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라우드 영주와 디지털 농노, 자본주의는 끝났다 [책&생각]
테크노퓨달리즘
야니스 바루파키스 지음, 노정태 옮김 l 21세기북스 l 2만4000원
눈 떠 보니 당신은 어떤 마을에 도착해 있다. 죽 뻗은 길에는 서점, 옷가게, 잡화점, 문방구, 전자제품 등 상점들이 들어서 있다. 가게들은 거래하는 사람들로 붐빈다. 메이드인 차이나, 메이드인 코리아 제품이 만들어진 곳도 다양하고 파는 상인도 제각각이지만, 이 가게의 주인은 단 한 명이다. 주인은 상품이 판매될 때마다 수수료를 받으며, 가게의 상품 진열은 주인의 지시에 따라 끊임없이 바뀐다. 이 시장은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이 아니라 그 한 사람의 ‘손’에 의해 움직인다. 미국 아마존에서부터 중국의 알리익스프레스, 최근에 정산 지연 사태가 벌어진 위메프까지 이커머스 기업을 상상하면 된다.
그리스 전 재무장관이자 아테네 경제학과 교수인 야니스 바루파키스는 단언한다. “아마존닷컴에 접속하는 순간 자본주의와는 작별하는 겁니다.” ‘새로운 중세’가 펼쳐진 것이다. 마을은 온라인 장원이며, 입점한 상점의 사람들은 현대판 ‘농노’, 이들이 납부하는 돈은 ‘지대’이다. 바루파키스는 이를 기술과 봉건제를 합성해 신조어 ‘테크노퓨달리즘’이라고 부른다. “자본주의는 프롤레타리아가 아니라 클라우드 영주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테크노 영주’들은 소프트웨어, 서버, 송수신탑, 광케이블 등의 인프라로 판을 깔았다. 이 모든 것들은 콘텐츠가 없다면 아무런 가치가 없다. 당신(당신이 제프 베이조스는 아니겠지)은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엑스(옛 트위터)에 자발적으로 콘텐츠를 올리고 있다. 애플은 앱스토어에 입점한 서드파티(다른 기업의 주 기술을 이용한 파생 상품을 생산하는 회사) 개발자들에게 30%의 수익금을 가져간다. 애초 입점시켜 돈을 받는 형태를 개발해낸 곳이 애플이었고 그다음 안드로이드 진영을 통합하며 나타난 것이 구글플레이였다. 애플의 행동을 보고 페이스북 설립자 마크 저커버그는 “혁신을 가로막는 독점 지대의 추구”라고 비난했다. 곧 플랫폼 기업 시대가 왔다(페이스북은 메타 플랫폼스로 이름을 바꾸었다). 우버, 리프트, 도어대시의 한국형 배달의 민족, 카카오티, 야놀자에서 운전을 하고, 배달을 하는 것은 당신이지만, 당신은 임금을 받는 대신 사용료를 지불한다.
바루파키스의 단언에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봉건제’라는 말을 양보할 생각이 없다. 클라우드 기업은 경쟁 없이 소유만으로 수익을 얻는다. 전통적으로 땅에다 시추관만 꽂으면 되는 석유 개발이나 부동산, 브랜드 사업 등은 애초에 지대 사업이었다. 그들은 ‘자본주의’ 시대의 기업가처럼 혁신적인 일을 했고 성실하게 일을 하고 있다고 포장하기도 한다. 그래서 헷갈릴 수도 있다.
클라우드 영주는 상상할 수 없는 수준의 돈을 긁어모은다. 2018년 아마존의 주식가치는 1조달러를 넘어섰고 이는 애플에 이어 두 번째였다. 2020년 클라우드 자본이 벌어들인 지대는 개발도상국 전체의 GDP보다 많다. 2010년에서 2021년 사이 제프 베이조스와 일론 머스크 두 사람의 서류상 자산 총합은 100억 달러 이하에서 200조 달러까지 치솟았다. 팬데믹 기간 클라우드 기업의 가치는 폭등했다. 최근 하락세를 겪고 있긴 하지만 팬데믹 이전의 수준으로 떨어지지는 않았다. 2022년 카카오 김범수 이사회 전 의장의 재산은 21조4천억원에서 급락해 5조7천억원이었으며, 쿠팡 김범석 창업자의 경우 12조7천억원에서 급락해 약 4조3천억원이었다. 다른 한편에서 저자가 공들여 설명하는 것은 1944년 무역 상품을 달러로 결제하게 한 브레턴우즈 체제 이후 미국과 세계 각국 간 ‘다크 딜’이다. 우크라이나 전쟁 뒤 미국의 러시아 달러 자산 동결로 이 체제는 전환점을 맞을지도 모른다. 미국의 중국 아이티 기업 수입 제재 등은 ‘영주 간 싸움’의 현재진행형이다.
폴리페무스, 헤시오도스, 미노타우로스 등 그리스 신화, 미국 드라마 ‘매드맨’ 등의 비유가 흡입력 있는 글을 만든다. ‘딸에게 주는 경제 이야기’(2024년, ‘작은 자본론’ 개정판)에서는 딸에게 들려주는 ‘자본론’이었는데, 이번 책은 철강 노동자이자 사회주의자 아버지의 질문에 답하는 형식이다. 1993년 느려터진 인터넷 앞에서 아버지는 이렇게 물었다. ‘이 네트워크는 자본주의 세상을 더욱 공고히 만들까, 아니면 결국 자본주의가 지닌 약점을 드러내 줄까.’
구둘래 기자 anyone@hani.co.kr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 한시가 급해도, 수술 인력 부족에 숨져…배후진료 대책 ‘발등의 불’
- “양평 땅 옆으로 고속도로 통과시킨 윤-장모야말로 경제공동체”
- 환자 스스로 경증·중증 구분하라니…연휴 앞둔 시민들 혼란
- 전국 곳곳 소나기…낮 최고 33도 ‘늦더위’ 계속
- “이상민 장관, 방첩사 방문해 충암고 후배 방첩사령관 등과 식사”
- 삼성 수동공정 직원 79% “근골격계 질환”…산재신청 14년간 1건뿐
- 의사 출신 인요한, 전 직장에 ‘환자 부탁’…“수술 중” 문자에 “감사”
- 윤 퇴임 뒤 양평?…대통령실 140억 ‘사저 경호동’에 예민한 까닭
- 엔번방 때도 있던 딥페이크, 국가 방관과 텔레그램이 키웠다
- 브랜드 옷 태워 벽돌 굽는 캄보디아 공장 [책&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