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소녀 ‘기적’에 가려진 선구적 ‘여성 개혁가’의 삶[북리뷰]

2024. 9. 6. 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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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렌 켈러
맥스 월리스 지음│장상미 옮김│아르테
세 가지 장애 극복한 헬렌 켈러
진정한 삶은 기적 이후에 시작
인종차별반대·女참정권 주장 등
주목받지 못했던 사회활동 조명
맥스 월리스의 ‘헬렌 켈러’는 장애의 어려움을 극복한 인간이 아닌 여성 해방의 기수이자 반전 평화운동가, 인권 활동가였던 그녀의 진짜 초상을 그린다. 위키피디아

한 인간을 온전히 안다는 건 어려운 일이다. 헬렌 켈러 같은 유명인도 마찬가지다. 서점엔 이미 그녀를 다룬 책이 수십 권이다. 어린이 그림책에서 자서전, 평전에 이르기까지 종류도 다양하다. 많은 책은 켈러를 시각장애와 청각장애, 언어장애라는 삼중의 어려움을 극복한 인간 기적의 상징으로 다룬다.

그러나 모든 기적은 삶을 위한 것이다. 앤 설리번과 함께 언어를 익혀 세상을 배우고, 타인과 소통하는 법을 배운 일곱 살 소녀는 1968년 여든여덟 살에 세상을 뜰 때까지 수십 년 동안 정열적으로 삶을 이어갔다. 아무도 어린 시절로만 인생을 말하지 않는다. 그녀의 진정한 삶, 사회적 삶은 ‘기적’ 이후에 시작됐다. 그 기나긴 시간에 우리가 알아야 할 켈러가 있다. 여성 해방의 기수이자 반전 평화운동가였고, 인권 활동가이자 사회주의 정치 투사였으며, 여행을 좋아하고 영화를 사랑했던 평범한 시민이었던 그녀의 진짜 초상이 있다.

맥스 월리스의 ‘헬렌 켈러’는 ‘좌파 잔 다르크’라고 불렸던 켈러의 다른 삶에 집중한다. 원서 제목은 ‘After the Miracle(기적 이후)’. 캐나다의 역사가이자 장애인 인권 활동가답게 저자는 켈러의 정치 여정과 사회 활동, 정의와 평화를 향한 열정과 헌신을 중심으로 켈러의 삶을 고쳐 쓴다.

시각·청각·언어장애라는 삼중고를 겪었던 어린 시절의 헬렌 켈러. 게티이미지뱅크

저자는 한 흑인 민권 운동가가 보내온 편지 한 장으로 600쪽에 가까운 긴 평전의 서막을 연다. 편지는 남아프리카공화국 반체제인사를 위한 모금 활동에 그녀가 나서 달라고 청하는 내용이었다. 그들은 아파르트헤이트에 맞서다 사형될 위기에 처해 있었다. 넬슨 만델라도 그중 하나였다. 매카시즘 광풍이 몰아치는 1950년대 말 미국에서 반공법 위반으로 기소된 그들을 위해 나서는 건 꽤 위험한 일이었다. 미국 장애인협회도 강하게 그녀를 압박해 왔다. 그러나 켈러는 기꺼이 호소문을 썼다. “여러분, 모든 나라에서 인종 차별과 억압의 해악을 걷어낼 때까지 멈추지 맙시다.”

이처럼 저자는 미국인들이 애써 덮으려 했던 켈러의 정치적 초상, 즉 여성 참정권의 주창자이고 사회주의 옹호자이며 인종차별의 적대자였던 모습에 집중한다. 아울러 그녀의 삶을 기적 서사에서 빼내 장애인 교육의 역사적 맥락 위에 앉힌다. 켈러와 설리번이 세상에 알려지기 반세기 전, 두 사람의 역할모델이 된 이들이 있었다. 새뮤얼 그리들리 하우와 로라 브리지먼이었다.

하우는 미국 최초로 공식 시각장애인 학교를 열어 손가락 문자를 가르쳤다. 브리지먼은 그 제자로, 어릴 때 성홍열을 앓아 시각과 청각을 잃었다. 침묵과 어둠에 갇혔던 그녀는 하우에게 손가락 문자를 배웠다. 얼마 안 가 책을 읽을 수 있었고, 역경 극복의 기적으로 대중들의 관심을 끌었다. 찰스 디킨스가 그녀를 찾을 정도였다.

켈러의 스승 앤 설리번도 어릴 때 병으로 거의 시력을 잃었다. 실의에 빠진 그녀에게 손가락 문자를 가르친 사람이 브리지먼이었다. 브리지먼 없이, 켈러도 없었다. 수술로 시력을 회복한 설리번이 선생님이 되어 만난 아이가 켈러였다. 켈러는 기적의 존재가 아니다. 켈러의 배움은 차라리 시각장애인 교육의 성과가 쌓인 결과다. 평범한 켈러는 특별한 켈러보다 소중하다. 시각장애인이면 누구나 글을 배우고, 대학에서 학위를 받고, 비장애인처럼 사회생활을 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까닭이다.

켈러는 그 사회생활의 많은 부분을 진보적 인권 투쟁에 쏟아부었다. 높아진 자기 이름값을 활용해서 여성 억압에 저항하고, 인종 차별에 반대하며, 나치와 매카시즘에 맞섰다. 켈러는 “1000만 시민이 맹목적이고 어리석고 비인간적인 편견에 희생당하는 미국은 세계의 수치”라고 말하면서, “흑인이 학살당하고 그 재산이 불태워지는 민주주의, 집단 린치와 아동노동이 용인되는 민주주의”는 진정한 민주주의가 아니라고 비판했다.

역경을 이겨낸 기적의 생존자란 낡은 서사 대신 저자는 사회 개혁을 위해 연대하는 운동가로 그녀의 삶을 업데이트한다. 장애가 그녀를 정의를 위해 나서게 했다. 장애인이었기에 그녀는 약자의 고통에 공감하면서 억압과 차별의 장벽을 깨는 망치로 자신을 내줄 수 있었다. “저는 세계 곳곳에서 자유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합니다.” 켈러는 평생 장애인, 여성, 아동, 노동자, 유색인의 권리가 겹치면서 평등의 세상을 꿈꾸는 진보의 교차로에 있었다. 그런 세상을 고민하는 이들에게 이 솔직한 평전은 멋진 읽을거리가 될 것이다. 592쪽, 4만4000원.

장은수 출판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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