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현철의 중국萬窓] 피로 물든 무도한 역사에 펼쳐진 협객(俠客)의 세계
협은 문사들이 중심이 된 역사에서 밀려나 감추어진 주변적 존재
소설과 연극, 영화로 이어지며 현대까지도 협의 전통 살아 있어
사람 사는 곳엔 협이 있는 강호가 있다… 민중의 친구로 면면히 이어와
'수호전'은 '삼국지연의', '서유기', '금병매'와 더불어 중국 4대 기서(奇書)로, '삼국지연의'와 함께 동양에서 가장 많이 읽히는 소설이다. '수호전'엔 무송, 노지심 등 108명의 협객들이 등장한다. 죄인 또는 암흑가 출신이거나 관료 생활을 했지만 죄를 지어 도망다니는 인물 등 난세에 맞서며 약자를 돕는 사람들이다. 북송 말기가 배경이다. 소설은 108명의 호걸들이 저마다 사연을 품고 '양산박'이라는 근거지로 모이는 이야기들을 옴니버스 형태로 묶어낸 전반부와, 황제의 명을 받고 반란군을 토벌하러 다니는 후반부로 나뉜다. '수호전'에서 무엇보다 중시하는 것은 '협(俠)의 정신'이다. 양산박은 '수호전'의 주요 배경이 되는 습지대로, 산둥성 지닝시 량산현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황제를 중심으로 한 중국 정사(正史)의 뒷면에는 수많은 민초들의 눈물과 땀이 존재했다. 권력의 횡포에 울어야 했던 힘없는 민중들은 자신들을 대신해 사악한 권력자를 응징하는 재야의 고수들에 열광했다. 이게 중국 민간사회에서 일종의 도덕적 기반 역할을 한 협(俠)과 무협(武俠)이 탄생한 배경이다. "개 같이 살기보다는 영웅처럼 죽고 싶다"를 기치로 내세운 무협은 중화권 대중문화의 꽃이다. 중국사의 밑바닥에 자리잡은 민간 전통으로서의 협은 난세의 시기마다 표면으로 분출돼 역사의 방향을 트는 역할을 했다.
대중들은 무당파의 본거지 무당산, 소림파의 숭산, 아미파의 아미산, 공동파의 공동산, 화산파의 화산, 곤륜파의 곤륜산 등 아직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영웅(와호장룡·臥虎藏龍)들이 깃들어 있는 무림(武林)의 요람을 동경했다. 소림과 무당은 무림의 양대 태두(泰斗). 불가(佛家)의 무학과 도가(道家)의 무학, 근력을 중시하는 외가 공부와 내력(내공)을 중시하는 내가 공부, 무학의 두 근원을 가르치고 배우는 곳이다. 무당은 '부드러움으로 강함을 이기고'(이유극강·以柔克剛), '비어 있음을 써서 꽉 찬 것을 누르며'(운허어실·運虛禦實), '움직이지 않으면서 움직임을 제어하는'(이정제동·以靜制動) 도가의 원리를 운용했다.
중국 최초의 역사서인 사마천의 '사기'(史記)에서 처음 이름을 알린 협은 시내암(施耐庵)의 '수호전' 등 소설과 연극, 그리고 현대의 영화로 이어지면서 지금까지도 그 전통이 살아 있다. 주윤발이 연기한 '첩혈쌍웅'(첩血雙雄) 등 홍콩 느와르 영화는 무협소설을 모방한 것이다. 첩혈은 '피로 물들다', '선혈이 낭자하다'는 말로, '첩혈쌍웅'은 피투성이 선혈이 낭자한 두 영웅이란 뜻이다.
◇협(俠)의 탄생
문현선의 '무협'(살림출판사)에 따르면 중국 역사에는 음양오행설에 따른 음양의 이치가 새겨져 있다. 이 음양의 이치에 따라 문아한 유사(儒士·유교 학자)들을 양지바른 쪽으로 끌어내고, 피로 물든 무도한 역사와 그 주인공인 협사(俠士)들은 그늘속으로 감추었다. 유(儒)가 '붓의 문화'로 문사(文士)를 대표했다면, 협(俠)은 '칼의 문화'로 무사(武士)를 대표하는 이름이었다. 드러난 문사의 도(유학·儒學)와 감추어진 무사의 도(무협·武俠)는 중국 역사를 움직이는 두 힘으로, 음양오행설에 따른 음양의 문화도식을 형성한다. 문과 무의 절묘한 조화(문무쌍전·文武雙全)는 중국 제왕들의 이상적인 통치의 모델이었다. 협은 문사들이 중심이 된 역사에서 밀려나 감춰진 주변적 존재였다.
협은 궁형의 치욕을 참고 불후의 역사서를 남긴 사마천의 '사기'에서 그 개념이 탄생했다. 억울한 형을 견뎌야 했던 사마천은 의리에 살고 의리에 죽는 협을 동경했다. '사기'는 본기(本紀), 표(表), 서(書), 세가(世家), 열전(列傳)으로 이뤄져 있다. 본기는 천자의 기록, 세가는 춘추전국시대 및 전한대 제후들의 기록, 열전은 그 밖의 주요 인물들에 대한 기록이다. 이가운데 협의 탄생을 선언한 것은 열전의 '유협열전'과 '자객열전'이다. 사마천은 양육강식의 춘추전국(기원전 770년 ~ 기원전 221년)부터 한나라 초기에 이르는 역사에서 협이 어떻게 유별난 지존을 지닌 특별한 개인으로서 그 존재를 확립하고, 그들의 행위가 어떻게 규범화됐으며, 사회적 존재로 어떻게 그들을 재규정했는가를 알렸다. '유협'(游俠)이라는 이름은 유협열전에서 비롯됐다. 자격열전은 예양·조말·전제·섭정·형가 등 다섯 협객의 이야기로, 죽음 앞에서도 떳떳했던 이들의 모습에 중국 민중은 열광했다.
무협작가인 진산(陳山)은 '중국무협사'에서 협의 유형을 발전 단계에 따라 '유협'과 '호협'(豪俠)으로 구분했다. 유협은 춘추에서 전국에 이르는 발생기의 협이고, 호협은 전한 시기 무예를 숭상하는 풍조속에 강성해진 전성기의 협이다.
◇협이란 무엇인가
협(俠)은 사람 '인'(人)과 겨드랑이에 낄 '협'(夾)자가 더해진 글자로, 약한 사람을 끼고 도는 행위나 사람을 뜻한다. 협객은 떠돌아다니는 사람(유협·游俠)으로 , 매인 데 없는 존재다. 유협은 "그 말은 틀림없이 믿을 만 하고 그 행동은 틀림없이 약속을 지키며, 한번 허락한 일은 제 몸을 아까지 않고 어려움을 무릅써 가면서 남을 도와 죽고 사는 것을 잊는다. 그러면서도 자기 재주를 자랑하지 않고 그 덕을 내세우는 걸 부끄럽게 여기는" 사람이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유협들은 그 행위가 반드시 정의에 들어맞지는 않지만 그 말은 반드시 믿음이 있었고, 그 행동은 과감했으며, 승낙한 일은 반드시 성의를 다했으며, 자신의 몸을 버리고 남의 고난에 뛰어들 때에는 생사를 돌보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능력을 자랑하지 않았고, 그 공덕을 내세우는 것을 오히려 수치로 삼았다"고 했다.
춘추전국시대 학식과 무예가 뛰어났으나 나라를 잃고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찾아 세상을 떠돈 유사(游士)들은 매인 몸이 아니기에 남의 어려움을 해결해주는 일(임협·任俠)을 자청했다. 자존감이 유별난 이들은 대가나 명령에 따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능력과 존재를 온전히 알아주는 사람에게 보답한다는 전형적인 협의 행동규범을 확립해갔다. 협은 세상의 흐름을 거스르는 유별난 자존감을 본색으로 삼았다. 그들은 세상을 믿기보다 자신을 믿었고, 세상의 원칙을 지키기보다 자신의 원칙을 지켰다. "내가 한 일은 내가 책임진다"(일인작사일인당·一人作事一人當)는 그들의 좌우명이었다. 자신을 알아주는 지기(知己)가 가장 중요했다. 이렇게 영웅·호걸·장자 등으로 불리는 협객들이 탄생했다. 순자는 "의기를 세우고 위엄과 덕으로 복종케 하며 사사로운 사귐을 맺음으로써 세상에서 세력을 떨치는 자를 일컬어 유협이라고 한다"고 했다.
협의 핵심은 첫째 신의(信義)다. 뱉은 말을 반드시 지키고, 사람사는 규범에 들어맞게 행동하는 것이다. 둘째는 지기(知己). 협은 받은 대로 갚는 보(報)다. 지기를 위해서라면 "한다면 한다." 그의 알아줌에 보답한다. "은혜는 은혜로, 원한은 원한으로"(보은보구·報恩報仇) 갚는다. 오우삼 감독의 '첩혈쌍웅'에서 검은 코트를 휘날리며 우아하게 쌍권총을 쏘는 협객 킬러의 모습은 관객들을 사로잡는다. 하지만 그의 돌아선 모습은 외롭다. "개같이 살기보다는 영웅처럼 죽고 싶다"는 게 협의 철학이다. 셋째는 체면 문화다. 살신성명(殺身成名), 목숨을 버려 이름을 얻는다. 장예모 감독이 영화 '영웅'에서 그리는 주인공의 모습이다. "이름은 헛되이 나는 것이 아니고 선비는 까닭없이 서로 어울리지 않는다"는 사마천을 말처럼 이름 석자를 얻기 위해 목숨을 건다. 목숨을 바쳐 의를 이루는(사생취의·捨生取義 ) 협의 모습은 맹자가 말하는 의와 겹친다. 마지막으로 협은 '남 일 돕기를 업(業)으로 하는 사람'이다.
김용의 '의천도룡기'(倚天屠龍記)와 '소오강호'(笑傲江湖 ) 등 무협 소설이나 만화는 문학 평론가 김현의 말처럼 "한 청년 고수가 사회생활에서 필요한 여러 처세술을 배워 대협으로 성장해가는 일종의 성장기"다.
협의 전통은 서양의 기사 문화, 일본의 무사 문화와 비교된다. 하지만 기사 문화는 상류 귀족사회의 문화이며, 무사 문화는 상하층 중간에 위치하는 문화이다. 반면 중국의 무협 문화는 저자나 거리에서 활약하며 초야에 몸을 숨긴 순수한 하층 대중문화다. 진산은 "무협은 서구의 기사처럼 추상적인 종교나 진리에 대한 신념을 갖고 있지 않았다. 군주를 위한 의무감이나 자신의 이익을 위해 행동한 것이 아니었으며, 소박하고 우연적인 감정요소에 의해 가치관념이 생성됐다"고 말한다.
◇인재 강호(人在江湖), 강호에는 협객이 있다
'사기' 유협열전은 한나라 협객인 주가(朱家)·극맹(劇孟)·곽해(郭解) 등에 관한 전기다. 사마천은 협객을 향곡지협(鄕谷之俠), 포의지협(布衣之俠), 여항지협(閭巷之俠)으로 분류해 논했으며, 그중 같은 시대에 살았던 곽해의 이야기를 소설 형식으로 엮었다.
중국 최초의 협은 전국시대 예양(豫讓)이라는 진(晉)나라 사람이다. 예양은 처음 대부 범씨와 중항씨를 주인으로 섬겼으나 인정받지 못했다. 당시 진나라는 범씨(范氏), 지씨(智氏), 위씨(魏氏), 한씨(韓氏), 조씨(趙氏), 중항씨(中行氏)가 정권을 잡고 있었는데 후에 예양은 지백을 섬겨 총애를 받았다. 지백이 조양자(趙襄子)를 축출하려고 하자, 조양자는 한씨, 위씨와 짜고 지백을 죽인 후 지백의 후손을 멸족시키고 그 땅을 셋으로 나눠가졌다. 뿐만 아니라 지백의 두개골에 옻칠을 하여 술잔으로 썼다.예양은 산속으로 달아나면서 자신을 알아주었던 주인 지백의 원수를 갚겠노라고 다짐했다.
예양은 이름을 바꾸고 죄수로 가장해 조양자의 궁으로 들어가 비수를 품은 채 뒷간의 청소 일을 맡았다. 어느 날 조양자가 일을 보기 위해 뒷간에 들어오자 때는 이때다 하고 비수를 꺼내 찔러 죽이려고 하였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모두가 지백을 죽여야 한다고 하였지만 조양자는 예양을 풀어줬다. 예양은 원수갚기를 그만두지 않았다. 몸에다 옻칠을 하고, 문둥이로 변장하고 숯을 삼켜 목소리를 쉬게 만들었다. 마침 조양자가 말을 타고 다리를 지나는 조양자를 죽이려다 또 미수에 그쳤다. 결국 그는조양자의 옷을 받아들어 칼을 뽑아 들고 세 번 내리친 후 "비로소 지하에 잠든 지백님에게 보답할 수 있게 되었도다" 며 스스로 칼로 가슴을 찔러 자결했다.
사기 '자격열전'에 등장하는 자객 형가도 협객이다. 그는 절대적 권력자인 진시황을 죽이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음에 이른다.
강호(江湖)는 특정 지역이 아니라 협객들이 존재하는 땅이다. 강호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건 공간이 아니라 협과 협을 연결하는 길, 네트워크다. 녹림, 객잔 등 무협의 공간들은 그 네트워크의 결절지다. 무협지엔 '강호를 나선다'(出江湖), '강호를 떠돈다'(走江湖), '강호에서 물러난다'(退江湖)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협은 인간이다. 인간 세상이 존재하는 한 협도 존재한다.
강현철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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