓨터 칩. 유튜브 캡처

[편집자주] 공상과학소설(SF) 영화에 등장하는 놀라운 첨단 과학기술은 관객들에게 흥미로운 볼거리를 제공합니다. 기술의 힘을 빌린 영화 속 주인공은 현실세계의 우리들보다 편리하고 윤택한 삶을 누리기도 하고 때때로 기술이 일으킨 예상치 못한 부작용으로 고뇌에 빠지기도 합니다. 눈부신 기술의 발전 속도는 이러한 영화 속 상황을 곧 현실로 이끌어냅니다. 상상의 세계에서만 존재하던 첨단 기술이 우리 삶에 들어오기까지 얼마나 남았는지, 이러한 기술들이 우리 삶을 바꾸는 과정에서 어떤 일들이 발생할 수 있을지 살펴봅니다.

2018년 개봉한 영화 <업그레이드>의 주인공은 별안간 습격을 받아 사지를 사용할 수 없게 된다. 팔과 다리를 움직이게 하기 위한 뇌의 신호 체계가 고장나버린 것이다. 실의에 빠져있는 주인공은 인공적으로 만든 최첨단 두뇌 시스템을 이식할 기회를 얻게 된다. 뇌와 사지의 고장난 연결 시스템을 인공지능(AI) 컴퓨터 칩으로 대체한 것이다. 이식 수술을 마친 주인공은 보통의 인간을 뛰어넘는 신체 능력을 갖게 된다. 일반적인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민첩하고 기계적인 움직임을 구사하는 주인공의 액션은 영화의 백미다.

<업그레이드>의 주인공처럼 사지를 사용하지 못하게 되는 사고는 우리 주변에서도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다. 뇌 기능이 저하돼 자신의 의지대로 사지를 움직일 수 없는 경우, 근육의 기능이 약화되며 원하는 대로 몸을 움직일 수 있는 경우 혹은 사고로 사지 자체를 잃게 되는 경우 등 다양하다. 어떠한 이유로든 사지를 사용하지 못하게 되면 일상생활에 치명적인 불편감을 겪게 된다.

사지를 사용할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한 첨단기술의 발전은 현재 진행형이다. 신체 일부를 잃게 된 사람들을 위한 정교한 의수·의족 기술의 발전도 눈부신 가운데 최근에는 뇌의 고장난 신호체계를 대체하는 기술들에도 관심이 모인다. 영화 <업그레이드>의 주인공에게 이식된 AI 컴퓨터 칩과 같이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는 뇌와 사지 신경의 신호전달체계를 완벽히 보완할 기술이 등장할 날도 머잖았다는 전망이다.

뇌와 척수 간 소통을 돕는 전자 장치 ‘BCI’를 장착한 사지마비 환자가 목발을 짚고 공원을 걷고 있다. Gilles Weber 제공

지난해 스위스 로잔연방공대 연구팀은 손상된 척수와 뇌의 소통을 회복시켜주는 장치 '위마진(WIMAGINE)'을 국제학술지 '네이처'에 발표했다. 이 장치는 뇌와 척수에 직접 연결한다. 이를 통해 뇌가 몸을 움직이도록 명령을 내리는 전기 신호가 척수에 잘 전달되도록 돕는다. AI 기술이 환자가 걷고 싶다고 생각할 때 뇌에서 생성되는 전기 신호를 구별하고, 전자기기에서 사용할 수 있는 신호로 변환하는 원리다.

위마진이 해독한 전기 신호는 척수에 연결된 신경 자극장치로 전달된다. 뇌에서 신호를 수신한 신경 자극기는 척수에 전기를 흘려보내 뇌가 지시한 움직임을 취하게 한다. 위마진과 신경 자극기로 구성된 뇌-컴퓨터 인터페이스(BCI)는 실제 사지마비 환자를 걸을 수 있게 했다.

자전거 사고로 척수를 다쳐 다리를 쓰지 못하게 된 40대 남성은 위마진과 신경자극기로 구성된 BCI를 장착한 뒤 건강한 사람과 다를 바 없이 자연스럽게 계단을 오르고 복잡한 지형을 건널 수 있었다. 1년간의 관찰 기간 동안 특별한 문제가 발견되지 않았다.

시각장애인이 계단을 걸어 내려가고 있는 모습. 게티이미지뱅크

사지가 아닌 신체부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기술도 발전하고 있다. 2019년 미국 로스엔젤레스 캘리포니아대 연구팀은 카메라가 달린 안경에 비친 영상을 뇌 시각피질에 이식한 전극에 직접 전달하는 시스템을 개발했다.

6명의 시각장애인 환자를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 환자들은 이 특수 안경을 착용하고 검은색 컴퓨터 모니터를 응시했다. 모니터 화면 곳곳에 무작위로 흰색 사각형이 보이도록 하고 환자들에게 흰색 사각형을 인식했는지 여부를 확인하도록 했다. 그 결과 실험 참가자 전원이 흰색 사각형을 정확하게 인식하는 데 성공했다. 뇌의 시각피질에 있는 뇌신경을 활용하는 이러한 시스템은 시력을 대체하는 일종의 '인공 눈' 개발로 이어질 단서를 제공했다는 평가다.

무선 착용형 뇌 자극 시스템을 착용한 실험용 쥐.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제공.

국내에서도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하는 신체를 치료하기 위한 기술 개발이 한창이다. 2018년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연구팀은 뇌졸중으로 다리에 편마비가 생긴 쥐의 소뇌를 초음파로 자극해 운동장애를 치료하는 데 성공했다. 국제학술지 '신경재활과 신경수리'에 실린 연구 결과에 따르면 이 기술은 사람이 들을 수 있는 영역대 이상의 고주파를 수 밀리미터(mm) 단위의 뇌의 작은 영역 안에 집중시켜 자극하는 방식이다.

이 초음파 자극 치료를 받은 쥐는 편마비에 의한 앞뒷다리 마비가 2주만에 정상 수준으로 회복됐다. 4주 동안 치료를 받은 쥐는 운동 능력이 향상되고 뇌부종이 감소하는 효과까지 본 것으로 나타났다.

이같은 첨단기술이 일상 생활에서 구현되기 위해선 지속적인 투자와 관심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KIST에서 이뤄진 쥐 실험은 이후 사람을 대상으로 한 임상시험이 추진됐지만 이를 위한 연구과제 기간이 도중에 종료되면서 결실을 맺지 못했다. 지난해 9월 종료된 연구 과제에선 당초 10명의 환자를 대상으로 임상시험을 진행하는 것이 목표였지만 2명의 환자에 대한 임상시험만이 이뤄졌다.

연구를 이끈 김형민 바이오닉스연구센터장은 "임상시험을 위한 환자 모집과 관련 허가를 받는 과정에서 시간이 많이 소요되는 어려움이 있었다"며 "현재 동물 모델을 통한 연구를 계속하고 있으며 향후 후속 연구를 위한 과제 수주를 위해 노력할 계획이다"고 전했다. 그는 다만 최근 이 기술에 주목한 산업체들이 뇌졸중 보다는 뇌전증 등의 질환에 관심을 갖고 있는 만큼 새 연구들의 주제도 다른 질환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덧붙였다.

신체를 보완하는 기술이 일상 생활에 자리잡기 위해선 기술 발전과 함께 환자의 정서를 살피는 연구가 병행돼야 한다는 목소리도 제기된다. 기술의 힘으로 잃어버린 신체기능을 회복한 선천적 장애인들의 경우 갑작스런 신체 능력의 향상으로 인지 부조화를 겪으며 심각한 우울감을 겪을 수 있기 때문이다.

20세기 중반 왕성하게 활동했던 영국의 신경심리학자인 리처드 그레고리는 선천적 시각장애인이 백내장 제거 수술을 받고 시력을 회복했지만 사물을 3차원적으로 인식하는 것에 어려움을 느끼다가 결국 사망한 사례를 보고해 학계의 관심을 받은 바 있다.

[박정연 기자 hess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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