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사님이 만난 반도체 산재노동자 이야기 꼭 남길게요”
[가신이의 발자취] ‘산재 노동자의 벗’ 이상규 노무사를 추모하며
대기업 다니다 과로·스트레스로
흉부대동맥 파열 겪고 하반신 마비
‘다른 노무사’ 되겠다는 마음으로
시험 합격하고 반올림 지원 모임도
반도체 직업병 피해 노동자 12명 대리
산재 경험 승화해 피해자에 진심 다해
7명 사망해 가방에 방진복 배지 7개
2년 전부터 투병하다 8월21일 별세
지난 8월21일 반올림 지원 노무사로 활동해 오던 이상규 노무사 님(노무법인 한벗 대표노무사)이 세상을 떠나셨다. 향년 60.
2년 전부터 병상에 누워 계셨는데 더 버텨낼 힘이 없었다. 하반신 마비로 감각이 없는 둔부에 깊은 욕창들이 생겨났다. 대동맥 인공혈관 교체 수술을 해야 하는데, 자꾸 몸은 마지막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그동안 만나왔던 숱한 산재 피해자들처럼 상규노무사님이 정말 마지막 순간에 중환자실에서 아무 말도 못하고 떠나실 것이 염려되었다. 그래서 작년 가을 병문안이 가능했을 때 상규노무사님이 하고픈 이야기들을 미리 녹음파일에 저장해 두었다. 그러나 나의 게으름으로 그 이야기는 아직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병문안 당시, 상규노무사님은 검은색 가방부터 꺼내놓으셨다. 휠체어 뒤에 항상 달고 다닌 손가방이다. 거기엔 반도체노동자의 얼굴이 그려진 하얀 방진복 배지가 7개나 달려 있었다. 자신이 대리한 피해자가 세상을 떠날 때마다 배지를 달아 온 것이다. “벌써 일곱 분이나 떠났어요…” 흐느껴 우셨다. 상규노무사님의 인생에 이 피해자들의 존재는 어떤 의미였을까.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상규노무사님은 노무사이기 전에 산재노동자였다. 과거 대기업 전자회사에서 일하다 과로·스트레스로 흉부 대동맥 파열이 왔다. 큰 수술을 받고 목숨을 건졌지만 후유증은 생각보다 컸다. 하반신 마비 장애를 얻었다. 앞서 산 삶과는 다른 삶이 시작된 것이다. 당시 어떤 심정이었는지를 물었을 때 ‘그냥 죽고만 싶었다’고 했다. 하지만 대동맥 수술 후 병원에서 만난 사기꾼 같은 노무사들의 행태를 보면서 다른 노무사가 되고 싶었다. 그렇게 자격증을 딴 뒤 2011년 ‘노동자의 벗’ 수습노무사 모임을 하면서 ‘반올림 지원노무사 모임(반지모)’을 만드는데 뜻을 모았다. 당시 뜨거운 피를 가진 동기 노무사 여럿이 합류했다.
상규노무사님은 어려운 수학도 좋아하고 식물도 잘 키우셨지만 무엇보다 산재피해자에게 진심이었다. 산재 대리를 하는 일을 천직으로 여겼다. 복잡한 반도체 공정이나 어려운 질병 산재 입증을 위해 공부도 열심히 했다. 심지어 반도체공학과 교수를 찾아가 모르는 공정에 대해 설명을 듣고 재해경위서를 쓰기도 했다. 그 당시만 해도 반도체 노동자들이 앓고 있는 암, 백혈병 등의 질병을 업무상 관련성이 있는 산업재해로 인정받기란 하늘의 별따기처럼 어려웠다. 반도체 공장에서 사용되는 수많은 화학물질이나 방사선 취급 정보는 대기업들이 제멋대로 정해놓은 영업비밀 장벽에 막혀 입증할 정보를 얻기 어려웠다(지금도 상황이 크게 달라지진 않았다). 국가 차원에서 반도체노동자들의 작업환경 연구도 당시는 전무했다. 그렇기에 삼성반도체 백혈병 피해노동자 고 황유미씨의 아버지가 2007년 시작했던 이 반도체 직업병 싸움은 피해자들 스스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면서 길을 만들었다. 근로복지공단 앞, 삼성본관 앞의 거리에서 싸웠고 집단산재신청이 이어졌다. 상황이 어려울수록 뭉치고 길을 내기 위해 분투했다.
상규노무사님이 대리한 반도체 직업병 피해노동자만 12명이다. 그 중 7명이 사망했다. 스물여섯 삼성디스플레이 여성노동자 뇌종양 사망, 반도체 전기공 일용직 노동자의 재생불량성빈혈, 삼성반도체 협력업체 관리소장님의 백혈병 사망, 2차전지 양극재 연구원의 백혈병 사망, 반도체 노동자로 첫 산재인정이 된 흑색종 사망, 디스플레이 노동자의 골육종 등… 어렵고 힘든 사건의 연속이었지만 열정을 다해 임했다. 근로복지공단이 협소한 잣대로 불승인을 남발했을 때도, 피해자들은 소송을 제기하며 끝까지 버텼다. 증언, 동료진술서, 꼼꼼한 재해경위까지 상규노무사님이 최선을 다해 낸 길은 소송에서 산재인정의 토대가 되었다.
그가 가장 아파한 피해자는 2013년 26살로 세상을 떠난 삼성 엘시디(LCD) 뇌종양 피해자 고 최호경 님이다. 너무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것도 원통한데, 그의 부모님마저 딸이 죽고 난 뒤 병사했다. 이 기막힌 사연에 상규노무사님은 자신이 남은 가족이라도 된 듯 슬퍼하셨다.
언젠가 노무사님이 떠나면 자신이 만나온 반도체 산재노동자 이야기를 좀 남겨달라고 했는데 이 짧은 지면에 다 담지 못하는 사연들은 훗날 꼭 기록해야겠다고 다짐해본다. 고통의 문턱을 넘어 온 산재노동자였고, 그 쓰라린 경험을 온전히 승화해 또다른 반도체 산재피해자와 유족들 곁에서 열정 다해 활동해 온 노무사님. 반지모 모두의 마음처럼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투병생활 많이 힘겨우셨을 텐데 하늘나라에서 아픔 없이 평안하시길… 무엇보다 그동안 너무도 그리워했던 일곱분의 방진복 노동자를 하늘나라에서 모두 만나시길 진심으로 바래봅니다.
이종란/반올림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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