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원순의 도시의 정원사] 가을, 꽃으로의 몰입

박원순 한국수목원정원관리원 국립세종수목원 전시원실장 2024. 9. 6. 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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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화·구절초·개미취… 소박한 가을꽃 아름다워
꽃에 몰입하면 세로토닌 분비되며 기분 좋아져
일상의 스트레스 잊고 삶의 경이로움 느낀다
도시를 재생시키고 지역경제도 살리는 꽃 축제,
미적 공간 넘어 통합·치유의 역할까지 해낸다
이 가을, 꽃이 모두에게 기쁨을 안겨주기를
국립세종수목원의 가을꽃 전시ⓒ 박원순

마침내 아침과 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길고 무더웠던 여름을 견뎌낸 식물들이 아름다운 가을꽃들을 피울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국화와 코스모스, 천일홍뿐 아니라 구절초와 개미취, 꿩의비름같이 소박한 아름다움을 지닌 우리 꽃들도 곧 만날 생각에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꽃을 보면 기분이 좋아진다. 아주 먼 인류의 조상들이 꽃을 보며 희망과 기대감을 느꼈던 경험이 우리의 유전자에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생물학적으로는 우리 뇌의 후두엽에서 색을 인식하는 과정이 긍정적인 감정을 일으킨다. 이로 인해 세로토닌·도파민 같은 신경전달물질이 분비돼 기분이 좋아진다. 그러나 과학적으로 설명하지 않더라도 꽃을 주고받는 마음 자체가 사랑이며 행복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일상에서 날마다 꽃을 즐기면 항상 좋은 기분을 유지할 수 있다. 꽃의 종류와 색깔마다 느껴지는 감정이 다르다. 가령 빨간색 꽃은 사랑과 회복력을, 노란색은 행복감을, 파란색은 심리적 안정감을, 주황색은 활발한 사교성을 불러일으킨다. 꽃에 몰입하는 순간만큼은 일상의 스트레스를 잊고 경이로움을 느끼게 된다.

로마 시대 플로라리아 축제부터 중세 유럽의 메이데이 축제, 중국의 모란 축제, 그리고 우리나라의 국화 축제까지 꽃을 즐기는 문화는 여러 나라에서 발전해 왔다. 17세기 중반 네덜란드 황금시대에는 꽃을 즐기는 문화가 절정에 달했다. 그 중심에는 꽃 애호가로 이루어진 ‘플라워 길드’가 있었다. 그들 사이에서 가장 인기 있던 꽃들은 히아신스, 수선화, 붓꽃, 아네모네, 그리고 튤립이었다. 특히 튤립에 대한 열광은 ‘튤립 파동’이라는 경제적 사건을 낳았다. 튤립 알뿌리 하나의 가격이 집 한 채에 맞먹을 정도로 치솟았다가 하루아침에 폭락하기도 했다. 이런 우여곡절을 통해 네덜란드는 오늘날 전 세계에 다양한 알뿌리 품종을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종주국으로 자리 잡게 됐다.

19세기 이후 세계 유명 도시들은 대규모 꽃 박람회를 개최하기 시작했다. 미국 펜실베이니아주는 1829년부터 필라델피아 플라워쇼를 개최했다. 이를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꽃과 정원 문화를 소비하고 즐기는 장이 마련됐다. 지역 경제를 살리는 데도 도움이 되었다. 올해로 195회째를 맞은 2024년 필라델피아 플라워쇼는 약 800억원의 경제적 효과를 거둔 것으로 평가된다. 무엇보다 이 플라워쇼는 새로운 식물들의 데뷔 무대였다. 크리스마스 식물로 유명한 포인세티아는 멕시코에서 미국으로 들여온 후 첫 번째 필라델피아 플라워쇼에서 소개된 식물이다. 포인세티아는 현재 전 세계적으로 1조4000억원 규모의 거래가 이뤄지고 있다.

1862년부터 영국 런던에서 개최된 첼시 플라워쇼는 가장 권위 있고 영향력 있는 정원 전시 행사로 손꼽힌다. 내로라하는 정원사와 디자이너, 양묘업자와 식물 애호가들이 첼시 플라워쇼를 통해 최신 정원 디자인과 우수한 정원 식물을 선보인다. 때때로 정원계의 스타가 탄생하기도 했다. 가령 영국의 정원사이자 작가였던 베스 차토는 10년 연속 첼시 플라워쇼에서 상을 받으며 정원사들 사이에서 명성을 얻었다. 그녀는 열악한 환경 조건에서도 잘 자라는 특별한 꽃들을 발굴해 “적합한 장소에 적합한 식물을 심자”는 ‘가드닝 철학’을 널리 퍼뜨렸다.

벨기에 브뤼셀 그랑플라스 광장의 ‘플라워 카펫’ⓒ pixabay.com

특별한 전시 스타일로 유명해진 정원 축제도 있다. 벨기에 브뤼셀 그랑플라스 광장에서 2년에 한 번씩 열리는 ‘플라워 카펫’ 축제는 약 1680m² 면적의 시청 앞 광장에 베고니아와 다알리아 등 백만 송이 꽃을 아르누보 양식의 섬세한 예술적 문양으로 장식한다. 벨기에산 베고니아를 널리 알리기 위한 목적으로 1971년 처음 시작된 행사다. 다채로운 꽃을 카펫처럼 장식하는 전통은 르네상스 시대 스페인·이탈리아 등 지중해 국가에서 비롯됐다.

벨기에 브뤼셀 그랑플라스 광장의 ‘플라워 카펫’ⓒ pixabay.com

우리나라에도 자랑할 만한 사례가 있다. 지난해 순천만국가정원에서 열린 국제정원박람회는 국제적 정원 문화 교류의 장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980만명이 찾아왔다. 생산 유발 효과는 1조6000억원에 달했고, 2만5000명에게 일자리를 제공했다.

역사적으로 꽃은 단순히 즐거움과 경제적 이득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1960년대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는 ‘플라워 파워’라는 운동을 통해 평화와 반전의 메시지를 전했다. 앞으로 꽃 축제의 화두는 ‘재생’과 ‘지속 가능성’에 더 집중될 것이다. 단순히 소모적인 행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도시 재생, 환경 복원, 지역사회 활성화와 연계된 프로젝트들이 주목받고 있다. 국내 최대 담배 공장이 있었던 창고 부지를 정원으로 바꿔 시민들과 함께 가드닝 페스티벌을 개최한 청주시의 사례를 눈여겨볼 만하다. 지역에서 생산된 꽃을 사용하는 것도 중요한 트렌드가 되고 있다. 이는 꽃 수입에 따른 탄소 발자국을 줄이고, 지역 임·농가를 살리는 효과가 있다.

특히 토종 곤충과 새들에게 중요한 서식지를 제공하고 생물다양성을 높이는 자생식물의 중요성도 점점 커지고 있다. 또한 사회적 약자와 장애인도 함께 즐길 수 있는 정원과 치유 프로그램도 확대될 전망이다. 이를 통해 꽃 축제는 단순한 미적 공간을 넘어 사회적 통합과 치유의 장으로서 그 역할이 강화될 것이다.

국립백두대간수목원 경관 초지원에 활짝 핀 구절초 ⓒ 최수진

이제 곳곳에서 가을맞이 꽃 소식이 들려온다. 이미 경북 봉화의 국립백두대간수목원에서는 가을에 피어나는 우리 자생식물과 꽃을 만날 수 있는 ‘봉자 페스티벌’이 시작됐다. 10월에는 경기정원문화박람회와 고양 가을꽃축제가 막을 올린다. 전국 곳곳에서 열릴 국화 축제를 비롯해 국립세종수목원의 ‘세록세록’ 가을꽃 전시도 준비가 한창이다. 이 가을, 꽃과 함께하는 시간들이 우리 모두에게 새로운 기쁨과 위로를 안겨주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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