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사니즘’이 중요하지 조상님 韓日국적 따져서 뭐하나 [핫이슈]
우크라이나 전장(戰場) 중 하나인 서부 도시 르비우는 1차 세계대전 때까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속해 ‘렘베르크’로 불렸다. 종전 후에는 독립한 폴란드 지배를 받아 ‘르워프’가 됐다. 이후 2차 세계대전 발발로 폴란드를 침공한 독일 통치 하에 놓였다가 잠시 소련에 양도됐고, 1941년 독소 전쟁으로 나치가 다시 차지했다. 2차 대전이 끝나자 이 도시는 우크라이나공화국에 포함돼 소련이 됐지만 1991년 소련 붕괴로 독립국 우크라이나 영토가 됐다. 이로 인해 20세기 초반 르비우에서 태어난 사람은 세계사 격변에 따라 5개 국적을 가졌다. 지금 우크라이나 사람에게 20세기 그곳에 살았던 조상의 국적을 물어본다면 역사 공부가 제대로 안 된 사람은 답변하기 힘들다. 특정 시기에 어느 나라가 통치했는지 헷갈리기 때문이다.
민족과 민족정신은 계승되더라도 국적은 이처럼 달라진다. 국가의 3대 요소인 국민·영토·주권이 없으면 나라가 성립되지 않는다. 현재 르비우에는 우크라이나 주권이 미치고 있지만 과거에는 국민(민족)과 영토가 설령 있었더라도 이들을 통치할 주권이 없었다. 국적은 국가적 실체에서 나오는 것이다. ‘우크라이나’라는 나라 자체가 옛 세계 지도에 없었는데 지금 와서 그 때 우리 조상의 국적이 우크라이나였다고 한다면 어불성설이다. 그냥 ‘국뽕’에 취해 자기 객관화를 못한 것으로 읽힌다.
여기에다 세계 각국의 ‘국가승인’까지 합쳐져야 국가를 이루는 4대 요소가 완성된다. 3개 요건을 갖춰 주권국이라고 떠들어도 각국 승인을 받지 못하면 세계 무대에서 활동할 수 없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불법 점령해 편입시킨 동부 도네츠크와 루한스크공화국이 대표적이다. 국민·영토·주권이 있다고 쳐도 러시아나 북한 등 소수 나라를 빼고는 국가승인을 해주지 않아 국제법상 정식 국가가 아니다.
소련 이전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 때 우크라이나인들은 있었지만 그들은 로마노프 왕조의 신민에 불과했다. 당시 근대적 국적 개념이 없었을지라도 우크라이나 사람들한테 그들 조상의 국적을 묻는다면 현재 전쟁중인 러시아가 아무리 밉더라도 ‘우크라이나’라고 답하진 못할 것이다. 그때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이 독립과 자치를 얻고자 투쟁을 벌인 것도 나라가 없었기 때문이다.
1910년 한일합방(경술국치)이 무효라는 것은 해방 후 국권을 회복하고 일본과 배상을 논하면서 나온 것이다. 타국에 대한 침략 금지 원칙이 유엔 헌장 등을 통해 국제사회에 정착되면서 일제의 행위가 사후적으로 무효화됐을 뿐이다. 대법원도 2018년 한일합병조약이 원천 무효라는 취지의 판결을 내렸다. 그렇다고 해도 일제의 통치 사실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때 조상들이 우리 국적을 갖고 조선 임금의 보호를 받으며 살았다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수치스러운 역사지만 당시 일본 국적자로 삶을 연명해간 것을 부인할 순 없다.
일제 때 국적을 한국이라고 외치면 애국자라도 되는 냥 목소리를 높이는 정치인들의 모습이 가관이다. 불행했던 조상들께 대한민국 국적을 뒤늦게라도 부여하면 후손 입장에서 마음이 편해지는 것인가. 한 민주당 의원이 김 장관한테 “(본인도) 일본 국적 하세요”라며 비약 가득찬 훈계를 내놓는 모습은 어처구니가 없다. 과거 김 장관이 “위안부는 매춘부였다”는 등 왜곡된 발언을 일삼은 <반일 종족주의>의 저자 이영훈 전 교수를 옹호하거나, 2019년 일본의 수출 규제 때 “친북 대신 친일하자”는 발언에 동의하지 않는다. 친일 해야 한다는 말이 어떤 맥락에서 나왔는지 이해는 가지만 국민 감정상 표현에 문제가 있다. 반면 일본 국적 얘기는 명확하다.
김병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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