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아프리즈’ 잔치 너머 주목해야 할 강소 작가들

노형석 기자 2024. 9. 5.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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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살 주재환부터 30대 작가팀 ‘s.a.h'까지
‘서울에서 가장 높은 미술관’으로 꼽히는 자하미술관에 차린 원로 작가 주재환씨의 기획작품전 ‘좀 살자’의 전시 광경. 인형이 의자에 앉아 캔버스를 응시하는 설치작품 뒤 벽에 그의 대표작인 쇼핑백 부착 설치작품 ‘쇼핑맨’이 보인다. 노형석 기자

이제 84살, 미술가로서 60년 가까운 세월을 원 없이 살았다.

주재환 작가는 1980~90년대 진보적 민중미술운동 진영의 맏형 노릇을 하면서 리얼리즘과 개념미술 사이에서 고수의 길을 닦아온 이다. 작업할 돈이 넉넉했던 적은 평생 한번도 없었지만, 언제나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시대와 세상을 주시하고 표현했다. 시선이 일러주는 대로 노끈, 헝겊, 전단지, 쇼핑백, 플라스틱 장난감 조각, 커피믹스 봉지 같은 허접한 것들을 줍고 모아서 자신의 글, 지인들의 싯구와 엮었다. 이렇게 만든 그의 가난한 예술품들에서는 촌철살인의 풍자와 주옥같은 풍류의 메시지들이 쏟아져나오곤 했다.

‘서울에서 가장 높은 미술관’으로 꼽히는 인왕산 자락 부암동 자하미술관 1, 2층에는 요즘 주 작가의 신작·근작·구작들을 망라해 주무른 작품기획전 ‘좀 살자’(13일까지)가 펼쳐져 있다. 중견 큐레이터 이영철씨가 1998년 ‘도시와 영상’전 출품 이래로 26년 만에 다시 작가와 합심해 마련한 이 기획전에는 허름해 보이지만 절실하고 강렬한 지금 현실 이야기를 내뿜는 주재환표 개념미술의 진수들이 나왔다. 버려진 쇼핑백들로 우아하면서도 허접한 분위기가 함께 서린 소비중독자 도시인의 풍모를 만든 ‘쇼핑맨’과, 오직 볼펜 한자루만으로 메모지 종이가 닳을 정도로 집요하게 곡선을 그려대면서 제도권 화단의 권력이던 단색조 모노크롬 작가들을 풍자한 ‘볼펜 한자루의 수명’ 같은 구작들이 먼저 시야에 들어온다. 버려지거나 헐값에 나온 잡동사니들을 모아서 유사 팝아트적 작품을 만들면서 수상한 시대 상황을 일러주거나 시장의 탐욕과 과시욕을 배후에 숨긴 채 포장된 제도권 미술의 위선을 풍자하는 특유의 작업들이다.

이영철 기획자는 신구작을 결합시켜 자본주의 소비문화에 대한 작가의 날선 비판 의식을 새롭게 불러내기도 한다. ‘내가 낳은 알은 왜 동전으로 바뀌었을까’란 문구를 붙인 동전통 위에 머리를 박은 새의 상은 ‘키커가 차는 공 속도는 0.4초, 천국과 지옥 사이는 0.2초’라는 제목이 붙은 페널티킥 장면 재현 색종이 작품 아래에 잇닿으면서 관객의 머릿속에 기묘한 연상작용을 불러 일으킨다. 2층에는 헝겊과 천 덩어리로 만든 염라대왕상과 합성수지 등의 혼합재료로 만든 ‘웃는 똥’ 등 신작들이 다수 나왔다. 어릴 적 동네 할머니들이 생활고와 세파에 부대끼는 처지를 털어놓으면서 ‘좀 살자’고 입버릇처럼 말했던 것을 들은 기억에서 전시 제목을 만들었다고 한다. 여든 넘은 나이에도 출품작 89점 중 45점을 최근 1~2년 사이 작업한 신작으로 채울 만큼 여전히 왕성한 그의 창작력을 실감할 수 있다.

지난달 14일부터 한달간 서울 관훈동 나무아트 화랑 안에 차린 정복수 작가의 특설 초상화 전시실 겸 작업실. 작가 자신이 전시장에 상주하면서 자신과 예약한 이들의 초상화를 그리는 작업들을 관객들에게 모두 공개하는 파격적인 기획이다. 노형석 기자

주재환 작가의 작품전은 지금 한국 미술판에서 새롭게 눈길을 열어두고 봐야할 강소 작가의 첫 목록에 오를 법한 전시마당이다. 4~8일 열리는 세계적인 미술장터 프리즈와 국내 최대 미술장터 키아프를 맞아 미술판은 흥청거리는 잔치 분위기지만, 이 기간 중에 화랑가 너머 강소 작가들이 차린 색다른 기획전들에도 눈길을 두며 한국 미술의 지층을 새롭게 살펴보는 것도 좋겠다. 이런 맥락에서 주 작가에 이어 거명할 수 있는 이가 중견 화가 정복수(67)씨다. 지난달 14일부터 한달간 그는 서울 인사동 거리의 북쪽 들머리 나무아트 화랑에 초상화 전시실 겸 작업실을 개설한 이색 작품마당을 벌여놓았다. ‘생면부지 생면표지’란 개인전 제목이 암시하듯이 작가가 상주하면서 예약한 이들과 자신의 초상화를 그리는 작업들을 전면 공개하는 파격적인 기획이다. 청년 시절이던 1970년대 부산에서 그림에 대한 열망과 세상에 대한 저항의식을 안고 그렸던 초상화들이 줄줄이 내걸렸다. 안쪽 공간에서는 작가가 지금 그리고 있는 다른 이들의 초상 작업 드로잉과 채색 작업 현장을 살펴볼 수 있다. 작가가 눈과 손을 집요하게 놀려 이루어내는 회화 창작의 핍진한 현장을 실견하며 관객이 예술가와 직접 공명할 수 있는 드문 자리다.

청년 작가들도 만만치 않은 문제작들을 내놓으며 초가을 프리즈·키아프 시즌 화단 한구석에 존재감을 심었다. 서울 강북 연희동 스페이스 애프터에서 ‘그림자가 머무는 곳’이란 제목으로 13일까지 개인전을 여는 임노식 작가가 대표적이다. 그는 자신과 보는 대상물 사이에 흐르거나 머무는 공기의 실체를 붓으로 그리려는 시도를 보여준다. 보이지 않는 물질인 대기가 온도, 습도 등으로 나타내는 존재감을 포착하려고 호흡과 몸짓 등을 조절하며 예민하게 감각을 다잡은 작가는 붓 자국 위로 투명 색연필과 투명 오일 파스텔을 되풀이해 구사했다. 이런 방식으로 작업실에 있는 공기의 풍경 혹은 자태를 희미하고 멀건 막의 이미지들로 표현해냈다. 과거부터 자신의 작업실 공간에서 집요하게 회화적 요소와 풍경의 실체를 천착하며 꾸준히 작업을 진전시켜온 뚝심이 돋보인다.

서울 강남 쪽에도 강소 작가들의 근작들이 최근 다수 풀려나왔다. 신사동 아뜰리에 에르메스에는 지난해 에르메스미술상 수상자 김희천 작가의 신작이 나왔다. 레슬링부 훈련 중 사라진 학교의 소년들과 우울증에 빠진 채 이를 지켜보는 코치의 의식 내면을 공포영화의 틀거지로 풀어낸 영상 전시회 ‘스터디’(10월6일까지)다.

신사동 코리아나미술관은 조주현, 이원우, 도유진 등 청년세대 작가 9명이 꾸린 기획전 ‘불안 해방 일지’(11월23일까지)를 펼쳐놓았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 청년들이 현실과 미래 앞에 느끼는 불안감들을 회화, 애니메이션, 설치조형물, 다큐멘터리 영상 등의 다기한 시각 장르로 표현한 작품 34점이 나왔다.

페리지갤러리 전시장에 나온 신디하 작가의 조형물 ‘회색둥지’의 세부. 페리지갤러리 제공

김의선, 신디하, 작가 듀오 s.a.h(심유진·한지형)가 출품한 서울 서초동 페리지갤러리의 ‘활동적인 풍경’전(7일까지)도 눈길을 끈다. 스스로 건축적 작용을 하는 물질의 존재를 상상해 콘크리트 건물에 증식하는 가상의 시멘트 종유석과 석순을 형상화한 신디하 작가의 작업이 새롭게 다가온다.

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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