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의제’ 방통위를 못 버리는 이유 [세상읽기]
홍원식 | 동덕여대 ARETE 교양대학 교수
사법부는 지난 8월26일 권태선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 등 3명이 방송통신위원회를 상대로 낸 새로운 이사 임명처분의 집행정지 신청을 받아들였다. 사법부에 대한 적지 않은 우려가 있었지만, 담당 행정법원은 기대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판결을 내린 것이다. 더욱 인상적인 것은 단순히 신청인들의 회복할 수 없는 손해만을 고려한 것이 아니라, 2인 체제가 방통위의 입법 목적을 저해한다는 점을 분명히 명시하였다는 점이다. 이 판결로 현 정부의 방송에 대한 군사작전 같은 공세는 적어도 당분간은 추진할 수 없게 되었다. 현재 이진숙 방통위원장이 탄핵된 상태에서 김태규 부위원장이 혼자 권한대행을 맡고 있기에 앞으로 방통위의 어떠한 의결도 이뤄질 수 없는 상태일 뿐만 아니라, 이번 판결에서 2인 체제의 위법성을 명시했기에 그동안 방통위의 이동관, 김홍일 전 위원장이 2인 체제에서 의결한 사안들도 본안 재판에서 위법으로 판결될 가능성 또한 높아진 것이다.
연간 대략 2500억원 정도의 예산을 쓰고 있는 기관이 이렇게 무용지물의 상태에 놓여 있다는 점에서, 아마도 다수의 국민들은 방통위의 근원적인 필요성에 대해서도 상당한 불만을 가질 것 같다. 이를 반영한 것인지, 일각에서는 방통위의 역사적 소임에 마침표를 찍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사실 방송통신 규제 거버넌스에 대해서 현재와는 다른 새로운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한 건 꽤나 오래전부터이다. 이미 박근혜 정부에서 미래창조과학부와 방통위로 규제기관이 이원화된 무렵부터 방통 융합이 가속화되는 미디어 환경과 맞지 않는 소모적 거버넌스라는 지적이 계속되어왔다. 여러 정부가 지나는 동안 방통위, 과학기술정보통신부, 문화체육관광부로 나뉜 규제 정책 거버넌스를 통합하는 새로운 방안을 추진할 것으로 기대를 모았지만, 결과적으로 아무것도 이뤄지지 않고 현재 방통위만 유명무실하게 붕괴되었을 뿐 사실상 방송·통신에 대한 정책은 어떤 대안도 없는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어버린 모습이다.
위원회 형태의 행정기관으로서 방통위가 필연적으로 정치적 논란을 반복하게 된다는 점에서 위원회 형태의 행정기관의 취약성은 분명하다. 새로운 방송통신 규제 거버넌스 대안을 모색하는 가운데, 방통위가 기존의 부처에 흡수·통합되어 만들어지는 새로운 독임제 부처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많이 제시되었던 것도 위원회가 갖는 소모적 정치 갈등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동기가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이와 함께, 급격히 변화되는 미디어 기술환경에서 이에 시의적으로 빠르게 대응하고 강력한 행정적 추진력을 가질 수 있는 독임제 부처가 방송통신 영역에 더 적합하다는 것도 중요한 요점이었다.
하지만 이번 방통위 사태를 보면서 과연 합의제 위원회 형태의 의사결정 구조가 반드시 극복되어야 하는 과제인가에 대해서 조금 다른 시각을 가질 수도 있을 것 같다. 무용지물이 되어버린 현재의 방통위 상황은 역설적이게도 방송·통신 영역에서 여전히 합의제 위원회 형태의 거버넌스가 왜 필요한지를 잘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이번 행정법원에서 판시한 바는 대다수의 국민들에게 큰 영향을 주는 방송이 특정한 세력의 정치적 목표나 성향에 의해서 독단적으로 좌우될 수 없도록 하는 것이 정책 기관에서 가장 우선되어야 하는 합목적성임을 재확인시켜줬다. 또한 방송 산업이나 통신 영역에서 많은 논의가 기술 중심적으로 환원되는 경향이 있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이러한 영역에서 의사결정 역시 상당한 사회적 숙의와 합의 과정이 필요한 것들이다. 예를 들면, 온라인망 사용료에 대한 결정이나 최근 논란이 되는 딥페이크에 대한 정책 대응 등이 단지 기술적 이해만으로 이뤄지거나 정책적 효율성의 논리로만 결정될 수는 없는 것이다. 실제 이런 의사결정은 사회적으로 합의된 가치의 기반 위에서 다양한 이해관계의 조정과 이익 형량 속에서 이뤄지는 것들이다.
현 정부의 독단과 무능을 겪으면서, 이런 정부의 독임제 부처보다는 합의제 위원회가 나름의 장점을 가질 수 있다는 점도 새삼 다시 깨닫게 되었다. 현재의 방통위 사태가 단순히 합의제 위원회가 소모적이고 불필요하다는 빠른 결론으로 끝나기보다는, 아무쪼록 위원회 조직과 독임제 형태의 장단점을 좀 더 심층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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