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우·러 전쟁에 휘말려 직접 비행기 회항해보니 [파일럿 Johan의 아라비안나이트]

2024. 9. 6.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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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느날처럼 평화로운 날이었다. 오늘의 비행은 아랍에미리트(UAE)에서 출발해 5시간30분 넘게 날아가서 러시아 수도 모스크바로 가서 하룻밤 쉬고 다시 돌아오는 스케줄이다.

비행기가 예정대로 잘 이륙을 마치고, 곧 순항고도인 3만5000피트에 이르고 나자 긴장이 풀어졌다. 오늘 비행에는 항공사에 입사한지 얼마되지 않아 모스크바에 처음 비행을 가는 모로코 출신의 승무원도 포함돼 있었다. 가서 본인은 붉은광장을 갈꺼고 캐비어를 기념품으로 사서 올꺼라는 등의 시시콜콜한 얘기를 들으면서 목적지로 가고 있었다.

그때였다. 러시아 관제(ATC)에서 갑자기 우리 항공기에 말을 걸어온 것. “지금 바로 xxxx 항로로 가서 그곳에서 홀딩(대기)하세요” , “네? 거기는 저희 원래 항로가 아닌데요? 확인 부탁드릴께요” , “맞습니다. xxxx 로 지금 바로 이동해서 홀딩하세요”

하늘 위에서 선회하면서 찍은 도시의 모습
“저희도 모릅니다”
항공기에 있어 홀딩은 조종사들에게 많은 스트레스를 준다. 보통 경제적 이유로 연료를 필요 이상으로 넉넉하게 싣고 가지 않는 이유가 많아 (비행기가 무거우면 그만큼 효율이 떨어짐), 무작정 상공에서 홀딩을 하면서 버틸 수 없기 때문이다.

계산을 해보니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약 15분, 이 때가 지나가면 무조건 근처 다른 공항으로 회항해야한다. ‘회항만큼은 가능하면 정말 하고 싶지 않은데...’ 승객도 싫지만 빨리 집에 가서 쉬고 싶은건 조종사도 마찬가지다.

이상한건 그때부터였다. “무슨 일인건지 말씀해주실수 있나요?” 왜 갑자기 관제에서 괜히 잘 가고 있던 우리를 낯선 곳에서 빙빙 돌라고 시켰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자 관제에서 대답했다.

“아....모스크바 공항이 지금 폐쇄됐습니다. 조금만 더 기다려 주세요.”

그 말을 듣자마자 불현듯 우크라이나와 러시아간의 전쟁이 떠올랐다. 갑작스러운 공항 폐쇄를 보아하니 분명히 뭔가 있는 것 같은데, 확실히 얘기를 안해주니 추측할 수 밖에 없다. 그건 그렇고 이제 정말 시간이 없다. 그대로 가야 할지, 회항을 해야할지 최종 선택의 시간이 다가왔다.

“저희 연료가 없습니다. 지금 모스크바 공항 못가면 바로 회항해야 합니다. 아직도 닫혀 있나요?언제쯤 여나요?”

“아직 닫혀있고, 언제 오픈할지는 저희도 모릅니다.”

그 말을 듣자마자 나하고 기장하고 서로 쳐다보고 끄덕였다. 회항하자는 뜻이다. “그러면 회항하겠습니다. 레이다 좌표 찍어 주세요” 그 뒤로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되어 미리 체크해놓은 대체 공항으로 가서 랜딩을 했다. 모스크바에서 동쪽으로 1시간정도 떨어진 니즈니 노보그라드(Nizhny Novgorod) 공항이었다.

모스크바 공항이 폐쇄되면서 동쪽으로 1시간정도 떨어진 니즈니 노보그라드(Nizhny Novgorod) 공항으로 저녁 늦게 회항했다.
결정의 시간이 다가오고
회항을 하긴 했지만 이제 본편이 시작이다. 이게 날씨가 좋지 않아서 회항을 한게 아닌, 불상의 이유로 인해 해당 목적지 공항이 폐쇄된 것이라서 언제 다시 연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방법이 없다. 계속 무작정 기다리는 수밖에. 비행기 안에서 다같이 승객이랑 승무원이랑 그냥 셀프감금해야 하는 상황이다.

이유는 금방 밝혀졌다. 조종석에 앉아 현지 뉴스를 찾아보니 이날 우크라이나가 드론 수십대를 동원해 모스크바를 공격했다고 한다. 원래 드론은 공항 인근에서 조종을 못한다. 민항기에 부딪치기라도 하면 엄청난 대형사고가 벌어지기 때문이다. 그냥 드론도 이렇게 위험한데 군사용 드론이 모스크바에 수십 대가 떴다고 하니 공항을 바로 폐쇄한 것이다. 당연한 결정이다.

우크라이나가 최소 26대의 드론을 이용해 모스크바를 공격했다는 뉴스 / 사진=AFP 캡처
단지 운이 없는건 하필 이게 내가 비행한 날 그 시간대에 일어난 것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우리가 착륙하려고 하기 전 1시간전까지만 해도 모스크바 공항이 열려 있었다고 한다. 막 우리가 접근 절차를 밟으려고 할 때 대규모 공습이 이뤄졌고 공항이 폐쇄됐다는 것.

그런데 조종사에게는 ‘듀티 타임(Duty Time)’이란게 있다. 쉽게 말해 비행할 때 일을 몇시간 동안만 할 수 있다는 규제인데, 이게 없으면 건강과 집중력 문제로 안전문제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듀티타임을 초과하면 내가 아무리 비행을 하고 싶어도 비행을 못하고 쉬어야 한다. 무시하고 그냥 조종간을 잡으면 나중에 처벌 받고 감옥에 갈 수도 있다.

이것을 설명한 이유는 지금 수백명의 승객과 함께 다른 낯선공항에 회항을 했는데, 예정대로 모스크바로 다시 가려면 이 듀티타임이 끝나기 전에 떠나야 하기 때문이다. 계산을 해보니 대략 남은 듀티타임은 6시간 정도. 다시 이륙하고 비행하는 시간을 생각하면 적어도 4시간30분 이내에는 이곳을 벗어나야만 한다.

“우리가 컨트롤 할 수준을 벗어났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날 우리는 듀티타임을 초과했다. 그리고 모스크바 공항 재 오픈과는 상관없이 비행기를 운전할 파일럿들이 더 이상 조종을 못하는 상황이 됐기 때문에 수백명의 승객들 역시 같이 낯선 도시에 머물게 됐다.

지상에서 대기했던 4시간30분동안 어떻게든 좁은 기내에서 갇혀 있는 승객들이 불편하지 않게 기내 승무원들이 참 많은 수고를 했다. 사무장 권한으로 비행기에 있는 기내식들도 무료로 다 풀고 음료 같은 것도 다 나눠줬다. 나도 승객들이 지루할까봐 원하는 사람들 조종실로 불러 사진도 찍어주고 셀카도 같이 찍었다. 특히 어린이들이 많이 좋아해서 뿌듯했다.

지상에서 밤새 대기하는 동안 맞이한 일출.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힘든 상황이었다.
듀티타임이 초과되는 마지막 순간까지 정말 어떻게든 다시 출발하고 싶어서 여러번 관제에 확인도 해보고 소통도 해봤는데 끝까지 모스크바 공항은 열리지 않았다. 처음부터 푸틴과 젤렌스키 말고는 이 사태를 예측하지 못했을 것이다.

기장이 기내방송(PA)을 통해 마지막으로 승객에게 알렸다. “승객여러분, 불편한 와중에 잘 견뎌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희도 노력해봤지만 이제 저희가 컨트롤 할 수 있는 수준을 벗어났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제 다들 비행기에서 내리셔야 할 듯 합니다. 저희 직원이 안내 하고 호텔로 모셔드릴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이해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안전이 최고
그 뒤 승객들 다 내리고 무사한것까지 다 확인하고 우리가 가장 마지막에 비행기 문을 닫고 나왔다. 밤새 하나도 못자고 15시간 넘게 뜬 눈으로 지새우며 일을 하니 아주 죽을맛이었지만 그래도 아무 인명피해 없이 잘 마무리가 되어서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만약 거의 모스크바 공항에 다 진입했는데 그때 드론이 뜨고 혹여나 사고라도 났으면 어쩔 뻔했을까. 꼭 우리가 아니라도 다른 민항기들도 엄청 많은데 그 중 하나만 부딪쳐도 대형참사였다. 이런걸 보면 안전이 역시 최고다.

전쟁이란게 이렇게 실생활에 영향을 준다는 것, 그리고 그게 내 일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이었다. 남의 일이라고 모르는 체 하지 말고 항상 안전조심하는 자세로 귀를 열고 최선을 다해 살아야겠다.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이 하루빨리 종식되길 기원한다.

맨 오른쪽 필자를 포함해 이날 고생한 크루들이 다들 초췌하지만 무사히 잘 마무리한 기념으로 사진을 찍었다. 전쟁이 하루빨리 종식되길 기원한다.
[원요환 UAE항공사 파일럿 (前매일경제 기자)]

john.won320@gmail.com

아랍 항공 전문가와 함께 중동으로 떠나시죠! 매일경제 기자출신으로 현재 중동 외항사 파일럿으로 일하고 있는 필자가 복잡하고 생소한 중동지역을 생생하고 쉽게 읽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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