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조 있는 ‘18금 창극’이 벌써 10년…중년 케미 이소연·최호성vs신혼부부 유태평양·김우정 [인터뷰]
국립창극단 1등 히트작…객석 점유율 95%
“음유로 중무장…격조 높은 야함의 18금 창극”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투전판에서 쫓겨 지리산으로 거처를 옮긴 변강쇠와 옹녀. 세간살이까지 갖춘 ‘팔작기와 빈집’이 운명처럼 눈앞에 나타난다. ‘여기가 내 집’이라고 도장이라도 찍듯 시도 때도 없이 ‘덩덩 덕 쿵덕’. 천왕봉 신(神)이 혀를 차며 한 마디를 뱉는다.
“허. 지리산이 거대한 떡방앗간이구나.” (창극 ‘변강쇠 점찍고 옹녀’ 중)
사상 최초의 ‘18금(禁) 창극’은 등장과 동시에 ‘센세이션’이었다. 연극계 ‘스타 연출가’ 고선웅의 첫 창극 데뷔작(극본, 연출)인 ‘변강쇠 점 찍고 옹녀’(9월 5일 개막, 달오름극장)가 5년 만에 돌아온다.
‘변강쇠 점 찍고 옹녀’는 지난 10년간 ‘창극의 대중화’를 이끈 일등공신이다. ‘외설적’이라며 소실된 ‘변경쇠 타령’을 재창작한 이 창극은 초연 당시 일주일에 불과했던 공연 기간을 26일로 늘리는 등 개막과 동시에 ‘히트 행진’에 시동을 걸었다. 그 해엔 ‘차범석 희곡상’도 챙겨갔다. 2019년까지 국내외 16개 도시에서 누적 100회 공연을 달성했고, 총 4만7000여 명의 관객과 만났다. 평균 객석 점유율은 95%에 달한다.
국립창극단의 1등 히트작인 ‘변강쇠 점 찍고 옹녀’의 올해 공연엔 ‘옹녀’ 역으로 이소연(40)·김우정(29)이, ‘변강쇠’ 역으론 최호성(37)·유태평양(32)이 열연한다. 10주년을 맞은 시점에 창극단의 간판 이소연과 함께 ‘옹녀’ 자리를 꿰찬 김우정은 특히나 감개무량하다. 그는 “2014년 초연한 ‘변강쇠 점 찍고 옹녀’를 보고 창극단 입단을 꿈꿨다”며 “세상에 이런 창극이 있다니 너무나 파격적이고 신선해 놀랐던 기억이 있다”며 당시를 떠올렸다.
“이젠 눈 감고도 척하면 척인 사이가 됐어요.” (이소연) “머리가 아닌 몸으로 기억하는 사이죠. 그게 진짜 무서운 거예요. (웃음)” (최호성)
초연 때만 해도 YB(Young Boy)로 불렸다. 10년 전 20대였던 최호성은 30대가, 30대였던 이소연은 40대가 됐다. 둘 사이엔 묘하게 ‘결혼 10년차’에 접어든 중년 부부의 ‘케미’가 흐른다. 굳이 말도 필요없다. 최호성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인데 어느새 우리가 OB(Old Boy)팀이 됐다”고 돌아본다.
‘소호(이소연·최호성) 커플’의 뒤를 이어 더블 캐스팅된 또 다른 주인공은 유태평양과 김우정. 2019년 처음 합류한 ‘스타 소리꾼’ 유태평양은 변강쇠로서 벌써 세 번째 옹녀를 맞았다. 이소연, 김주리에 이어 찾은 ‘짝’은 후배 김우정. 유태평양은 “옹녀를 셋이나 만났으니 내가 진정한 변강쇠”라며 웃는다.
아무리 연기라도 ‘18금 창극’의 경계를 넘나드는 것이 마냥 수월한 것은 아니다. 변강쇠와 옹녀 연기가 쉽지 않은 것은 대사에서 행동까지 ‘성적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대목’이 많기 때문이다. 최호성은 “성인이라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비유와 은유, 행동과 눈빛 하나로 마무리하는 대목들이 강렬한 임팩트가 있다”고 말했다. 유태평양은 “평범한 동작을 하다가 자꾸 다른 모습이 합쳐지며 ‘음란마귀’가 씌워진다”고 귀띔했다.
친할수록 어색함은 커진다. 최호성과 이소연은 같은 대학 1년 차이 선후배 사이다. 최호성은 “10년 전엔 선생님들 앞에서 손잡고 부둥켜 안자니 너무 부끄럽고 어색했다”고 떠올렸다. 물론 지금은 달라졌다. “시간이 만들어준 익숙함에 아무렇지도 않다”는 그는 “이젠 10년 차 부부답게 의리로 살고 있다”며 웃었다.
이소연과 최호성이 능청스럽게 농익은 ‘중년(?)의 케미’를 자랑한다면, 유태평양과 김우정은 ‘신혼부부’의 귀여움을 안고 있다. 유태평양은 “우리는 선배들을 보고 카피하는 수준이다. 아직 만지는 것도 어색하다”며 웃는다. 데면데면한 사이라면 ‘비즈니스 커플’이라도 됐겠지만, 너무 친해 대사를 할라치면 웃음이 터져 ‘얘랑 뭐하고 있는 건가’ 싶을 정도다. ‘유태평양 강쇠’의 이야기에 김우정은 “난 하나도 어색하지 않다”며 강쇠의 가슴팍에 척 하니 손을 올린다.
사랑과 의리로 똘똘 뭉친 커플들은 서로의 매력에 흠뻑 빠졌다. 김우정의 눈에선 ‘꿀’이 뚝뚝 떨어진다. 그는 유태평양의 ‘오랜 팬’을 자처했다. 스스로를 ‘성덕’(성공한 덕후)이라고 말할 정도다. 김우정은 “우리 강쇠(유태평양)는 마초 같은 다부진 매력을 가졌다”며 “옹녀를 한 번에 들어올릴 때는 ‘시몬스 같은 흔들리지 않는 편안함’이 있다”며 웃었다. 유태평양은 “물색 모르고 웃는 순수한 여자가 나의 옹녀(김우정)”고 화답했다.
‘선배 커플’도 질 수 없었다. 이소연은 “우리 강쇠(최호성)는 의지가 되는 남자”라며 “백허그를 해주는 장면에선 폭 안기는 느낌이 든든한 기둥같다”고 했다. 그의 강쇠 최호성에게 이소연은 “내겐 너무 가벼운 누나”다. 그는 “허리디스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너무 가벼워 들어올릴 때에도 전혀 영향을 주지 않는다”며 “뻔뻔하고 자신있는 연기를 보여줘 상대 배우로서 흔들리지 않을 수 있다. 중형차를 타는 것 같은 안정감이 있다”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저기 가는 사내 뒷태가 나는 좋아. 팔자가 사나워서 만나는 족족이 사흘을 못 견뎌 떠났지만 우리 변서방은 아니라네. 술 좋아라 투전질 좋아라 해도 날 사랑하시니 나는 참을 만허네.” (옹녀 대사 중)
천하의 ‘쓰랑꾼’(쓰레기 사랑꾼)이 따로 없다. 도박에 쌈박질에 술은 또 어찌나 마시는지. 유태평앙은 “욜로족 같은 자유로운 영혼”이라고 했고, 최호성은 “요즘 같으면 당장 이혼감”이라고 했다. 그런데도 옹녀에겐 단 하나 뿐인 사랑이다.
이 창극의 묘미는 시대를 거슬러 재탄생한 옹녀와 이들을 바라보는 시선의 변화에 있다. ‘팔자 세고 색(色)만 밝히는 여자’로 그려진 옹녀는 ‘운명의 굴레를 벗고 삶을 개척하는 당찬 여인’으로 다시 선다. 변강쇠 옆에 ‘점’이 찍힌 이유다.
네 사람은 ‘변강쇠 점 찍고 옹녀’를 만나며 수많은 자료를 통해 이 판소리를 다시 공부하는 시간을 가졌다. 유태평양은 “5년 전 20대에 변강쇠를 맡았을 때와 30대가 된 지금 대사 한 줄 한 줄의 의미가 달라진다는 것을 느낀다”고 했다. 이들에겐 해학 안에 가려진 옹녀와 변강쇠의 고단한 서사가 애틋하다. 이소연은 “세월이 흐르며 작품을 해석하는 깊이가 달라진다”며 “색의 상징으로 여겨진 두 사람의 내면을 들여다 보니, 이들이 결국 하고 싶은 말은 사랑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했다.
최호성은 변강쇠의 내면을 가장 잘 담은 대사로 그의 마지막 고백이자 유언을 꼽는다. “철부지 같은 남자가 옹녀를 만나 짧지만 뜨거운 사랑을 하고 난 뒤 전하는 말”이라고 한다.
“‘난 임자가 좋은가벼’. 이 한 줄엔 장돌뱅이 생활을 하며 외로움과 슬픔을 안고 살던 변강쇠의 마음 한 켠에 ‘사랑’이라는 그린벨트가 있다는 걸 보여주더라고요.” (최호성)
대본 곳곳엔 찰진 표현으로 말 맛이 살아난다. 이소연은 “극의 템포가 굉장히 빠르고 중의적인 표현이 많다”며 “표면적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겹겹이 레이어된 단어들을 알아차리면 무릎을 탁 치는 감탄이 나온다”고 했다. 최호성은 “구구절절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한 단어로 압축해 툭 던지는 말맛이 일품”이라며 감탄했다. 변강쇠와 옹녀가 서로의 성기를 묘사한 ‘기물가’를 부르는 장면은 이 창극의 백미다. 최호성은 “기막힌 표현들이 나오는 데다 가장 직접적인 묘사를 살렸다”고 말했다. 작창과 작곡을 맡은 한승석은 전통 악기만 사용해 우리 소리의 묘미를 끌어냈다.
긴 시간 ‘국민 창극’으로 자리한 ‘변강쇠 점 찍고 옹녀’는 유쾌한 파격‘으로 엄숙주의를 전복한다. 이소연은 “가장 보편적인 사랑 이야기로 인종과 지역을 초월해 공감을 불러오는 작품”이라며 “판소리도 창극도 보수적이라는 선입견을 깨는 작품”이라고 했다. 김우정은 “격조 높게 야한 창극”이라며 눈을 반짝였다.
“대놓고 야한 게 아니라, 에둘러 표현해 고급스럽게 포장한 야함을 품었어요. 한 번에 야하다고 와닿기 보다 곱씹을수록 야하죠. 은유적으로 표현하니 관객들도 3~5초 뒤에 웃음이 터지더라고요. 집에 돌아가는 길에 문득 떠올라 야한 창극의 깊은 맛을 알게 될 겁니다. (웃음)” (유태평양)
“뮤지컬로 치면 ’맘마미아!‘와 같은 스테디셀러 아닐까요? 배우와 창작진 모두가 자부심을 가지면서 대중성을 가진 창극은 흔치 않아요. 아직 창극을 본 적이 없는 관객도, 창극을 좋아하는 관객에게도 자신있게 추천하는 작품이에요.” (이소연)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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