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란의얇은소설] 어느 긴 하루의 밤
신부 앞에서 흔들렸던 마음은
신앙을 선택했던 확신의 균열
깨닫는 순간 자각된 소명의 길
클레어 키건 ‘푸른 들판을 걷다’(‘푸른 들판을 걷다’에 수록, 허진 옮김, 다산책방)
이 첫 단락만 읽었는데도 의심의 전율, 창백한 구름, 갈라지다, 쪼개지다, 흘러가다, 라는 등의 어휘에서 작가의 의도 즉 이 결혼식에는 무언가 감춰진 사실이 있으며 누군가에게는 이 일이 마음이 갈라지는 듯한 상처가 되고, 어쩌면 신부도 정말로 원했던 결혼식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암시가 숨어 있다. 클레어 키건이 다른 책에서 역자에게 보낸 메일에 첫 단락과 좋은 이야기의 기준에 관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도입 부분이 전체 서사의 일부로 느껴지고 이 부분에서 느껴지는 감정이 그 뒤에 이어질 내용의 특징을 잘 드러낸다고 느낄 수 있어야 한다”라고.
이제 결혼식이 시작된다. 많은 작품을 읽고 소설을 쓰고 있지만, 쓰기 어려운 장면 중 하나가 ‘결혼식’이지 않을까 싶어 그런 부분이 나오면 늘 주의 깊게 읽곤 한다. 결혼식장엔 필연적으로 하객들이 모이니 대사도 많고 술도 음식도 때론 불평이나 싸움도 있고, 그렇지 않으면 무언가가 폭로되거나 깨지거나 혹은 신부의 진주목걸이가 끊어지기도 하니까. 작은 소동, 그러나 전체 이야기에서의 결정적인 소동이 일어나는 부분. 사제가 자신 쪽으로 굴러온 진주를 집어 들었다. 그녀의 온기, 그는 그 온기에 깜짝 놀란다.
사제가 지금 가장 하고 싶은 일은 자신이 책임져야 하는 마을을 뒤로하고 목책을 넘어 강가까지 걷기다. 그러면 마음이 차분해지곤 하니까. 복사였을 때 그는 성당에서 합창단이 ‘주 하느님 크시도다’를 연습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었고 그 순간 “길이 열리는 느낌”을 받아 사제가 되었다. 하지만 요즘은 기도를 드려도 응답받지 못한다는 기분만 들 뿐이다. 신을 의심한 적은 없으나 오늘만은 하느님이 어디 있지? 묻고 싶고, 보고 싶어진다. 사제는 들판 사이의 목책을 넘어, 만찬 자리에서 사람들이 말한 중국인 집으로 간다. 몸을 고친다는 낯선 사람. 낮에는 양을 돌보는 일을 하는 그 중국인이 사제에게 말한다. “당신 문제 있어요.”
사제는 “자신이 하는 일을 믿고 그 일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사람”의 집에서 특별한 경험을 했다. 아픈 다리에서 그가 빠른 손으로 “내용물을 몸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이동시킬 수 있다는 듯이 다리에 있는 무언가를” 사제의 몸통으로 밀어 올릴 때, 입에서 한 여자의 이름이 부서져 나왔다. 어떤 마음이 접히기도 했다. 그 집을 나와 사제는 다시 들판에 섰다. 닳았으나 반짝거려서 더 선명해 보이는 세상. 신이 대답하는 듯하다. 나는 여기 자연에 있다고. 사제는 부끄럽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도 안다. 살아 있으니까. 그래서 푸르게 보이는 이 신성한 들판을 오르며 곧 부활절을 앞둔 사제로서 해야 할 “내일의 삶”에 대해 생각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그런 날, 그런 하루가 있다. 나를 변화시키고, 무언가를 깨닫게도 되는. 인생에 대해, 내가 선택한 소명에 대해 새삼 돌아보게 되는 어느 긴 하루의 밤이.
조경란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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