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에게 ‘채찍’을 쓰는 건 학대일까? 승마에 대한 오해 [김지나의 그런데 말(馬)입니다]

김지나 아마추어 승마선수 2024. 9. 6.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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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5종’서 승마 제외…2020 도쿄올림픽 ‘학대 논란’ 영향
‘채찍’은 체벌보단 격려 의미 커…말-기승자 교감은 필수

(시사저널=김지나 아마추어 승마선수)

지난 2020 도쿄올림픽 근대5종 경기 당시 아니카 슐로이 선수와 세인트보이. ⓒhorse-canada.com

2024년 파리올림픽은 '근대 5종' 경기에서 승마를 볼 수 있는 마지막 올림픽이었다.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서부터는 승마 대신 장애물 경기가 포함될 예정이다. 선수 본인의 말이 아닌 무작위로 배정된 말을 타고 시합을 펼쳐야 하는 근대 5종 승마 경기의 규칙이 문제가 됐기 때문이다. 공정하지 못하다는 비판과 함께, 짧은 시간 내에 낯선 말과 호흡을 맞추는 과정에서 동물학대의 여지도 도마에 올랐다. 이 오랜 논란의 종지부를 찍은 것이 지난 도쿄 올림픽에서 있었던 '아니카 슐로이와 세인트보이' 사건이었다.

근대 5종 경기 중반까지 1위를 달리고 있던 아니카 슐로이 선수가 승마 종목에서 배정받은 말 '세인트보이'를 잘 다루지 못해 장애물 거부를 겪고 0점 처리가 됐던 해프닝이다. 선수는 대성통곡하고 말은 귀를 한껏 뒤로 젖히며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세계 정상 선수들이 모이는 올림픽에서 꽤나 보기 드문 장면이었다. 경기 운용방식에 대해서도 말이 많았을 뿐더러, 말이 스트레스를 받고 힘들어하는 모습에 많은 동물 애호가들이 거센 비난을 쏟아냈다.

근대5종은 주로 군인들에게 요구되는 전투기술들로 구성한 것이 시작이었다. ⓒwww.westpointaog.org

분풀이인지 격려인지, 말은 알고 있다

근대 5종은 1912년부터 채택된 종목으로 고대 올림픽에서 열렸던 5종 경기(pentathlon)를 상징적으로 계승한다. 사격, 수영, 펜싱, 승마, 그리고 크로스컨트리 달리기로 구성한 것은 근대 올림픽 창시자인 쿠베르탱 남작의 아이디어였다고 알려져 있다. 주로 군대에서 전투를 위해 훈련하던 기술들이었기에 초기에는 군인들이 이 경기에 많이 참여했다고 한다. 쿠베르탱에게 '스포츠맨'이란 곧 남성이자 군인과 동의어였다.

근대 5종 승마 경기에서 선수에게 말을 무작위로 배정하는 규칙도 이 때문이었다. 유능한 군인은 주어진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어떤 상황에서 무슨 말이든 타낼 수 있어야 했다. 꽤나 흥미로운 유래지만 이제는 시대착오적이란 비난을 감수할 수밖에 없는 배경이다.

익숙하지 않은 말과 빠른 시간 내에 호흡을 맞춰야 하는 상황에서는 당연히 채찍과 박차를 활용하게 된다. 순간적인 결과를 내기 위해 그만큼 효율적인 도구도 없다.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근대 5종 승마 경기가 최근 들어 더 큰 논란이 된 이유도 이 채찍과 박차 사용에 대한 인식이 달라져서다. 근대 5종이 아닌 일반 승마 경기에서는 선수가 채찍질을 연달아서 3번 이상 하면 징계를 받고, 과도한 박차 사용으로 말 옆구리에서 피가 나면 바로 실권이다.

보통은 채찍을 '체벌 도구'라고만 생각한다. 하지만 승마에서 채찍은 그보다 훨씬 다양한 의미를 가진다. 혼내는 목적으로도 사용되지만 말을 격려하거나 자신감을 북돋는 뜻이 되기도 한다. 특히 장애물 경기에서 채찍질은 전자보다 후자의 의미를 갖는 경우가 훨씬 많다. 겁이 많은 동물인 말은 장애물을 맞닥뜨리면 무서워서 피하거나 멈춰 서려는 본능이 있다. 그럴 때 채찍질은 "괜찮아, 할 수 있어"란 기승자의 격려다. 물론 채찍을 사용하는 사람이 그런 마음가짐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화가 나서 분풀이를 하려고 한다면 말에게도 그 감정이 고스란히 전달된다. 말과 기승자가 서로 단단히 연결되어 있어야만 비로소 채찍은 체벌이 아닌 '응원의 사인'이 되는 것이다.

말은 기승자의 도움과 격려를 받아 두려워하는 장애물을 뛰어넘고 자신감을 배운다. ⓒ김지나

말에게도 '자신감'을 배우는 과정이 필요하다

말도 '자신감'이란 감정을 배운다. 처음에는 장애물 앞에서 의기소침하고 주춤거리던 녀석이 기승자의 격려와 도움을 받아 몇 번 뛰어넘기를 성공하고 나면, 나중에는 스스로 의지를 가지고 자신 있게 장애물을 향해 달리는 기운을 느낄 수 있다. 미국의 급진 동물권 단체 피타(PETA, People for the Ethical Treatment of Animals)는 스포츠로서 승마를 '동물 착취'라 주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말에게 채찍을 사용한다고 해서 무조건 체벌이나 학대로 간주해버리는 것은 승마를 제대로 해보지 않은 사람들의 편협한 시각에 불과하다.

100년 이상 시간이 흐르며 올림픽 스포츠를 바라보는 시각도 변했다. 근대 5종에서 승마가 사라지게 된 것은 시대 변화에 따른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는지도 모른다. 선수 본인의 말을 데려올 수 있게 하거나 배정된 말을 파악할 수 있는 시간을 더 늘리는 대안도 있었을 테다. 그럼에도 승마를 아예 배제하게 된 결과가 심히 아쉽다. 그만큼 어려운 종목이자, 현대 스포츠인이 극복해야 하는 큰 도전과제란 의미인지도 모른다. 어찌됐든 '동물권 논리'에 승마란 스포츠 자체를 부정할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이것이 승마에 대한 오해로 이어지지는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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