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력평가원 한국사 교과서, 옛 국정 교과서 '베끼기' 정황 또 드러나
검정 신청 자격 조작, 교과서 표절 등 각종 의혹을 받고 있는 한국학력평가원(학력평가원)의 한국사 검정 교과서가 20여년 전 발행된 국정 교과서를 베낀 정황이 추가로 확인됐다. 최근 <한겨레> 보도로 처음 알려진 것보다 표절 분량이 더 늘어난 것이다. 앞서 뉴스타파가 보도한 유명출판사 교과서 표절 문제와 더불어 ‘졸속 출판’이라는 비판이 더욱 거세질 것으로 보인다.
국정 교과서 그대로 붙여넣기…졸속 출판의 정황
뉴스타파는 학력평가원 교과서가 7차 교육과정 국정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초판 발행 2002년)를 베낀 것으로 의심되는 대목을 추가로 확인했다. 학력평가원 한국사1 교과서에서 ▲조선 후기 세계관의 변화 ▲고려 시대 여성의 지위 ▲고려 시대 성리학이 수용된 과정을 설명한 부분이 국정 국사 교과서와 서술 순서, 문장 구성, 용어 사용이 일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취재팀은 이러한 검토·분석 과정에서 한국사 검정 교과서 집필 경험이 있는 경기 지역 고등학교 역사 교사 A씨의 도움을 받았다.
학력평가원 교과서는 조선 후기 국학 연구가 발달한 과정을 설명하면서 국정 국사 교과서의 문장을 그대로 옮겨온 정황이 보인다. 학력평가원 교과서는 “이익은 실증적이며 비판적인 역사 서술을 제시하고, 중국 중심의 역사관에서 벗어나 우리 역사를 체계화할 것을 주장하였다(95쪽)”고 썼다. 그런데 국정 국사 교과서에도 “이익은 실증적이며 비판적인 역사 서술을 제시하고, 중국 중심의 역사관에서 벗어나 우리 역사를 체계화할 것을 주장하였으며(304쪽)”라고 시작하는 거의 동일한 문장이 등장한다.
두 교과서 모두 해당 문장의 앞 문장에서 국학 연구가 발달했다는 사실을 설명하고, 뒷문장에서는 이익의 제자 안정복이 ‘동사강목’을 저술한 점을 정리하고 있다. 즉, 동일한 문장이 등장한 맥락까지 같은 것으로 확인된다.
또 학력평가원의 교과서는 고려 시대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높았다는 점을 서술하는 대목에서도 국정 교과서와 일부 단어와 표현만 바뀐 비슷한 문장이 나타났다. 학력평가원 교과서는 “부모의 유산은 골고루 분배되었다. 태어난 순서대로 호적에 기재하였고, 아들이 없어도 양자를 들이지 않고 딸이 제사를 지냈다(77~78쪽)”고 썼다. 그런데 국정 국사 교과서도 “부모의 유산은 자녀에게 골고루 분배되었으며, 태어난 차례대로 호적에 기재하여 남녀 차별을 하지 않았다. 아들이 없을 때에는 양자를 들이지 않고 딸이 제사를 지냈으며(207쪽)”라고 서술하고 있다. 이어서 “공을 세우면 그의 부모는 물론 장인과 장모도 함께 상을 받았다 … 여성의 재가도 비교적 자유로웠고, 재혼 후에 태어난 자손의 사회적 진출에도 차별을 두지 않았다”라는 학력평가원의 서술도 국정 국사 교과서와 비슷하다. 국정 국사 교과서에도 “공을 세운 사람의 부모는 물론, 장인과 장모도 함께 상을 받았다. 여성의 재가는 비교적 자유롭게 이루어졌고, 그 소생 자식의 사회적 진출에도 차별을 두지 않았다”고 적혀 있다.
학력평가원 교과서 91쪽을 보면 연속된 세 개 문단에서 고려에 성리학이 전해진 과정과 그 영향을 설명하고 있다. 이 문단들은 아래 표에서 비교한 것과 같이 국정 국사 교과서 273쪽의 문단을 최소한의 수정만 한 채 그대로 옮긴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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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력평가원 한국사1 | 7차 교육과정 국정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 |
91쪽 | 273쪽 |
중국 남송 시대에 주희가 집대성한 성리학은, 경전의 해석에 주력한 전통 유학과는 달리, 인간의 심성과 우주의 원리 문제를 철학적으로 탐구하는 신유학이었다. 고려의 성리학은 충렬왕 때 안향에 의해 처음 소개되었다. 백이정은 원에 가서 성리학을 연구하였고, 이제현은 원에 설립된 만권당에서 원의 학자들과 교류하면서 성리학에 대한 이해를 심화하였다. 이제현은 이색 등에게 영향을 주어 성리학 전파에 기여하였으며, 이색은 공민왕 때 정몽주ㆍ권근ㆍ정도전 등의 신진 사대부를 가르쳐 성리학을 더욱 확산시켰다. 신진 사대부들은 성리학을 현실 사회의 모순을 시정하기 위한 개혁 사상으로 받아들이면서 권문세족과 불교의 폐단을 비판하였다. 이후 성리학은 새로운 국가의 지도 이념으로 대두하였다. |
남송의 주희가 집대성한 성리학은 종래 자구의 해석에 힘쓰던 한⋅당의 훈고학이나 사장 중심의 유학과는 달리, 인간의 심성과 우주의 원리 문제를 철학적으로 탐구하는 신유학이었다. 고려에 성리학을 처음 소개한 사람은 충렬왕 때 안향이었다. 이제현은 원에 설립된 만권당에서 원의 학자들과 교류하면서 성리학에 대한 이해를 심화하였다. 그는 귀국한 후에 이색 등에게 영향을 주어 성리학 전파에 이바지하였다. 공민왕 때, 이색은 정몽주, 권근, 정도전 등을 가르쳐 성리학을 더욱 확산시켰다. 성리학을 수용한 사람은 대부분 신진 사대부였다. 이들은 현실 사회의 모순을 시정하기 위한 개혁 사상으로 성리학을 받아들였으며, 성리학의 형이상학적 측면보다 일상 생활과 관계되는 실천적 기능을 강조하였다. 따라서, 이들은 유교적인 생활 관습을 시행하고자 소학과 주자가례를 중시하고, 권문세족과 불교의 폐단을 비판하였다. 이후 고려의 불교는 쇠퇴하게 되었고, 성리학이 새로운 국가 사회의 지도 이념으로 등장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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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 채택 앞두고 논란·의혹만 커져…‘검정 부실’ 목소리도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이 지난달 30일 공개한 ‘2022 교육과정 고등학교 한국사 1, 2 검정 심사 결과 안내’ 자료를 보면 한국사 교과서 검정은 모두 26명의 심의위원이 참여해 지난해 12월부터 올해 8월까지 9개월간 실시됐다.
교육과정평가원은 “공정하고 엄정한 심사 과정을 수행”했다고 자평했다. 또 검정에 합격한 한국사 교과서들에 대해 “내용의 정확성 및 공정성 영역에서 사실, 개념, 이론, 용어 등을 정확하고 이해하기 쉽게 서술하였으며, 특정 지역, 종교, 인물 등에 대해 편향되지 않게 공정하게 기술”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학력평가원의 교과서는 공개 직후부터 친일·독재정권 서술을 축소하는 등 ‘우편향’ ‘뉴라이트’ 논란에 휩싸였고, 현재 방대한 분량의 표절 의혹까지 제기됐다.
교과서 합격본을 검토한 역사 교사들 사이에서는 교과서 검정 심의회의 심사가 부실했던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취재팀과 함께 교과서를 검토한 역사 교사 A씨는 “학력평가원 교과서 전시본을 읽어보면 학생들이 읽기에 불편한 비문이 섞인 문장과 표절하여 정돈된 문장이 교차한다”며 “그런데도 역사학자와 역사 교사들로 구성된 검정 심의회 위원들이 표절일 것이라는 의심을 하지 않은 것을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그는 또 “애초에 자격이 안 되는 교과서를 단호하게 불합격시켰다면 지금과 같은 사회적 논란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일선 고등학교들은 최근 학력평가원의 검정 합격본을 비롯해 한국사 1, 2 검정 교과서 9종의 전시본을 모두 받았다. 전시본을 검토한 뒤 다음달까지 교과서 채택해야 하고, 내년 3월 신학기부터 새 교과서로 수업을 하게 된다. 이를 앞두고 학력평가원이 교과서 검정 신청 요건인 출판 실적을 조작했던 사실이 드러나면서 교육부가 검정 합격 취소 등 제재 처분을 내릴지 주목되는 상황이다.
뉴스타파 홍우람 wooramhong@newstap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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