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이기든 비자금은 비자금: 1조원 소송의 함의 '국고환수론'
세기의 이혼 소송과 비자금
소송 쟁점 재산분할론의 빈틈
불법 비자금은 개인 소유일까
비자금 국고환수 논의해야
국회에선 비자금 몰수법 발의
# 최태원 SK 회장과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의 이혼소송이 '대법원 판결'을 앞두고 있다. 이번 소송이 논란을 일으킨 건 1조원이 넘는 재산분할 규모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위자료 지급 등 가십성 이슈들이 줄줄이 쏟아져 나오면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
# 하지만 이 소송은 '중대한 함의'를 갖고 있다. 노소영 관장의 손을 들어준 2심 법원의 판결이 3심까지 이어진다면 '불법으로 조성한 비자금과 그를 토대로 만들어진 재산이 개인에게 넘어가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연출되기 때문이다. 여러 학자들이 '이 소송에서 도출된 비자금은 국고로 환수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른바 '비자금 국고환수론'인데, 더스쿠프가 이 쟁점에 펜을 집어넣었다.
'세기의 이혼'으로 불리는 최태원 SK 회장과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의 이혼소송이 대법원 상고심을 앞두고 있다. 대법원은 지난 8월 21일 최 회장과 노 관장의 이혼소송 사건을 대법원 1부에 배당했다고 밝혔다. 대법원 판결이 짧게는 5개월(민사소송) 길게는 수년이 걸린다는 점을 감안하면, 소송 결과는 해를 넘어야 확인할 수 있을지 모른다.
다만, 이번 소송은 '비자금'과 'SK 경영권'이란 이슈가 얽혀 있어 짚어볼 점이 많다. 먼저 소송의 핵심인 '재산분할'부터 살펴보자. 최 회장이 노 관장을 상대로 제기한 이혼소송 1심 재판(2022년 12월)에선 최 회장의 이혼 청구를 기각하면서 노 관장에게 재산분할로 655억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양측 모두의 항소로 열린 항소심(지난 5월)에선 세상을 깜짝 놀라게 만든 결과가 나왔다. 항소심 재판부가 최 회장이 노 관장에게 지급해야 할 재산분할 금액을 1조3808억원으로 판결했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도출된 '쟁점' 하나가 다름 아닌 비자금이다. 노 관장은 SK그룹이 지금처럼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엔 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자금과 정권의 후광이 작용했다고 주장했고, 재판부가 이를 받아들였다. 반면 SK는 정권의 후광은커녕 '노태우의 사업 방해'로 수차례 위기를 겪었다고 반박했다. 대체 누가 '진실의 혀'를 깨물고 있는 걸까. 하나씩 살펴보자.
■ 비자금 논란➊ SK의 주장 = SK는 300억원의 비자금 유입설에 강력하게 반발했다. 더 나아가 노 전 대통령의 방해로 SK가 위기를 겪었다고 맞받아치고 있다. SK가 꼽는 대표적 사례는 1980년 선경(옛 SK)의 대한석유공사(유공) 인수였다.
재계 20위권을 맴돌던 선경의 순위는 유공을 인수한 직후 단숨에 5위권으로 수직 상승했다. 당시 전두환·노태우를 위시한 신군부가 정권을 장악했던 터라 선경의 유공 인수에 노 전 대통령의 입김이 닿은 게 아니냐는 의혹이 일었다.
SK는 정반대의 주장을 펼치고 있다. 당시 신군부는 선경이 아닌 경쟁사에 유공을 넘기기로 결정했고, 그 중심엔 경쟁사로부터 로비를 받은 노 전 대통령이 있었다는 것이다. 익명을 원한 업계 관계자의 말을 들어보자.
"선경이 유공을 인수할 수 있었던 건 안정적인 원유 조달 능력과 정제 기술이 월등했기 때문이었다. 노 전 대통령이 입김을 불어넣었다고 하는데, 그때 최태원 회장과 노소영 관장은 혼인 상태도 아니었다."
SK는 노태우 정부 시절인 1992년 8월 획득한 제2이동통신 사업권을 일주일 만에 반납한 것도 노 전 대통령이 압력을 행사한 결과라고 주장하고 있다. 당시 선경그룹이 제2이동통신사업자로 선정되자 정치권 안팎에선 "현직 대통령 사돈기업에 사업권을 부여했다"는 특혜 논란이 일었고, 이를 의식한 SK가 사업권을 반납했다는 거다.
최 회장과 노 관장은 1988년 혼인했다. 실제로 정부가 제2이동통신 사업자를 선정한 지 일주일 후인 1992년 8월 27일 대통령비서실에서 당시 손승길 대한텔레콤(옛 선경텔레콤) 사장에게 '자진반납' 공문을 보낸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이후 선경은 '사업자 선정'이 아닌 민영화에 나선 한국이동통신의 지분을 매입하는 방식으로 이동통신사업에 뛰어들었다. SK그룹이 재계 순위 2위로 올라선 건 노태우 정권의 후광과 무관하다고 주장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물론 SK의 주장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긴 힘들다. 당시는 뇌물과 청탁으로 기업이 사업을 확장하고, 정권의 눈 밖에 난 기업은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정경유착'의 시대였다. 당시 권력을 거머쥐고 있던 전두환과 노태우가 어마어마한 비자금을 모을 수 있었던 것도 정경유착의 '오염된 결과물'이었다. 정권의 후광으로 성장한 게 SK만은 아니었다.
짚어볼 건 또 있다. 정권의 후광과 무관하게 노태우 정권 시절의 '비자금'이 재산분할의 대상이 될 수 있느냐다. SK와 최 회장의 주장뿐만 아니라 노 관장의 견해도 검증해봐야 하는 건 이 때문이다.
■ 논란➋ 노 관장의 주장 = 자! 지금부턴 노 관장의 주장을 따라가보자. 2심 재판부가 1조3808억원 재산분할 판결을 내린 데 결정적인 트리거 역할을 한 건 노 관장이 제출한 이른바 '(선경) 300억원 메모'다. 노 관장은 2심 재판부에 자신의 어머니이자 노 전 대통령 부인 김옥숙 여사의 메모와 선경건설이 발행한 50억원짜리 약속어음 6장의 사진을 증거로 제출했다. 노 관장이 증거로 제출한 메모는 두장이다.
첫번째 메모엔 '1998년 4월 1일 현재, 최 실장 2억원, 노재우 251억원+90억원, 선경 300억원, 최 상무 32억원, 맡긴 돈 667억원+90억원'이란 내용이 적혀 있다. 두번째 메모엔 '1999년 2월 12일 현재, 노 회장 150억원, 신 회장 100억원, 선경 300억원, 이병기 52억원, 최서방 32억원 정 실장 30억원' 등 총 904억5000만원의 자금이 기재돼 있다.
이 주장을 쉽게 요약하면 이렇다. "당시 비자금 300억원을 선경그룹에 빌려줬고, 그 돈은 태평양증권(현 SK증권) 인수 자금으로 쓰였을 것이다. 비자금을 발판 삼아 SK가 재계 2위의 대기업으로 성장했기 때문에 최 회장이 보유한 SK 주식도 공동 재산에 포함된다."
SK가 노태우 정권의 비자금을 마중물로 삼아 성장했으니 그에 걸맞게 재산을 나눠야 한다는 거다. 어쩌면 이 주장과 '300억원 메모'가 법적 다툼에선 노 관장을 유리한 고지에 올려놨을지 모른다. 법조계 한편에선 '적절한 카드를 내밀었다'는 말도 나온다.
하지만 이런 주장이 '국민적 공감대'를 얻을 수 있을진 의문이다. 불법 비자금과 정권의 힘을 빌려 축적한 재산을 '개인'인 노 관장이 거머쥐어도 괜찮느냐는 의문이 일 수밖에 없어서다. 이는 이른바 '비자금 국고환수론'과 연계된다.
■ 논란❸ 비자금 국고환수론 = 한편에선 이렇게 반박한다. "노 전 대통령은 이미 사망했다. 더구나 1997년 4월 대법원에서 선고한 비자금 몫의 추징금 2628억9600만원을 모두 납부했다. 이제 노 전 대통령을 둘러싼 비자금 논란은 해소됐다고 봐야 한다."언뜻 그럴듯하지만 빈틈이 적지 않다. 이번 소송에서 증거로 등장한 '약속어음 300억원'은 처음 제기된 이슈다. 메모에 적혀 있는 '비자금 900억원'의 실체도 모호하다.
이런 상황에서 노 관장이 대법원에서도 승소해 재산분할을 인정받는다면 '비자금과 정권의 후광이란 공정하지 않은 방법으로 만들어진 재산도 합법적으로 개인에게 넘어갈 수 있다'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벌어진다. 기업들로부터 '통치자금'이란 명목으로 뜯어냈을 가능성이 높은 돈의 일부가 사실상 '상속재산'으로 인정되는 셈이기도 하다.
이 때문인지 "불법 비자금으로 쌓은 부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게 바람직하냐"는 비판이 곳곳에서 나온다. 김옥숙 여사의 메모에 적혀 있는 비자금이 밝혀진다면 국고로 환수해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는 이유다. 박상인 서울대(행정대학원) 교수는 "재산 축적이 비자금을 통한 정경유착에서 출발한 것이라면 국민에게 사과를 해야 한다"며 "분할한 재산은 국고에 환수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본다"고 꼬집었다.
대법, 비자금 환수 위해 조사심리 엄격히 해야
불가능한 이야기가 아니다. 정치권에선 최근 전두환·노태우의 비자금을 추징하기 위한 법률을 마련하고 있다. 장경태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지난 2일 발의한 '범죄 수익 은닉의 규제 및 처벌 등에 관한 법률 일부 개정 법률안'이 대표적이다. 이 법의 골자는 '헌정질서 파괴 범죄자'가 사망해 공소제기가 어려운 경우에도 범죄 수익을 모두 몰수하고 추징하는 것이다.
장경태 의원은 "헌정질서 파괴 범죄자의 공소시효는 무기한"이라며 "불법적으로 축적한 범죄수익 역시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철저하게 추징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전두환·노태우씨가 축적한 막대한 금액의 비자금 중 일부는 여전히 파악도, 환수도 하지 못하고 있다"며 "이번 개정안은 불법 자금을 한 푼도 남김없이 끝까지 추적하고 추징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며 강조했다.
■ 공론화할 이슈들 = 이처럼 최 회장과 노 관장의 '이혼소송'은 숱한 이슈를 갖고 있다. 특히 소송의 초점을 '비자금'에 맞추면 도마에 올릴 만한 논제도 많다. 이 때문에 몇몇 전문가는 대법원이 명확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선경 300억원 비자금' '900억원+알파' 비자금 등 소송에서 증거로 제출된 비자금의 출처를 찾을 수 있는 법적 기준선을 내놔야 한다는 거다.
그래야 불법 비자금을 토대로 형성된 '재산'이 어느 쪽에도 갈 수 없는 일종의 '방어선'이 만들어지고, 정경유착의 고리가 어떠한 경우에도 유효할 수 없음을 알리는 계기가 될 수 있다.
한편에선 대법원이 비자금의 실체를 밝혀내는 '마지막 보루'가 돼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전직 대통령의 은닉 비자금과 은닉 범죄자를 향한 분노가 수그러들지 않고 있어서다. 사실 국민들이 두 사람의 이혼소송에 염증을 느끼면서도 주목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지 모른다.
한상희 건국대(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이번 소송을) 정경유착으로 얻은 재산상 이익은 사유화 할 수 없다는 것을 알리는 기회로 만들어야 한다"며 "비자금 몰수법 등 관련법이 발의된 만큼 사회적 논의가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비자금 논란으로 얼룩진 최 회장과 노 관장의 이혼소송은 과연 어떤 결말을 맺을까.
강서구 더스쿠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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