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 효용 다했다” 장관 말대로 움직이지 않는 시장[동아시론/권대중]
사기 등 부작용 최소화가 당장 시급한 과제
보증금 은행 예치제 ‘에스크로’ 도입해볼만
기업형 장기임대, 기간별 차등 세제 지원을
박상우 국토교통부 장관이 8월 28일 “전세 일변도의 임대주택에서 벗어나 국민에게 새로운 선택지를 만들어줘야 한다”며 기업이 참여하는 20년 장기임대주택 추진 계획을 내놓았다. 박 장관은 “전세는 효용을 다했다”며 “어쩔 수 없이 전세금을 내주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데 앞으로 이런 추세가 구조적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고 진단했다. 전세 제도의 한계를 인식하고 임대시장에 다양성을 불어넣겠다는 정책은 바람직하지만, 전세 제도를 섣불리 효용이 다한 제도로 배제할 수는 없다.
시장은 ‘전세제도가 서서히 없어지거나 효용이 다했다’는 장관의 말대로 움직이지 않고 있다. 2021년 8월부터 서울 아파트 전월세 계약에서 전세가 차지하는 비중이 60% 이하로 떨어진 건 금리 인상 여파로 대출 이자 부담이 커진 데다 보증금을 제때 돌려받지 못하는 역전세난과 전세사기 피해까지 확산하면서 전세 불안심리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한국은행이 2023년 1월 이후 기준금리를 동결하면서 시장 금리가 안정되자 지난해 3분기와 4분기에 전세 비중이 각각 60.2%, 60.0%로 다시 올라섰다. 올해 2분기엔 전세 비중이 과거 금리 인상 전 수준을 회복했다. 전세 수요가 줄어들고 있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점점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전세 가격도, 월세 가격도 오르고 있다. 부동산플랫폼 다방이 7월 서울 25개 자치구별 전용 33㎡ 이하 연립·다세대 원룸을 분석한 결과 7월 월세는 전달 대비 4.6%, 전세보증금은 2.3% 각각 상승한 것으로 나타났다. 보증금 1000만 원 기준으로 평균 월세는 73만 원, 전세보증금은 2억1545만 원으로 조사됐다. 당장 전셋집을 찾아 발품을 팔아야 하고 전셋값 상승에 고민하는 청년이나 신혼부부에게 ‘전세제도가 효용을 다했다’는 장관의 인식은 먼 미래의 얘기처럼 들린다.
우리나라 전체 가구의 약 40%가 무주택자로 전월세에 살고 있다. 이 중 60%는 전세에 산다. 기업형 장기임대주택 도입이 정부 계획대로 추진된다면 임차인들은 한집에서 안심하고 오래 거주할 수 있어 주거 안정성도 높아질 수 있다. 주택 임대시장을 정상화하는 데는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이 정책도 아쉬움이 있다. 정부가 세제 혜택 등 지원책을 내놓아도 대부분의 민간 기업은 장기보다는 단기 임대주택을 선호하게 된다. 기업은 원금이 묶이는 것보다 되도록 빨리 원금과 이윤을 회수하려는 성향이 있기 때문이다. 정부가 임대차보호법상 임대 기간이 2년 단위로 되어 있는 점을 고려해 4년, 6년, 8년, 10년 등 기간에 따라 차등화된 세제 혜택이 포함된 지원책을 이번에 내놓았다면 기업들이 다양한 임대주택 공급을 선택해서 내놓을 수 있을 것이다.
임대 시장의 주거 선택지를 늘리는 일도 중요하지만 당장은 전세 사기와 같은 부작용을 최소화하는 전세 정상화 제도가 시급하다. ‘전세금 에스크로(Escrow)’는 임대차 계약을 체결할 때 임차인이 전세보증금을 임대인에게 직접 지급하지 않고 은행에 맡기는 방식의 전세보증금 예치 제도다. 은행이 임대 기간이 만료될 때까지 보증금을 보관하고 만료 시 임차인에게 보증금을 돌려준다. 은행은 이 기간 예치한 보증금에 대한 이자 상당액을 임대인에게 지급한다. 그렇게 되면 세입자는 전세보증금 떼일 걱정을 덜게 되고, 집주인은 이자 수익만큼을 번다.
국내에 이런 전세금 에스크로 제도가 없으니 전세사기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주택도시보증공사(HUG)를 통한 전세금 대출을 상환하지 못하는 전세사기 피해 금액은 2021년 5790억 원(2799건)에서 2023년 4조3347억 원(1만9350건)으로 증가했다. 올 상반기(1∼6월)에만 2조6592억 원(1만2254건)의 피해가 발생했다. 전세금 에스크로 제도가 도입되면 전세사기 피해를 줄일 수 있을 것이다. 부동산 계약 과정이나 임대차 도중에 부동산 계약이 중도 파기되는 등 예상치 못하는 중개 사고도 방지할 수 있다. 다만, 전세보증금 전액을 일시에 은행에 예치하면 혼란을 일으킬 수 있으므로 보증금 전액이 아닌 일정 금액을 은행에 예치해 두는 방안을 검토할 수 있다.
미래에 닥칠 전세 제도의 종말을 논하기 전에 에스크로 제도 등 부동산 매매 또는 임대차 거래의 안전성을 높이기 위한 사회적 논의가 더 급하다.
권대중 서강대 대학원 부동산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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